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전한 경제 오초칠국의 난

전한 경제 오초칠국의 난


한 효경황제 유계(漢 孝景皇帝 劉啓,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41년)는 전한의 제6대 황제로, 문제(文帝)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효문황후(孝文皇后)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한 왕조의 기반을 다지고 선정을 행하여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불리는 성세를 닦았다.
또한 후한 왕조의 창시자인 광무제와 삼국 시대의 의 창시자 유비는 경제의 먼 후손을 칭했다.

생애[편집]

치세 초기까지[편집]

사기》 외척세가(外戚世家)에 따르면 경제는 문제의 제5황자로 태어났는데, 형 네 사람이 모두 문제가 대나라 왕으로 있을 때에 일찍 사망하고 기원전 180년 아버지가 황제에 올라 생모 두씨가 문제의 정실로 승격되면서 문제의 적자(嫡子)가 되었다. 유학을 배우면서도 한편으로 어머니 두씨로부터 도교를 배웠다. 황태자 시절 오왕(吳王) (濞)의 세자 현(賢)과 바둑을 두다가 자신이 지게 되자 한 수 물러달라고 했다가 세자가 거절하자, 홧김에 바둑판을 집어던져 그를 죽여버리고 말았는데, 이 문제로 한의 중앙 정부와 오왕의 관계가 냉랭해졌으나 문제의 정치적 배려로 사태는 겨우 수습되었으며, 훗날 오초칠국의 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157년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경제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아버지 문제의 정치를 이어받아 소극적인 외교정책과 검약에 힘쓴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농 정책을 펼치고 세금을 줄이는 등 사회 안정을 실현시켰다(당시 기록에 따르면 한조의 인구 90%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경제의 치세를 문제의 치세와 함께 「문경지치」로 칭송하기도 한다.

오초칠국의 난[편집]

경제의 치세에, 한의 황족 ・ 종족(宗族)으로서 봉해진 유씨의 제후왕(諸侯王)이 그 영내의 징세와 관리 임명권 등을 장악하여 그들의 분국(分國)은 거의 반(半) 독립국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조정은 단지 제후국의 승상(丞相)만을 임명할 뿐이었다. 문제 때부터 그들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기 시작했지만 대응은 소극적인 데에 그쳤고(문제 자신부터가 제후왕 출신으로서 황제가 되었다) 근본적인 대책은 미루어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아버지 문제의 방침을 이어받으면서도 분국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사대부 조조(晁錯)의 헌책을 받아들여 제후왕의 권력을 줄이는데 착수했고, 제후왕의 사소한 과실을 이유로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에 반발한 제후왕이 몰래 연계, 기원전 154년 오왕 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오초칠국의 난).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했으나, 주아부(周亞夫)의 활약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뒤 경제는 제후국의 승상을 폐지하는 대신 상(相, 제후상諸侯相)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고, 제후왕에게는 현지에서 징수되는 세만을 받았다. 당초 계획했던 제후왕의 권력 삭감에 성공한 것이다.

중앙집권 강화[편집]

오초칠국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주아부는 이후 황태자 책봉을 둘러싼 갈등으로 승상에서 해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의 측근이 승상으로 임명되었다. 전한 최초로 황제의 측근이 승상으로 임명된 것은 종래 황제의 정책에도 제약을 가할 권력이 주어졌던 원훈(元勳)들과 그 일족에서만 임명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던 승상의 권력이 이때에 와서 크게 저하하고, 반대로 황제의 군력은 비약적으로 강화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정치 대응력과는 반대로 내세와 불로불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경제의 능묘에서 발굴된 호화로운 부장품은 한조의 공식기록에 나오는 「질소검약(質素檢約)」과는 대치되는 것으로, 사망자에 대한 경제적 지출이 허용되었던 사치스러운 시대였음을 방증한다.
경제에게는 박황후가 난 적자가 없었다. 이에 태후 두씨는 경제의 아우인 양왕 무를 다음 황제로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경제는 거절하였다. 기원전 151년, 조모인 태황태후 박씨가 죽자, 경제는 황후 박씨를 「황실을 번성치 못한 죄」로 폐하고, 다음 황후로 가장 총애받던 후궁 율씨(栗氏)가 아닌 다른 후궁 왕씨를 황후로 간택하고 그녀의 소생인 철을 황태자로 삼았다.
재위 15년 째인 기원전 141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가족관계[편집]

  • 부 : 한 문제 유항(漢文帝 劉恆)
  • 모 : 효문황후 두씨(孝文皇后 竇氏)
  • 황후 : 폐후 박씨(廢后 薄氏 ?~前147), 한 문제의 어머니 박태후의 친척으로 박태후 사후에 폐출됨.
  • 황후 :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 名: 왕지(王志)
    • 장녀 양신장공주(陽信長公主 ?~?) - 평양공주(平陽公主)
    • 차녀 남궁공주(南宮公主 ?~?)
    • 3녀 융려공주(隆慮公主 ?~?)
    • 11남 무제 유철(武帝 徹 前156~前87)
  • 후궁 : 율희(栗姬 ?~?), 제나라 사람
  • 후궁 : 정희(程姬 ?~?)
  • 후궁 : 가부인(賈夫人 ?~?)
  • 후궁 : 당희(唐姬 ?~?), 당아는 본디 정희의 시녀였다. 경제가 찾아온 날, 정희는 월경이 있어서 경제를 모실 수 없었고, 따라서 시녀인 당아를 들였는데, 그로 인해 유발을 낳았다.
  • 후궁 : 왕부인(王夫人 ?~?), 왕황후의 여동생

오초칠국의 난
오왕은 영내의 장군(鄣郡)[1]에 구리 광산이 있어 망명객을 불러모아 불법으로 을 주조하고, 나라 동쪽에 면한 황해의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부세를 걷지 않아도 나라는 풍족했다.[2]
문제 때에 오나라 태자 유현이 입조해 황태자(경제)와 육박(六博)을 했는데, 서로 다투다 황태자가 육박 판을 던져 유현을 죽이고 말았다. 한나라에서는 유현의 시체를 오나라로 보내 장사지내게 했는데, 오왕은 장안에서 장사지내지 않은 것에 노해 원망을 품고 입조하지 않았다.

삭번과 반발[편집]

경제는 태자 시절부터 총애한 조조를 어사대부로 삼았고, 조조는 제후왕의 죄를 물어 지군(제후국 관할의 군 중 서울을 관할하지 않는 지역)을 덜어내도록 청을 올렸다. 경제는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했는데, 두영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조는 30가지 법령을 바꾸어 제후국들을 소란하게 했다.[3] 조조는 경제에게 올린 청에서 오왕의 반란은 이미 기정사실로 여기고 왕국령을 덜어내면 반란이 일찍 일어나겠지만 피해가 적을 것이라고 했다.[4] 경제와 조조는 세 나라 왕의 죄를 추궁해 그들의 군을 덜어냈다.
  • 조왕 유수, 경제 2년 = 조왕 수 26년(기원전 155년) 죄를 지어 상산군을 덜어냄[5][6]
  • 초왕 유무, 경제 3년 = 초왕 무 20년(기원전 154년) 효문태후의 상중에 간음했으므로 동해군 혹은 동해군과 설군을 덜어냄[7][8]
  • 교서왕 유앙, 작위를 팔고 간음했으므로 여섯 현을 덜어냄(교서국은 교서군 1군만 있는 제후국이라 군을 삭감하는 것은 곧 폐번임)[9]
조정에서는 경제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는 오나라 지군도 덜어낼 의논을 했고, 오왕은 선수를 쳐 반란을 일으키고자 해 중대부 응고(應高)를 교서왕에게 보내 설득했다. 교서왕은 반란에 가담할 것을 약속하고, 이웃의 제·치천·교동·제남에도 사신을 보내 반란에 함께할 것을 약속받았다.[10]

반란 발발[편집]

마침내 오나라의 회계·장 두 군을 덜어낸다는 조서가 내려오자 반란은 실현됐다. 다음 일곱 나라의 왕들은 한나라에서 임명한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죽이고 반란에 참여했다.[11]
봉국을 삭감당한 오·교서·초·조 네 나라가 모두 참여했으며, 교서왕이 꾀어들인 교동·치천·제·제남 중 제나라를 제외한 세 나라의 왕도 참여했다. 조나라에서는 승상 건덕(建德)과 내사 왕한(王悍)이 반대해 조왕이 이들을 살라 죽였다.[12] 초나라에서는 승상 장상과 태부 조이오가 반대해 초왕이 이들을 죽였다.[13] 반란에 가담하려 했으나 철회한 왕들도 있었다.
제효왕은 반란에 가담하려 한 것을 후회했다. 제북왕은 낭중령에게 겁박당해 출병하지 못했다.[14] 오왕은 이웃한 회남의 세 왕(회남왕, 형산왕여강왕)에게 모두 반란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고, 회남왕은 반란에 가담하려 했으나 승상이 군권을 받아서는 왕을 배반하고 조정 편을 들었다.[15] 한편 반란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거나 아무런 의사도 보이지 않은 왕들도 있었다.
  • 형산왕(후의 제북정왕) 유발
  • 여강왕(후의 형산왕) 유사
  • 연강왕 유가
형산왕은 오왕의 권유에 불응하고 굳게 한나라 편에 섰다. 여강왕은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민월·동월과 사자를 주고받으며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다.[16] 연강왕은 오왕이 제후들에게 발포한 글의 서두에서는 가담 권유를 받는 왕들 중에 언급되지 않으나 중간에 조나라 왕과 함께 반란군 편에서 행동하도록 나오는데,[17] 이외에는 반란군 편에서나 진압군 측에서나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왕은 당시 자신의 나이인 62세 미만, 자기 막내아들의 나이인 14세 이상 사람을 모두 징모하도록 명령을 내려 20여만 명을 준비했다.[18] 또 민월·동월(동구)에 사신을 보내 동조를 꾀했고, 동월은 참여했으나 민월은 참여했다는 기록과 참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함께 있다.[19][20]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정월 갑자일, 오왕은 오나라의 서울 광릉에서 출발해 화이허를 건너, 초왕과 군사를 합치고 제후왕들에게 돌리는 글을 써 교서왕·교동왕·치천왕·제남왕·조왕·초왕·회남왕·형산왕·여강왕·옛 장사왕의 아들에게 반란군에 참여해 함께 작전을 펼치자고 알렸다.[21] 조왕 유수는 흉노와 손을 잡고 군사를 함께하도록 밀약을 맺었다.[22][23]

조정 편의 왕[편집]

성양공왕은 여씨를 주멸한 성양경왕의 아들로 반란군측에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조정에 충실한 번왕으로 취급하고 가담을 권유하지 않았다. 나머지 왕들은 모두 문제의 아들과 손자들로 반란군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책봉된 이유 자체가 오나라와 초나라를 막기 위함인 양효왕은 실제로 오나라와 초나라의 침입을 받아 악전고투 끝에 나라를 지켜내고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다.[24] 이외에 여남왕은 황제에게 상주해 장군인을 받아 오나라를 친히 공격했고,[25] 하간나라에서는 승상 위관을 보내 반란 진압에 참여하도록 했다.[26]

경제의 대처[편집]

경제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대사면을 행하고, 주아부를 태위로 삼고, 종실과 외척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판단한 두영이 얼마 전에 종고모 두태후와 불화해 관직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두영을 강권해 대장군으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27][28] 두영은 출진하기 전에 난포와 옛 오나라 재상 원앙 등 재야의 인물들을 천거했다.[29] 주아부는 오나라·초나라 방면을 맡았고, 역기는 조나라를 치러 출진했고, 난포는 조나라를 치러 출진했으며, 두영은 형양에 주둔하면서 조나라와 제나라 방면의 군사를 감독했다.[30]
한편 조조는 원앙이 오왕의 모반을 뇌물을 받고 숨겼다고 탄핵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고,[31] 원앙은 이 소식을 듣고 두영을 통해 경제를 만났다.[32] 경제는 군사를 낼 일에 대해 조조와 상의했고, 조조는 경제가 친히 출정하면 자신이 조정을 지키고 있겠다고 했다. 마침 원앙은 이때에 경제를 만났다. 경제가 원앙에게 옛 오나라 승상으로서 오나라의 상황과 반란 진압 가능성, 오나라가 돈과 소금을 만들어 호걸들을 불러모으는 것에 대해 물어보자 오나라에서 돈으로 사는 사람들은 간사한 사람들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고 조조도 동의했다. 경제가 원앙에게 다른 계책이 없는지 물어보자, 조조와 주변 사람들을 다 물리도록 하고 반란군이 조조를 제거할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니 조조를 죽여서 반란군에 사죄하면 누그러트릴 수 있다고 했다.[33] 경제는 조조를 죽여 반란군에 사죄하고, 원앙을 태상으로 삼고 오왕의 조카 덕경후(德景侯) 유통(劉通)을 종정으로 삼아 오왕을 찾아가게 했다. 이때 오나라와 초나라는 양나라의 극벽을 공격하고 있었다. 먼저 친족인 덕경후가 오왕을 만나 회유하고 조서를 주었는데, 오왕은 원앙이 온 것을 알고 “내가 이미 동쪽의 황제인데 누구에게 절하겠느냐?” 하며 원앙을 만나지 않고 억류하고 자신의 장수가 되도록 겁박했다. 원앙이 거절하자 오왕은 원앙을 죽이려 했고, 원앙은 오나라 군중의 사마가 예전에 원앙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어서 그 도움을 받아 탈출해 양나라로 가서 귀환했다.[34][35][36]

오·초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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