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전한 선제 전한 소제

전한 선제 전한 소제


한 중종 효선황제 유순(漢 中宗 孝宣皇帝 劉詢, 기원전 91년 ~ 기원전 49년)은 전한의 제 10대 황제(재위 : 기원전 73년 ~ 기원전 49년)로, 는 차경(次卿)이다. 본래 휘는 병이(病已)였으나, 피휘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하여 즉위할 때 (詢)으로 바꾸었다.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고, 곽광(霍光)에게 옹립되어 황제로 즉위했다전한 무제의 증손자로 여태자 유거(戾太子 劉據)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여태자의 아들인 사황손(史皇孫) 유진(劉進)이다. 어머니는 왕씨(王氏)이다.
기원전 91년 무고의 옥에 의해, 증조모 황후 위자부(衛子夫), 조부 유거, 조모 사씨(史氏), 아버지 유진, 어머니 왕씨, 형과 누나가 처형되었다. 갓난 아이인 유병(劉病)은 투옥되었지만 병길(丙吉)에 의해 양육되어 은사에 의해 석방되어 민간에서 자랐다. 액정령(掖廷令)의 장하(張賀, 장안세(張安世)의 형)가 유병의 후견인이 되어, 장안세의 아들 장팽조(張彭祖)와 학우가 되어, 장안 교외의 상관리에 주거하였다.
기원전 74년 소제(昭帝)가 붕어하자, 창읍왕 유하(昌邑王 劉賀)가 즉위하지만 품행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곽광 등의 추천에 의해 상관황태후(上官皇太后)의 조를 받아, 양무후(陽武侯)에 봉작되었고 머지 않아 즉위하였다.
소제의 사망으로부터 창읍왕의 폐위를 거쳐 선제의 즉위에 이르는 일련의 움직임은 곽광이 주도한 것이어서, 정권은 계속되어 대사마 대장군 곽광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기원전 69년 곽광이 사망하자, 선제는 곽씨 일족의 권력을, 특히 군사의 지휘권을 서서히 박탈하여, 외척인 허씨(許氏) 등의 자제에게 주었다. 이것에 반발한 곽광의 유아가 반란을 계획하였고, 그것을 이유로 곽씨 일족은 처형되었다. 이 외, 반란 성공 후에 제위를 찬탈할 예정인 대사마 곽우(霍禹)는 요참형에 처했고, 황후 곽씨(곽광의 딸)도 폐위하여 유폐하였고, 곽광의 죽음으로부터 2년 후에 친정을 개시하였다.

정책[편집]

선제는 법가 주의적 정치 신조에 준거하여, 감세나 상평창을 설치하고, 국민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행정을 개혁하고, 범죄 예방을 위해 형벌을 강화하고, 국민의 경제력을 휴양하면서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도모하는 내정 중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무제 이후의 국내의 피폐한 경제를 완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것들은 민간에서 성장하여 민중의 실정을 아는 선제만이 가능한 시책이었다.
한편, 외교면에서는 오손과 제휴해 서역에 진출, 흉노를 약체화, 분열화해, 기원전 51년에는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를 항복시키는 등, 약체화되고 있던 한왕조의 국력을 부흥시키는 것에 노력했다. 이 외에 내외 정치에 있어서의 성과로부터, 선제는 한나라 중흥의 선조라고 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중서(中書)를 통한 직접적인 통치는 중서의 역할에 해당한 환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원인이 되어, 원제의 시대에는 환관과 외척이 제휴하여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상주의, 회고주의인 유교를 싫어하여, 유교에 심취하는 황태자(후의 원제)와는 뜻이 맞지 못하고 폐위도 생각했지만, 원제에게 후손이 태어난 것을 이유로 폐위을 보류했다.

가족 관계[편집]

  • 황후 : 공애황후 허씨(恭哀皇后 許氏)
  • 황후 : 폐후 곽씨(廢后 郭氏)
  • 황후 : 효선황후 왕씨(孝宣皇后 王氏)
  • 후궁 : 첩여 장씨(婕妤 張氏)
  • 후궁 : 첩여 위씨(婕妤 衛氏)
  • 후궁 : 첩여 공손씨(婕妤 公孫氏)
  • 후궁 : 첩여 융씨(婕妤 戎氏)
  • 후궁 : 첩여 화씨(婕妤 華氏)
    • 장녀 : 관도공주(館陶公主)
  • 후궁 : 미인 이씨
  • 후궁 : 미인 주씨
  • 후궁 : 미인 양씨(美人 梁氏)
  •  ?
    • 차녀 : 경무공주(敬武公主)
    • 3녀 : 양읍공주(陽邑公主)
  • 후궁 : 양인 황씨

연호[편집]

한 효소황제 유불릉(漢 孝昭皇帝 劉弗陵, 기원전 94년 ~ 기원전 74년)은 전한의 제8대 황제(재위 기원전 87년 ~ 기원전 74년)이다. 무제와 구익부인 소생이다.

즉위 과정[원본 편집]

기원전 87년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즉위전 여태자가 역모로 죽임당하고 장성한 아들 창읍애왕마저 병으로 죽자 장성한 다른 아들 연날왕 유단, 광릉여왕 유서가 있음에도 구익부인 조씨 소생의 어린 아들 불릉을 태자로 내정하였다. 한무제는 어린 아들에게 젊은 모(태후)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 하여 구익부인 조씨를 자결하게 하고 그의 인척들을 축출하였다. 그 뒤 곽광(霍光)·김일제(金日磾)를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정하였다.

가족관계[원본 편집]

연호[원본 편집]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