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7일 화요일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우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우


이우(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이자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이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성길(成吉)이며, 아호는 염석(念石), 상운(尙雲)이다.[1] 1917년에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당숙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운현궁을 상속한 후에 공위를 세습 받아 ‘이우공 전하’라는 공족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망 이후에 사시인 흥영군(興永君)에 추봉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동궁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좌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인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지만, 조선인과 혼인하기 위해 저항하여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였다. 1945년 8월 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어 8월 7일에 히로시마 시 니노시마에서 사망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경성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운현궁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2]

생애[편집]

운현궁 계승[편집]

이우는 1912년 11월 15일 오전 6시에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중부 관인방 사동궁에서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人)이다.[3] 1917년 3월 22일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이우는 5월 28일에 당숙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4]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하였다.[5] 이준용은 자녀로 소실 전순혁(全順爀)에게서 얻은 서녀 이진완만이 있었고 남자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1917년 3월 23일에 덕수궁에서 열린 친족회의에서 고종의 뜻에 따라 의친왕의 차남 이우를 양자로 결정하였다.[6][7] 같은 해 5월 28일에는 상속을 승인하는 다이쇼 천황의 특지가 일본 궁내성 고시 제8호로 발표되었으며,[8] 8월 4일에는 재산 관리와 보육의 후견인으로 이준공비 광산 김씨(光山 金氏)와 이왕직 장관이 선임되었다.[9]
이준용은 1912년에 사망한 아버지 이재면의 뒤를 이어 ‘공’(公)의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운현궁의 상속자로 결정되자 공위를 세습 받아 한정된 범위의 왕공족에게만 사용되던 ‘전하’(殿下)의 경칭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공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은 이강과 이우 밖에 없었다.[10] 이우의 신분인 공족의 공은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 제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해 새롭게 창출한 신분이다. 공은 오등작의 일종인 일본 화족과 조선귀족의 공작과는 다른 개념으로 서열상 일본 황족과 왕족 아래에 위치하지만 화족과 조선귀족보다는 높은 지위이며, 일본 황족에 편입된 신분은 아니지만 병합 당시 공포된 메이지 천황의 조서에 따라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11]

일본 유학과 입대[편집]

이우 (1922년경)
남대문 정거장에서 출발 장면
(1922년 7월 5일)
1915년에 경성유치원에 입학하여[12] 191 8년 3월 28일에 졸업하였다.[13] 일본에서 일시 귀국한 영친왕 이은이 191 8년 1월 25일에 경성유치원을 방문하였을 때 이우는 영친왕 앞에서 ‘매화와 꾀꼬리’라는 창가를 불렀다.[14] 1919년 1월 21일에 고종이 승하하자 150일 동안 복상(服喪)을 하였다.[15] 같은 해 4월에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하였다.[12] 1922년 봄에 종로소학교에서 심상과 3학년 과정을 마치고, 같은 해 7월 5일에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습원 초등과 4학년에 편입하였다.[16][17] 같은 해 7월 22일에 여름 휴가를 이유로 조선으로 귀환하면서 오사카 역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오사카의 조선인들이 이우를 둘러싸고 일을 모의한다는 소문이 돌아 오사카 소네자키(曾根崎) 경찰서에서 다수의 조선인을 검속하였다.[18]
이우는 일본 도쿄에서 체류하면서 거주하기 위한 부동산을 구입하였으며 운현궁 도쿄 별저로 불렸다.[19] 별저는 도쿄 부 도요타마 군 시부야 정 오아자시타시부야(大字下澁谷) 아자도키와마쓰(字常磐松) 321번지(1932년 시군병합으로 도쿄 시 시부야 구 도키와마쓰 정 101번지로 개편)에 있었다.[20][21] 저택은 궁내성 내장료(內匠寮) 기사에 의하여 설계되었고, 1925년에 완공되었다.[22] 내전과 외전으로 구분되었고, 포틀랜드 시멘트 반죽과 회반죽으로 마감한 브라운색이 도는 회색빛의 서양식 2층 건물이었다.[19]
이우 (1933년경)
이우 (1934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1926년 4월 26일에 장례식을 집행하는 종척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고,[23] 5월 10일에 순종의 능을 천릉할 때에도 종척집사로 임명되었다.[24]
한일 병합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하여 1926년 12월 1일에 일본 황실령 제17호로 제정·공포되었던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59조에 따르면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18세에 달한 후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의무가 강제되었다.[25] 학습원 중등과를 졸업한 이우는 1926년 4월에 육군유년학교 30기생으로 입교하여[21][26] 1929년 3월 18일에 졸업하였다.[27] 1929년 4월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45기생으로 입교하였다.[28] 1931년 3월 18일에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졸업하고,[29][30]사관후보생으로 임명을 받아 도쿄 야포병 제1연대에 배치되어 근무하다가[31] 같은 해 10월 본과에 입교하였다.[32] 1932년 11월에 성년이 되어 이왕직 장관이 맡았던 후견인 업무는 종료되었고,[33][34] 도쿄와 경성 운현궁 노안당에서 관례식을 올렸으며, 조선호텔에서 피로연을 열었다.[35] 1933년 7월 11일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36] 같은 해 10월 25일에 포병 소위로 임관하면서 근위 포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37] 야전포병학교를 수료하고,[38] 1934년 12월에 육군포공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였으며,[21] 1935년 10월에 포병 중위로 진급하였다.[39] 1936년 8월 1일에 도쿄 야전중포병 제8연대로 배속되었고,[40] 같은 해 11월에는 육군포공학교 고등과를 졸업하면서 본래 부대로 복귀하였다.[41][42] 1938년 3월 1일에 포병 대위로 진급하여[43] 야전포병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교도연대 중대장을 겸임하였다.[41]
1938년경에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 황신덕이 운현궁에 교육사업을 위하여 이우가 소유한 경성부 서대문구 죽첨정 일대(현재 강북삼성병원 영안실 부지)의 부동산을 하사해줄 수 있는지 문의하였고, 이우는 이를 흔쾌히 승낙하였다.[19] 1940년 10월 10일에 황신덕은 하사받은 부동산에다가 경성가정여숙(현재 중앙여자고등학교)을 설립하였고, 이와 같은 인연으로 광복 이후 1950년 4월 28일에는 이우의 부인 박찬주가 재단법인 추계학원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44][45]
1938년 12월 27일에 일본 육군대학교 제54기생으로 입교하여[46] 1941년 7월 31일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이우를 포함하여 영친왕 이은, 이건홍사익 뿐이었다.[47] 1940년에 3개월 동안 중국 전선을 시찰하고 9월 26일에 일본 후쿠오카로 귀환하였다.[48] 같은 해 11월에는 육군대학생의 자격으로 중부 제37부대에 소속되어 교토 사단 추계 연습에 참가하였다.[49] 1941년에 조선군사령부에 배속되었고,[47] 같은 해 10월 15일에 소좌로 진급하였다.[50]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3월에 육군대학교 연구부 부원으로 전보되어서[51] 5월에는 각 전선을 시찰하였다.[52] 1944년 3월에 중국 산시 성 타이위안으로 전출되어 북지나 방면군 제1사령부 참모 장교로 근무하였다.[19] 타이위안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타이항산 유격대를 지원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현재 사료적 근거나 정황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53] 타이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은 이우가 중국으로 전출되어 오기 전에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