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민주통일당을 탈당하였다.[34] 1975년 8월 17일을 며칠 앞두고 30년 넘게 보관해 온 중경(충칭)임시정부의 태극기를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는가 하면, 아내와 갑자기 천주교식 혼례의식을 치르고, 백범 묘소와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뭔가 중대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신변 정리를 서둘렀다는 얘기다.[81]
장준하는 1975년 들어 평소 잘 만나지 않던 김대중과 만나고, 함석헌·홍남순과 접촉하며 8월 15일, 광복절 30주년을 맞아 모종의 거사를 계획했다. 마침 김영삼이 동남아 여행중이라 그가 귀국한 뒤인 8월 20일으로 계획은 연기되었다.[82]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이 당시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일’이 계획되고 있었으며, 장준하가 “박정희를 깨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한다. 군부 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증언한다.[83][84] 또한 1976년 4월에 자신이 테러를 당했을 때 주한 미 대사 하비브가 찾아와 “당신 아버지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 이뤄질 터이니 몸조심하고 기다려라”고 했다고 한다.[85]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장준하는 재야와 야당 전체를 아우르고 군부 일부가 동조하는 어떤 거사를 계획중이었으며, 여러가지 증언으로 미루어 8월 20일경으로 예정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86] 또한 장준하는 국회의원 재직 시절 사적인 인연이 있던 김재규와 만났는데,[주 4] 당시 2군단장이던 김재규는 장준하의 국방에서 의정활동과 청렴상에 감동하여 장준하의 죽음 이후 박선호를 시켜 가족들을 돌봐주었다.[87][88] 1976년 말, 김재규는 장호권을 남산으로 불러 “부친의 사망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해주고, 10·26 3개월 전에는 미국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미국행을 권유했다.[83][89] 2005년 1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호권은 장준하의 계획에 포함되었던 군내 동조 세력이 김재규 등이며, 10·26도 장준하의 영향을 입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90]
최후
박정희정권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던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거사와 관련해 당시 비밀리에 김대중 등 다른 야당 인사들과의 연락을 돕고 있던 자신의 측근 임춘원을 집으로 초대해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임춘원은 1960년대 서울 종로에서 상아탑학원을 설립해 운영하며 큰 재산을 모은 재력가로 장준하의 사상계 출판을 남몰래 재정적으로 도와주다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아 고초를 겪고 장준하의 측근이 된 인물이었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장준하는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말과 임시정부 태극기 등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말을 하였고, 며칠전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산소에 다녀왔다며 벌초로 갈라진 자신의 손바닥을 펴보이며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벌초로 생긴 이 손바닥의 상처는 나중에 경찰에 의해 장준하가 산에서 추락하는 도중 소나무 가지를 붙잡아 생긴 것이라며 그의 추락사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왜곡되어 발표되었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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