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안녹산 사사명 안사의 난

안녹산 사사명 안사의 난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Shi Rebellion)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녹사와 그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에 의해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녹사와 사사명의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녹사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녹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고 하여 칭제를 했으며, 9년간 지속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중국의 인구는 3600만명이 줄어들었으며, 이것은 전란으로 소실된 호적 체계 때문이기도 하였다.[1]당나라 말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개원의 치를 이끌었던 현종 양귀비에 빠져서 정치를 고력사 등의 환관들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양국충 등의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정치가 시작되었다.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결국 755년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된다.
부패한 관리와 환관정치로 인해, 수탈을 당할 대로 당한 농민의 소외로 자립 소농민층이 해체된 것도 원인이다. 해체된 자립 소농민층은 유민화되었다.
당나라는 이때 지배체제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측천무후 때 억압된 귀족 세력이 현종 때에 다시 집권했다. 구집권층과 지주, 상인층 출신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경과[편집]

영향[편집]

안사의 난으로 8년 간의 전란에 시달려 많은 농민들이 죽고, 당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 전란으로 인해 전국의 인구는 293만 호로 13년 전의 890만 호에 비해 70%의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753년 52,880,488명의 인구가 764년에는 16,900,000명으로 기록되었다.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뀌었다.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875년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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