신나라 왕망
황제 즉위 전의 작위는 안한공(安漢公)이며, 원제(元帝)의 황후 왕정군(王政君, 효원황후)의 조카로 성제(成帝)의 어머니쪽 사촌형제에 해당한다. 왕만(王曼)의 차남으로 왕우(王宇) · 왕획(王獲) · 왕안(王安) · 왕림(王臨) · 왕흥(王興) · 왕광(王匡) 등의 아들을 두었다. 손자(왕우의 아들)는 왕종(王宗)이며, 딸은 평제(平帝)의 황후가 된 왕씨와 함께 왕화(王曄), 왕첩(王捷) 등이 있었다. 본부인은 한의 승상(丞相)을 지낸 왕흔의 손자 왕함의 딸이며, 왕영(王永)의 동생으로서 왕광(王光)의 숙부이다.
초기 생애[편집]
황후의 자리에 오른 백모 왕정군에 의해 백부들이 제후에 봉해지고, 고위 관리로서 유복한 생활을 보내는 가운데, 아버지 왕만과 형 왕영(王永)이 일찍 사망하여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다. 왕망은 공손하고 검소함을 가지고, 패군(沛郡)의 진삼(陳參)을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고, 유생의 복장을 입고, 어머니와 형수를 시중들었다. 또 조카의 왕광(王光)을 양자를 삼아 친자식 이상으로 양육하여(뒤에 살해), 왕망의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권력을 장악하다[편집]
백부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이 들자, 간병을 하였고, 왕봉의 인정을 받았다. 왕봉이 죽은 이후, 왕상(王商)과 왕근(王根)의 추천과 백모인 황태후의 후원으로 왕망은 순조롭게 출세한다. 친척 순우장(淳于長)을 실각시켜, 대사마(大司馬)가 되면서, 왕망의 기세는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로 되었다. 애제(哀帝)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정계 복귀의 탄원이 계속 올라오자 그는 정계 복귀를 한다.
기원전 1년 한 애제가 급사하고, 한 평제(漢平帝)가 즉위하면서, 왕정군은 이 기회를 타서 태황태후의 지위를 이용하여, 한 애제의 외척 및 측근 세력을 배제하여, 조카 왕망을 대사마에 임명하였다. 그 무렵 왕망은 찬탈의 의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것을 눈치 챈 왕정군은 왕망을 제후로 임명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반대를 하는 입장을 취했다. 한 평제가 독살되고 유영(劉嬰)이 황제로 옹립 되자, 왕망이 주나라의 성왕 (成王)과 주공 단(周公旦)의 고사에 모방하여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다. 왕망은 왕정군에게 전국옥새를 자신에게 인도하도록 요구했을 때, 다툼이 벌어져 옥새는 훼손되었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2] 애제가 붕어하자 애제로부터 황제의 옥새를 맡고 있던 대사마 동현(董賢)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하여, 중산왕 간(衎)을 옹립하고(평제) 대사마가 되었다. 이어 고문경학의 대가였던 유흠(劉歆)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많이 끌어들여 유학과 서상(瑞祥), 부명(符命, 일종의 예언서)에 근거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차남 왕획(王獲)을 잡아 노복(奴僕)을 죽인 죄를 묻는가 하면 장남 우(宇)의 모략죄를 물어 감옥에 가두었다가 모두 자결하게 했다. 딸을 평제의 황후로 책봉하고, 재형(宰衡), 안한공(安漢公)이 된 후, 5년에 14살이 된 평제가 사망하고(왕망에 의한 독살[3]), 광척후(廣戚侯) 현(顯)의 아들 영(嬰)을 황태자로 세워서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 · 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하며 조정의 만기를 집전하였다.
황제가 되다[편집]
천하를 노리고 있던 왕망은 고문을 전거로 자신의 제위 계승을 정당화하려 했다. 마침 애장(哀章)이라는 인물이 고조(高祖)의 예언이라며 「금궤도(金匱圖)」와 「금책서(金策書)」를 위조해 바쳤는데[4], 이를 전거로 거섭 3년(8년), 왕망은 고조의 영혼에게 선양을 받았다고 하여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신 왕조를 열었다. 이 사건은 역사상 최초의 선양이었지만 실상은 찬탈과 다름이 없었다. 태황태후로서 전국새(全國璽)를 맡고 있던 효원황태후 왕정군은 사자로서 옥새를 받으러 온 왕망의 사촌형제 순(舜)에게 왕망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 순이 옥새를 내어줄 것을 재촉하자 옥새를 내던지며 "너희 일족은 모두 멸망할 것이다"라 저주했다고 사서는 전한다.
주 시대의 치세를 이상으로 삼은 왕망은 《주관(周官)》[5]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국가 정책을 실시했지만, 현실성이 결여된 각종 정책은 단기간에 파탄나고, 화폐 유통과 경제 활동도 정지되어 민중의 상활은 한조 말기 이상으로 곤궁해졌다. 또한 흉노나 선비 등 주변 민족과 고구려 등의 국가의 지도자의 칭호를 제멋대로 고치고, 특히 고구려왕의 칭호를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모멸적인 명칭인 하구려후(下句麗侯)로 부르게 해 고구려와 충돌하였으며, 이는 이민족들의 반발과 관계 악화로 이어져 이를 토벌하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또한 전매제 강화도 실패하여 신의 재정은 빈곤해졌다.
반란과 최후[편집]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농민들은 마침내 신 왕조에 맞서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1 8년에 적미의 난이 일어났고, 남양군(南陽郡)에서 옹립된 유현(劉玄)을 토벌하러 보낸 신의 100만 군대도 곤양(昆陽)전투에서 경시제 휘하의 유수(劉秀)에게 패배하여, 이것으로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대혼란에 빠진다. 그의 신하도 배신하고, 장안에는 경시제의 군대가 입성, 왕망은 그 혼란 중에서 두오(杜吳)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수급은 경시제가 있던 성으로 보내졌으며, 몸은 공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마구 찢어지고 흩어졌다고 한다.
왕망의 죽음으로 신은 멸망하였다.
평가[편집]
중국 역사상 최초의 '찬탈'을 저지른 인물이라는 이유로, 왕망에 대해서는 정치면에서뿐 아니라 인간성까지 포함한 비판적인 평가가 내려진다.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는 「왕망전(王莽傳)」에서 다음과 같이 왕망을 평하였다.
왕망은 입이 큰데 턱이 짧고, 퉁방울눈에 눈이 빨갛고 크고 걸걸한 목소리였다. 키는 7척 5촌(약 173cm)으로 바닥이 두꺼운 신발과 높은 관을 좋아했고 북실북실하고 생기있는 털을 옷에 넣어 가슴을 젖혀 높은 곳을 보고, 먼 곳을 바라보듯 좌우의 눈을 보았다.
왕망은 외모나 대인관계에 특히 집착을 보여, 의식 때에는 수염이나 머리를 검게 물들여 좀 더 젊게 보이려 한 반면, 부명이나 서상 같은 신비주의적인 도참설을 이용해 자신의 등용과 즉위를 정당화시키려 했고, 그때에도 자신이 주위의 추천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받는 시늉을 하는 등 간계와 지모에도 능했다고 한다. 덧붙여 왕망 때에는 너무도 이상한 정책이 실행되었다고 《한서》는 전하고 있는데,
- 왕망을 거스른 적의와 공모한 왕손경(王孫慶)을 잡아 태의(太醫)를 시켜 해부하게 하여 오장과 혈관에 대해 기록하고는 「이것으로 병의 치료법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하늘의 도움을 구하고자 우는 소리가 슬프고 애처로운 자를 뽑아 낭(郞)으로 채용했다. 이러한 낭의 숫자만 5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 어떤 사람이 하루에 천 리를 날아가 흉노를 정찰할 수 있다고 하여 왕망이 그것을 시도하게 했는데, 그는 큰 새의 날개를 뭍이고 온몸에 깃털을 입고 끈으로 고정시킨 차림으로 수백 발이 넘는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이러한 실정뿐 아니라 인간성의 문제를 들어 왕망은 간신(姦臣)의 대표격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명대의 오승은(吳承恩)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孫悟空)이 날뛰던 시기(오행산에 갇힐 때까지)를 왕망 시대로 정했는데, 이것은 「폭군 · 왕위 찬탈자 · 거짓 천자가 황위에 있으면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는 전승을 왕망의 찬탈과 겹쳐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고려의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보낸 답서에서 「기회를 엿보아 한(漢)을 도모하였으니 왕망·동탁(董卓)의 간계(姦計)만 보일 뿐이었다」고 하여, 견훤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쳐들어가 약탈을 저지르고 경애왕을 죽게 한 행동을 한 조정을 어지럽히고 애제를 독살한 왕망의 전적에 빗대어 비난하고 있으며, 《중종실록》에도 조광조의 정책에 반대하는 훈구파들이 「주초(走肖)의 무리가[6] 저지른 간사함이 왕망이나 동탁 같아 온 나라의 인심을 얻고 백료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며 조광조를 왕망에 빗대고 있다. 일본에서도 《도지가전(藤氏家傳)》 대직관전(大織冠傳)에서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의 정치를 「안한의 궤휼(安漢の詭譎)」이라 비판하였으며,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도 조고(趙高) · 안록산(安祿山) 등과 함께 조정을 어지럽힌 조적(朝敵)으로서 왕망의 이름을 거론하였으며,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의 난폭한 행동을 왕망에 비유하기도 하는 등 간신의 대표격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왕망에 의해 정해진 것도 있다. 한의 조신으로 있던 시대에 왕망 자신이 정한 황제의 즉위 의식은 광무제 이후의 역대 황제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황제의 즉위식에 즈음해서는 왕망이 정한 의식에 기초한 모든 의례들을 행했다. 학(學) · 교(校)라는 유학 교육기관을 전국에 설치하고 유학 공부를 장려한 것도 왕망의 치세하에 이루어진 일이며, 결과적으로 후한 시기에는 유학을 배우는 사람이 많아졌다고도 한다. 20세기 한국의 사학자 신채호는 왕조 교체가 빈번했던 중국의 역사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왕조가 이전 왕조를 대신할 때마다 일시적으로 요역을 면제하고 부세를 감해주는 고식적인 시혜를 베푸는 척하다가 다시 옛 왕조의 규정을 되살려서 폭(暴)으로 폭을 대신하는 무의식한 내란만 되풀이되었을 뿐 진정한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왕망만은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법(井田法)을 실행하고 한문화(漢文化)로 세계를 통일한다는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했다며 왕망의 찬탈을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칭찬하였다.
각주[편집]
- ↑ 《한서》에는 '莽'자가 초두 밑의 글자가 大가 아닌 犬으로 되어 있다.
- ↑ 신도후의 봉국은 남양군(南陽郡)에 있었다.
- ↑ 《한서》 평제기(平帝紀)의 주(注)나 반란군 적의(翟義)의 격문에는 왕망이 독살했다고 했다.
- ↑ 여기에는 천하를 맡은 왕망을 보좌한 인물로서 왕망의 심복과 함께 「왕흥」과 「왕성(王盛)」이라는 이름도 있었지만, 유력 관료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라 문지기였던 왕흥과 떡장수였던 왕성을 공(公)으로 임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한서》 왕망전)
- ↑ 이 책 자체에 대해서도 왕망이 유흠을 시켜 창작한 것이 아니냐는 설이 남송(南宋) 시대부터 제기되어 청(淸) 말기까지 이어졌다. 홍매(洪邁)의 『용재속필(容齋續筆)』권16 「주례는 주공의 글이 아니다(周禮非周公書)」, 캉유웨이(康有爲)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의 「한서유흠왕망전변위권륙(漢書劉歆王莽傳弁僞第六)」 등이 대표적이다.
- ↑ 주초(走肖)는 한자 파자로서 붙이면 조(趙)가 되어 조광조를 가리킨다. 훈구파들은 당시 벌레가 갉아먹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적힌 나뭇잎들을 잔뜩 만들어서 퍼뜨린 뒤, 조광조 일파가 왕망이 자신의 세력 팽창에 도참설을 이용했듯이 장차 도참설을 가지고 조선 왕조를 찬탈하려는 역심을 품고 일으킨 사건이라며 몰아세웠으며, 결국 이로 인해 조광조는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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