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비단길

비단길


비단길(緋緞路) 또는 실크로드(Silk Road)는 육상, 또는 해상을 통한 근대 이전의 동서 교역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동(東), 서(西)라 함은 중국과 유럽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1] 이는 비단길이라는 언어의 기원 자체가 중국의 비단이 로마 제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2] 하지만 비단길은 역사를 통해서 더 다양한 교역품들을 전달하는 통로로 확대되었고, 더 나아가 문화가 유통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중국 역사학교류사, 그리고 중앙아시아사에서 비단길 연구가 가지는 입지는 크다.[3]
비단길은 단순히 동서를 잇는 횡단축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남북의 여러 통로를 포함해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 하나의 거대한 교통망으로 보아야 하며, 이에 따라서 비단길의 개념 또한 확대되게 된다. 비단길은 3대 간선과 5대 지선을 비롯해 수만 갈래의 길로 구성되어 있는 범세계적인 그물 모양의 교통로이다.

비단길의 역사적 전개[편집]

1세기경의 비단길

3대 간선[편집]

서양과 동양을 횡으로 연결하는 길로 세개의 간선이 있다.

초원길[편집]

중국 한나라 이전의 문명 교류의 주통로로 사용되었던 길이며,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이다. 서쪽의 끝인 카스피해 연안 혹은 발트해 남단으로부터 흑해의 동북편과 남러시아의 카스피해와 아랄해 연안을 지나 카자흐스탄과 알타이 산맥 이남의 준가리아 분지를 지나 몽골 고비 사막의 북단 오르혼 강 연안으로 이어진다. 이후 동남향으로 바꾸어 중국의 화북지방에 이르러 그 동쪽 끝에 이른다. 그러나 이길을 연장하여 한반도까지 연결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일찍이 문명 교류의 처음을 연 비너스상이 1만 년 전에 이 초원로를 따라 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동서로 널리 전파된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4천~3천년경에는 채도 문화가 이길을 거쳐 서아시아에서 중국 및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길을 '채도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청동기나 로마의 유리도 이길을 따라 전파되었다.
일본 사학계의 기마민족설에서 말하는 고분문화기(3세기~5세기)의 기마문화도 초원로를 통하여 전달되었다고 여겨진다.

오아시스길[편집]

오아시스길이란 중앙아시아의 건조지대(사막)과 반사막에 점재하는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동서로 뻗은 길을 일컫는다. 사막을 비롯한 건조 지대의 군데군데에 항상 물이 고여 있어 수목이 자라고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오아시스다. 오아시스는 사막인들의 생활의 보금자리일 뿐만 아니라, 교역의 중심지로서 거기에서 문물이 집산되고 교통이 발달되어 왔다.
비단길 중에서 가장 심장부에 위치한 오아시스길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시대 전에는 초원로가 많이 이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오아시스길이 동서교류의 주요 통로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6세기부터 서아시아 지대에는 이미 상당히 발단된 교통로가 만들어졌으나, 파미르 고원이 장애가 되어 완성되고 있지 못하다가 기원전 138~126년 전한의 장건(張騫,~BC 114)이 파미르 고원을 지나 대월지에 이르는 길을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길이 만들어졌다.
한서 서역전에는 남, 북 두 길의 노정을 밝히고 그 길위에 있는 주요 국가들의 중심지와 장안이나 서역도호부, 그리고 인근 국가들 간의 방위와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바닷길[편집]

기원후 후한은 서아시아와의 교류에 관심을 나타냈고, 전성기에 접어든 로마제국이 남해로를 통한 도서 교역에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로마의 시장에는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각지의 명산물이 큰 인기를 끌었다. 1세기 중엽에 로마의 항해사였던 히파루스(Hipalus)가 아라비아인들로부터 인도양 계절풍의 비밀을 알아낸 후, 아테네로부터 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향하는 직항로를 개척함으로써 로마의 동방 원거리 무역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비로소 중국에서 인도로 반출된 비단이 인도 서해안으로부터 해로로 로마에 운송되기 시작하였다. 3세기 중엽에는 로마의 배가 인도차이나나 광동성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카티가라(Kattigara)까지 항해하는 상선도 나타났다.

5대 지선[편집]

남북을 연결하는 길로 지선이라 부르고 있지만 문명 교류와 교역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그 노선 또한 대단히 복잡하다. 중세에 있어서의 남북로는 다음과 같은 5개로 나눌 수 있다.

마역로[편집]

남북로의 맨 동쪽에 있는 길로 초원로의 동쪽 끝인 막북의 오르혼 강 유역에서 카라코룸을 지나 장안이나 유주와 연결된다. 여기에서 다시 화남을 그대로 뻗어 항주나 광주에 닿아서 바닷길과 접한다. 북방 유목민족과 한(漢)민족 간의 동아시아 쟁탈을 위한 싸움길이였다.

라마로[편집]

북쪽 끝은 준가리아(Dzungaria) 분지에서 시작해서 고창 서부부 투르판(Turfan)과 타림 분지 동편에 있는 자루기루꾸(러잔)를 지나 티베트의 라사를 거쳐 히말라야 산록을 따라 북인도의 시킴에 이른 후 다시 남하해 인도 갠지스 강 어구에 있는 디무라리프데까지 이어진다. 이길은 기원후 5세기부터 토욕혼에 의해 이용되다가 7~9세기부터는 티베트이 이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당과 티베트간의 화친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당의 사신이나 구법승들이 이길을 따라 인도에 내왕하였다. 준가리아 분지에서 통일제국을 이룩한 타타르가 이 길을 따라 티베트와 중국 서북 지방을 공략하기도 하였다.
이 길을 따라 티베트에서 발생한 라마교가 북상하여 멀리 몽골에까지 전파되었다.

불타로[편집]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출발하여 타슈켄트와 사마르칸드를 거쳐 동서남북 십자로상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발흐(Balkh)와 페샤와르(Peshawar, 즉 Gandhara)를 지나 인더스 강 유역을 따라 중인도 서해안의 바루가자(현재 Surat)까지 줄곧 남하하는 길이다. 이 길은 동서남북 교통로의 중심 교차점에 자리하고 있어 동서문명교류와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기원전 2000년에 아리안인들을 비롯해 후세의 알렉산더나 티무르 등의 외래 민족의 대인도 침략이 이 길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불교는 이 길을 따라 북상한 다음 중앙 아시아를 거쳐 동방에 전파되었으며, 법현, 현장 같은 많은 수법승이 이 길로 천축(인도)에가서 수도하였다.

메소포타미아로[편집]

흑해와 카스피 해 중간지대에 있는 카프카즈(Kavkaz 일명 Caucasus) 북부를 기점으로 하여 트빌리시(Tbilishi)와 타브리즈(Tabriz)를 경유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따라 펼쳐진 메소포타미아를 관통한 후 페르시아 만의 바스라(Bastah) 항까지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개화한 지대를 지나는 이 길은 고대 문명 전파에 크게 기여하였다.

호박로[편집]

북방의 발트 해에서 시작해 모스크바와 키예프를 거쳐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접지인 콘스탄티노플과 에페수스(에베소, Ephesus)를 지나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남하하는 길이다.
이 길은 페니키아 시대부터 중요한 호박의 무역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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