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내전
시리아 내전[76] 또는 시리아 위기 (아랍어: الأزمة السورية)[77][78][79]는 시리아에서 2011년 4월부터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를 축출하려는 반군과 정부군 사이에 현재 진행 중인 내전으로, 이 내전은 중동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의 연장선에 있다.
시리아는 1963년 쿠데타로 집권한 바트당을 기반으로 1970년에 정권을 잡은 하페즈 알아사드와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40년 넘게 부자 세습의 독재정치를 이어왔는데, 독재 체제 타파를 원하는 시리아 시민들이 2011년 3월 15일부터 시리아의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와 바트당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알아사드가 군대를 동원해 이 시위를 유혈 진압함으로써 내전으로 번졌다.
또한, 이 내전은 시리아 내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 등 이슬람교 시아파(13%) 집권 세력과 다수 종파인 이슬람교 수니파(74%) 간 종교 전쟁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알아사드 정부는 오랜 우방인 러시아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이, 반군은 알아사드 정부에 적대적인 미국 등 서방 국가와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원하는 대리 전쟁의 성격까지 띠고 있으며, 이라크에서 등장한 수니파 무장단체인 IS가 내전의 와중에 시리아 동부를 점령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80]
배경[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시리아의 현대사입니다.
아사드 정부[편집]
아사드 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리아는 1946년 독립 공화국이 되었지만, 1949년 3월 쿠데타로 민주 정부가 붕괴되었으며 같은 해에는 2번의 쿠데타가 더 잇따랐다.[81][82] 1954년에는 군정에 대항해 봉기가 일어나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민간정부로 이양된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는 아랍 연합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시리아의 집중화된 권력 체계가 이집트와 통합되었다.[83] 1963년에는 아랍사회주의 바트당 시리아 지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84] 1966년에 한차례 또 쿠데타가 발생하여 구 당권파인 마이클 아플라크와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의 정부가 붕괴되었다.[85] 여기에, 시리아 국방부 장관인 하페즈 알아사드는 1970년 11월 수정 운동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고 시리아의 총리가 되었다. 1971년 3월에는 스스로 시리아의 대통령임을 선포했고, 2000년 사망할 때까지 시리아를 세속주의로 통치하며 사실상의 일당제 체제의 지배적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82년 시리아 내에서 일어난 6년 간에 걸친 이슬람 봉기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수니파 공동체의 이슬람주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하마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지휘하였다.[86] 이는 하마 대학살로 불리며, 이 대학살로 인해 만 명에서 8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포함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87][88][89][90][91][92] 시리아 국민은 오직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뽑을 수 있었으며, 2012년 시리아 총선이 열리기 전까지는 입법부에 다당제 선거를 할 수 없었다.[93][94]
하페즈 알아사드의 후계자 문제는 1998년 시리아 인민 의회 선거 이후 폭력적인 시위와 무력 충돌을 일으키며 1999년 라타키아 시위로 발전하였다.[95] 이 사건은 하페즈 알아사드와 그의 동생 리파트 알아사드 사이에 몇 년 간 축적된 불화가 폭발한 사건이었다.[95] 시리아 경찰은 라타키아의 리파트 항만 시설에 대한 단속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 리파트 알아사드 지지자들과의 총격전이 벌어져 2명이 살해되었다. 정부 측은 부정하고 있으나, 이 사건의 사상자가 수백명에 달했다는 추측이 있다.[96] 하페즈 알아사드는 간질성 폐질환으로 1년 뒤 사망했으며, 하페즈 알아사드의 아들인 바샤르 알아사드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이 규정인 40세를 당시 그의 나이인 34세로 인하하도록 헌법을 수정한 후, 후계자가 되었다.[94][97][87] 그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아사드를 이어 대통령이 된 바샤르 알아사드와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수니파 무슬림인 그의 아내 아스마 알아사드는[98] 초기에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국가를 개혁하겠다는 희망을 시리아에 불어넣었다. 이 영향으로 2000년 7월부터 2001년 8월 사이 다마스쿠스의 봄이라는 강렬한 사회적, 정치적 논쟁이 시작된다.[99] 이 기간에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살롱과 같은 다수의 정치 포럼이 만들어지고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이 때 리아드 세이프, 하이트함 알말레흐, 카말 알라브와니, 리야드 알투르크, 아레프 달리아와 같은 다양한 정치운동가가 이 운동을 이끌었다.[100] 이 당시 가장 유명했던 포럼으로는 리아드 세이프 포럼, 자말 알아타시 포럼이 있다. 다마스쿠스의 봄은 2001년 8월 민주 선거를 요구하고 시민 불복종 운동을 지휘했던 운동가 10명이 체포되면서 끝나게 되었다.[95]2001년 이후 의회 내 개혁론자들은 전 대통령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의 통치 이후 이어진 경제 침체에 대해 비판했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개혁에 대해 말은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거의 진행하고 있지 않으며, 2000년대 약속했던 개혁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101]
인권[편집]
시리아의 인권 (Human rights in Syria) 은 국제 기구에서 심한 비난을 받고 있다.[102] 1963년 이후, 국가 비상 사태 선언의 지속되는 효력으로 치안 부대에 체포와 투옥의 권한이 있다.[103] 이 나라는 자유 선거가 없는 일당 독재 상태로 통치되고 있다.[103] 당국은 인권 운동가와 정부 비판자들을 탄압, 투옥하고 [104], 표현, 결사, 집회의 자유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으며 [103][104], 여성과 소수 민족 차별에도 직면하고 있다.[103][104] 2010년 휴먼 라이츠 워치의 주장에 따르면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력을 쥐고부터 10년 간 시리아의 인권 상태를 개선시키는 데 실패했으며 [105], 시리아의 인권 상황이 세계 최악의 부류에 속한다고 진술하였다. 5월 5일, BBC 뉴스는 비무장 민간인에 저격수와 대공 기관총이 사용되고 있다는 다마스쿠스 인권 연구소 (DCHRS) 의 입장을 알렸다.[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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