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4일 월요일

묘청의 서경천도 잘못과 피부이식수술 무리 화상자국침치료

묘청의 서경천도 잘못과 피부이식수술 무리 화상자국침치료


묘청(妙淸, ? ~ 1135)은 고려 중기의 승려, 문신이다. 속성(俗姓)과 가계, 출가 도량 등은 전하지 않는다. 1126년 서경파 관료들의 추천으로 인종의 왕사가 되었다. 그는 서경 천도론을 주장했으나 개경파 귀족인 김부식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135년 칭제건원을 하고 대위국을 수립하였으나 1년만에 진압되었다. 금나라 정벌론과 서경 천도론을 내세웠으나 모두 무산되었고, 평양성의 궁궐 축성과 성곽 개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경파에 밀려서 천도론은 무산된다.
1135(인종 13) 묘청은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병부상서 유담·사재소경(司宰小卿) 조창언(趙昌言안중영(安仲榮) 등과 함께 서경에서 거병한 뒤 군사를 보내어 절령(岊嶺) 길을 차단하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호(軍號)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고, 곧장 개경으로 진군하겠다고 밝힌다. 윤언이, 정지상 등과 함께 서경파의 지도자였다. 일명 정심(淨心)이라 불렸다. 서경 출신.
묘청은 현재의 평양인 서경에서 출생했다. 그의 출생과 속성, 출가한 사찰 등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평양 출신으로 어려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불교 교리 외에도 도교의 비의에도 능통했는데, 1126(인종 4)에 백수한(白壽翰)이 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 서경에 파견되자 묘청을 스승이라 하고, 두 사람은 음양비술(陰陽秘術)을 사용하면서 백성들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또한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칭제건원, 즉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부르고 연호도 중국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 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36방의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
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묘청이었다.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
묘청은 개경이 이미 업운이 쇠진하여 궁궐이 다 탄 것이라며 왕기가 서려 있는 서경으로 국도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서경천도론이 현실화될 경우 자신들이 조정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치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인종에게 묘청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린다.
묘청은 성인이며, 그의 제자 백수한도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국가의 대소사를 소상히 자문한 후에 정사를 처리한다면 반드시 국가의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지상,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등은 대신들에게 이 문건을 돌려 연판 서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 승선 이지저 등을 제외한 중신들의 동의를 얻었다. 상소문이 제출된 후 인종은 묘청을 입궐토록 했다.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힘을 길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금(1115)이라 한 다음 고려에게 형제관계를 맺자면서 스스로 형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묘청은 이를 두고 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금나라의 국서를 내칠 것을 주장했다.
여진족은 본래 압록강 연안 및 연해주 일대에 살면서 늘 고려에게 복속해오던 민족이다. 고려의 관료들은 이같은 민족적 치욕을 당하면서도 소극적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묘청은 서경 천도와 아울러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했다. 묘청 이외에도 윤언이, 정지상, 백수한 등이 칭제건원과 북벌에 적극 동조했다.
묘청은 인종에게 금나라의 오만한 요구를 들어주지 말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키려 하느냐며 개경 귀족들의 비난을 받게 된다.
11292월 궁궐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종은 서경으로 행차하여 낙성식을 가졌다. 그때 묘청을 비롯한 서경세력은 표문을 올려 칭제건원(稱帝建元, 왕을 제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함)할 것을 권고하고, 주변국과 협공하여 금나라를 치자고 하였다. 그러나 중신들이 반대하여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화궁 축성 후 인종은 한동안 서경에 머물렀다. 그런데 11302월 서경 중흥사 탑이 화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두고 대신들이 서경에 궁궐을 지으면 재난이 사라진다는 묘청의 말이 거짓임이 판명되었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묘청은 이에 개의치 않고 대화궁 주변에 성을 쌓을 것을 주청하여 임원궁성을 건설하고, 궁성 내에 문수보살을 비롯한 여덟 보살을 안치시킨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했다. 1131(인종 9)에는 인종을 설복시켜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여 보살·석가·부동(不動) 8개의 상()을 그려서 안치시켰다. 이듬해 1132년 왕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있던 개경의 궁궐을 영수(營修)함에 있어 묘청과 그 일파들에게 궁터를 보게 하니, 묘청은 서경 천도를 목적으로 개경의 궁터가 서경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공사는 중지되고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김부식·이지저(李之底) 등 사대적(事大的)인 개경의 귀족이 반대하여 중지되었다.
대화궁 건설 후 잇따라 계속된 재화 때문에 묘청의 입지는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1134년 말 이에 따라 묘청을 위시한 서경 세력은 극약처방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정하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행차할 것[7]을 건의한다. 하지만 인종이 간관들의 반대에 부딪혀 서경 행차를 거부하자 113514일 그들은 군사를 일으켜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거병은 누가 처음 계획했는지 불확실하다.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과 병부상서 유참, 사재감소경 조창언 등과 결탁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으며 자신들의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묘청을 왕으로 옹립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묘청의 반란은 왕을 교체하기 위한 역모가 아니라 개경세력을 제거하고 인종으로 하여금 서경천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종은 여전히 묘청을 신임하고 있었고, 그 덕택에 서경세력의 입지는 이자겸의 난 이전보다는 훨씬 강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거병을 일으켰고 결국 개경파로부터 역모로 공격당하면서 입지는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묘청은 조광을 비롯한 서경의 문무대신들과 대화궁의 관풍전에서 전략을 짜고 몇 개의 조로 군사를 나누어 곧바로 개경을 공격하는 기습전을 펼치려 하였다. 하지만 이때까지 개경에서는 서경의 반란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다만 서경측은 인편으로 백수한에게 묘청이 군대를 일으켰으며, 곧 개경의 역적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뿐이었다. 백수한의 이 편지를 받고 그 내용을 인종에게 보고했다. 개경파 대신들은 묘청을 역적으로 몰고 그가 반란의 총지휘군이라 하였다.
서경의 반란 소식이 사실임을 확인한 인종은 백관을 소집하고 회의 끝에 반란군을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김부식을 원수로 임명하고 내시 유경심, 조진약, 황문상을 서경으로 급파하여 군사행동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 김부식의 대군이 출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란군 진영에서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경군이 안북대도호부(안주)에 도착하면서 반란군 지역에 있던 많은 성들이 개경군에 호응하는 바람에 전세는 점차 대위국에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김부식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반란군을 이끌던 장군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이때 김부식을 원수로 하는 토벌군이 쳐들어오고 김부식이 그를 살해하였다. 대위국은 1년여를 더 버티다 고려군에게 패망하여 그 자취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서경성을 난입한 고려 병사에 의해 다시 부관참시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미상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이 사건에 대하여 '일천년래 대사건(一千年來 大事件)'이라고 하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크게 평가하였다. 그는 묘청과 그의 운동이 이후 사대와 주체의 기로에서 주체를 지향했다는 쪽의 평을 내렸으며, 대위국이 김부식 등의 도당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것에 대하여 매우 비통해 하는 방향의 견해를 나타내었다.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운동을 낭불양가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한 바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묘청의 의견대로 서경으로 옮겨 금나라를 공격했으면 고려가 멸망했을 것이다. 금나라는 송나라를 무력으로 위협해 폐백까지 받았던 요나라를 제압하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내 남송을 세워 거의 송나라는 금나라에 찍소리도 못했다. 만약 금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면 결국 고려가 멸망했을 것이다. 물론 정도전이나 최영이 추진했던 금명 교체기의 요동정벌설은 일리가 있다고 본다.
수도를 옮기는 천도만 한다고 모든 36개 나라가 조공을 바친다고 하는 말은 되지 않는다. 피부 이식수술도 마찬가지이다. 화상흉터등에 엉덩이나 허벅지등 자기 피부의 공여를 이식받아 시술을 하면 오히려 흉터가 2배로 늘고, 착색이 생기며, 화상흉터 부분 가장자리가 너덜해지는등 오히려 옮기면 더 나빠진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차라리 화상흉터에는 옮기는 피부이식보다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진피 콜라겐을 자극 재생해 효과를 보게 함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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