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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3일 일요일

흉터의 다양성과 서양의학과 한의학적인 흉터 치료 목적의 차이점

흉터의 다양성과 서양의학과 한의학적인 흉터 치료 목적의 차이점














흉터는 윤곽, 긴장도, 색깔, 질감, 유형, 방향, 크기 그리고 주위 피부와의 조화 정도에 의해 구분된다. 흉터는 임상적으로 위치, 피부이완성에 대한 방향, 높이(융기, 함몰, 위축), 발달정도(성숙, 비대, 켈로이드), 색깔(저색소성, 과색소성), 질감, 오양(선상, 위성 모양), 길이, 폭등에 따라 구분한다.







조직학적으로 피부 흉터는 피부의 외상, 수술 또는 염증성 손상에 대한 국소적 반응으로 형성되는 섬유성 조직이다. 흉터 조직의 생성, 분해, 성숙은 특이한 생화학적 변화와 연관이 되어 있고 긴장도 유전, 나이에 영향을 받는다.







서양의학적인 흉터 성형술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가능하다면 모발이 있는 부위에서 절개를 한다.







-서양적인 흉터 치료는 치료 자체가 흉터를 남기기 때문에 한의학적인 침 치료의 흉터는 모발이나 피부 모두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에 어느 부위라도 가능하다. 또 서양의학적인 수술은 절개후 흉터를 남기지만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치료는 절개후 흉터가 없다.







2 피부 이완선과 해부학적 또는 미용학적 접합부를 따라 흉터의 방향을 개선시킨다.







-이미지한의원의 흉터 치료는 침으로 비침습적인 치료이기 때문에 방향과 관련이 없이 치료가 잘 된다.







3 해부학적인 경계의 비뚤어짐을 없애기 위해 장력의 방향을 바꾼다.







-이미지한의원의 흉터 치료는 콜라겐을 자극하여 재생시키며 오히려 콜라겐의 탄력과 장력을 배가시킨다.







4 특별한 방향으로 탄력성을 높이거나 추가시킨다.







-이미지한의원의 흉터 치료는 모든 방향으로 시술이 가능하다.







5 튀어나온 것과 처진 것을 제거한다.







-이미지한의원의 흉터 치료는 튀어나온 것은 침으로 깍으며 처지고 꺼진 것은 보하는 방법으로 피부의 꺼진것을 채워준다.







6 넓어진 흉터를 좁힌다.







-서양의학적인 시술은 흉터를 절개하여 봉합하므로 흉터가 좁아지기만 하지만 이미지한의원의 흉터 치료는 흉터 조차가 없다.







7 눈에 덜 띄게 하기 위해 흉터를 더 작은 분절로 나눈다.







-이미지한의원은 흉터를 더 작은 분절[구역]로 나누는 것과 같이 침을 구역별로 꼼꼼하게 시술하기 때문에 치료 효과가 좋다.







8 기계적 박피술, 레이저 등과 같은 다른 시술을 첨가 함으로써 색깔과 질감을 균질화하여 흉터를 개선시킨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시술은 비외상성으로 시행해야 하고 이상적인 상처 회복의 환경이 유지되어야 한다.







-기계적 박피술은 염증후 색소침착이라고 불리는 검거나 갈색의 색소침착이 생기기 쉬우며 진피가 손상될수 있으며 레이저는 시술후 따갑거나 예민하게 되며 1mm이상 깊숙하게 시술을 하지 못한다. 이미지한의원의 흉터 침치료는 비외상적인 치료이며 주의사항만 지킨다면 부작용이 적은 비교적안전한 시술이다.

2010년 9월 26일 일요일

대증치료를 하는 서양의학과 근본치료를 하는 한의학

대증치료를 하는 서양의학과 근본치료를 하는 한의학






주인이 먼길을 떠나며 하인에게 분부 했습니다.



"너는 문을 잘 지키고 나귀와 밧줄을 잘 살펴라,"



주인이 떠난뒤 동네에서 풍악 놀이가 있었는데 하인은 구경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인은 문을 뜯어서 나귀의 등에 얹고 놀이터로 하인이 나간뒤 도적이 와서 집안의 재물을 모두 훔쳐가 버리자 주인이 돌아와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재물은 모두 어쨌느냐?"



"저에겐 문과 나귀와 밧줄을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위는 인터넷 유머 사이트에서 펀 글이다. 우리 몸을 잘 섭생을 잘하고 건강해지려면 몸인 당나귀 자체를 잘 보살펴야 한다. 하지만 하인은 평소의 관리는 소홀히 하며 문과 밧줄만 집착하여 당나귀인 건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들도 사실 평소 음식이나 수면 스트레스 관리등 라이프 스타일 개선은 소홀히 하면서 의사들에게만 몸을 맡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서양의학은 질병의 치료에만 신경쓸 뿐 실제 건강을 좋게 하는 방법에는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또한 혈압 수치나 당뇨수치, 콜레스테롤 수치등 지엽적인 것만 집착하여 실제 건강의 방법에 대해서 무지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살을 빼서 복부 비만을 치료하면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고콜레스테롤 혈증등 여러 가지 건강 지표등을 좋게 할 수 있지만 각자 혈압약, 당뇨약, 콜레스테롤 약등을 투여하여 수치만 개선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예로 우리 몸에 튼살이 발생하면 예방적 차원에서 살을 찌개 하지 않고 특히 임신중 10kg이상 찌지 않게 체중유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먹는 것은 더 많이 먹고 운동을 적게 하는 등 튼살이 생길 조건만 만들어준다. 또 아무런 의학적 근거가 없는 튼살 크림만 믿고 예방을 등한시한다. 필자는 튼살 치료 전문 한방 피부과 전문의로 튼살을 재발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한다. 상식적으로 튼살은 살이 찌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튼살 예방이 안되었다면 나중에라도 침으로 치료가 가능하니 너무 포기하는 것도 좋지는 않고 희망을 가졌으면 한다.

2010년 7월 30일 금요일

줄기세포와 침치료 한의학의 미래

줄기세포와 침치료 한의학의 미래






황우석 박사 논문조작사태 이후에도 요즘에는 줄기세포 화장품등 줄기세포란 말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줄기 세포(幹細胞, 영어: stem cell)는 생체 내의 세포들의 근원이라는 의미로서 무한히 자가재생을 할 수 있으면서, 적절한 생체신호와 외부자극에 의해 다른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미분화 세포를 통칭한다. 크게 배아줄기세포, 성체줄기세포로 구분되어진다. 줄기세포로부터 분화된 세포는 난치성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세포치료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특정한 세포로 분화가 진행되지 않은 채 유지되다가 필요할 경우 신경·혈액·연골 등 몸을 구성하는 모든 종류의 세포로 분화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세포를 말한다.



서양의학의 항생제가 처음 나왔을때 마법의 탄환이 나와서 모든 감염성 질환을 치료할 것처럼 떠들어 댔지만 현재는 항생제 부작용과 내성등으로 결국에는 세균의 돌연변이를 인간 항생제의 개발속도가 따라갈 수 없다고 감염내과 교수님이 말한 적이 있다.



결국 한때 유행하는 의료법의 최신의 치료법은 물론 발전 가능성은 많지만 바이오회사의 주가조작을 위해서나 과장광고나 선전에 불과할 수도 있다.



피부에 상처가 나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피부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피부 아래쪽에 피부세포를 만들어내는 줄기세포가 있기 때문이다. 즉 줄기세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피부에 이미 존재하는 줄기세포를 침으로 자극주면 좋아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튼살이나 화상이나 사고 각종 수술 흉터가 존재한다고 하자. 그 흉터가 아무리 오래되었고 보기가 싫어도 인체에는 내재적인 자연치유력이 있고 줄기세포가 존재하기 때문에 침 자극으로 잠자는 줄기세포가 깨어날 수 있는 것이다. 곰은 겨울잠을 자고 있을 뿐이지 봄이 되면 활동을 개시한다. 5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동양의학은 침이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을 통하여 현대 첨단기술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각종 흉터나 튼살을 치료가 가능하게 하였다. 물론 일반적인 한의원에서는 튼살과 화상등 각종 흉터 치료가 어려우며 반드시 서울에 있는 피부과 전문의가 진료하는 이미지 한의원에서 상담을 받아서 치료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행복이 외부에서 오지 않고 내면에서 오는 것처럼 우리 몸에 이미 존재하는 줄기세포를 자극하여 새로운 살이 차오르게 하는 것이다. 텅 빈 허공과 같은 마음에 사랑과 행복이 차오르듯이 각종 상처난 마음에도 한 생명의 새싹과 같이 새로운 싹이 돋아났으면 한다.

2010년 7월 13일 화요일

맥으로 아는 간이며 쓸개는 무엇인가?

왜 한의사는 서양의학에 밀리는가?






첫째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하는 보여주지 못하는 점이며 또 하나는 용어가 서양의학에 밀려서이다. 나는 튼살이나 화상흉터등을 치료하기 때문에 보이는 부분을 치료하기 때문에 첫 번째 침 치료 효과는 보여주는 것은 확실히 할 수 있다.



둘째는 용어자체가 서양의학에 잠식을 당해서이다. 환자들은 한의사에게 진맥을 원한다. 그것은 의식적인 의례(ritual)일 수도 있고 그냥 왔으니 신기하고 궁금해서일 수 있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겠다. 나는 한방병원 수련의일때 독일인 의대생이 많이 왔다. 그들은 한의학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이름은 잘 기억안나지만 한 명이 나에게 진맥좀 해달라고 했다. 너무 우리나라 사람처럼 쉽게 손목을 내밀어서 정말 놀랬다. 김흥국씨 말대로 나한테 들이댄 것이다. 내가 모 대형병원 응급실 참관수업을 받는 중이었는데 나는 그의 진심이 궁금했다. 즉 왜 팔뚝을 들이밀고 진맥을 요구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당신 밥 먹었냐고 했다. 그 사람은 밥을 아직 안 먹었다고 했다. 시간 핑계를 댈려고 했는데 마침 오전 7시경으로 평단에 가까운 진맥하기 좋은 시기였다. 그럼 내가 밥을 먹고 오라고 했다. 다음 날 그는 또한 팔을 들이밀었다. 나는 밥을 먹고 왔냐고 하니 먹었다고 했다. 먹은지 얼마 되었냐고 하니 바로 먹었다고 한다. 나는 밥을 먹으면 담음이 있는 것처럼 맥이 매끄러운 활맥이 나오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 다음날 그는 또 나한테 팔을 들이 밀었다. 나는 진맥을 봐줄려고 했는데 옆에 커피가 있었다. 나는 커피 마셨냐고 물어보니 커피 마셨다고 해서 커피는 맥을 빠른 맥인 빈맥으로 만들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또 다음날 정말 밥 먹고 커피도 안먹고 정말 말 잘듣는 학생처럼 왔다. 삼고초려에 감동한 나는 맥을 봐줄수 밖에 없었다.



한의학적으로는 맥으로는 오장육부의 기운을 알수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좌측 관맥이 허약하니 간이 나쁘고 혈의 저장이 안되며 어지럽고 눈이 침침하고 주저리주저리 말해봐야 환자는 이 사람 사기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며칠전 종합검진 받았는데 간(liver) 수치(보통 OT, PT라고 말하는 AST, ALT)가 모두 정상이었다. 그러니 한의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다. 한약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던데.. 그러면서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간은 동양의학에서는 춘추전국 시대 이전부터 씌여 왔다. 서양의학적으로는 그리스 신화에서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가 간을 독수리가 파먹었다는 오래된 신화에서 처음나오는지 알수 없으나 아무튼 liver이다. 즉 liver는 간이 아니라 liver일 뿐이다. 그것을 간으로 누가 번역했는지 모르나(아마 네덜란드 의학을 동양학문으로 번역한 일본사람이었을 것이다. 1766년 봄, 이미 난학의 기초 지식을 습득한 마에노 료타쿠와 아직 화란어를 배워보지 못한 스키타 겐파쿠가 번역한 해부학책인 해체신서가 처음인가?) 물론 잘한 것도 있다. 하지만 소화기계인 비장은 서양의학으로 면역력을 담당하는 spleen으로 되는 등 이런 혼동이 한의학을 더욱 미궁속으로 빠져 들게 하는 것이다. 나는 결코 한의학 일원론자가 아니다. 나는 빼앗긴 용어를 되찾아오자는 것 뿐이다. 즉 앞으로는 의사들은 간이라고 하지 말고 liver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의사들은 메디컬 용어가 모두 영어이며 그들도 영어로 쓰면 편하다. 정말 서양의사들은 무의식중으로 영어가 그들은 더 편하니 만약 컨퍼런스 등에서도 만약 영어를 쓰지 말라고 하면 번역하려고 더 땀을 뺄 것이다. 나는 하얀거탑이란 드라마에서 일부러 의학영어를 한글로 바꿔 쓰는 것을 보고 정말 경악했다. 차라리 영어로 말하고 자막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사실감이 있고 맞다. 또한 경제는 economy일 뿐이다. 경제가 한자로 經濟로 經世濟民의 뜻에서 나왔다고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냥 경제는 이코노미일 뿐이다. 번역상 빌려온 말에 그다지 뜻을 둘 필요가 없다. 한의학이 과학인가 하는 논쟁도 있지만 science는 사이언스다. 우리가 왜 일본이 번역을 위해 만든 과학이란 단어에 휘둘려야 하는가?



또한 진료기록부도 의료법상 반드시 한글과 한자로 표시되어야 하는데 의사들은 영어를 쓴다. 의사들은 영어하고 약자 정말 좋아한다. 왜냐하면 영어가 익숙하고 편한 것이다. 따라서 제발 오장육부를 한의학적 이름을 빌리지 말고, 제발 국제화시대에 맞추어서 영어로 쓰길 바란다. 한의사[의사]는 서양의학에 정말 간이며 쓸개를 내준 것이다.

2010년 7월 8일 목요일

제중원에 의사란 말은 다 거짓이다. 한의사가 진정한 의사이다.

한의사는 빼앗긴 의사란 명칭을 돌려받아야 한다.






나는 한의사지만 한의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김용옥 교수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알 수 없으나 꼭 한의과 나온 본인이 의과 대학 나오고 의사라고 말한다. 나는 漢方이든 韓方이든 한방이란 말이 붙는 것이 정말 싫다. 왜냐하면 한방이란 말은 일제가 만든 말이다. 의사들이 양방 의사란 말 싫어하는 것과 같다.



공자님은 공자는 자로라는 제자가 위나라에서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냐고 물었을 때, “반드시 이름을 바로 잡겠다(必也正名乎)”라고 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개념이며 잘못된 개념에서 잘못된 것이 파생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제중원이란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다. 과연 현재 흰가운 입는 양의사란 존재가 그 때 존재했을까?



1900년 고종시대 대한 제국 의사 규칙 제1조1항을 보자. “의사는 의학을 慣熟하야 천지운기와 맥후진찰과 내외경과 대소방과 약품온량과 침구보사를 통하야 對症投劑한자를 云하니라” 현재의 의사(MD, Medical Doctor)는 이 글을 한자 때문에 해석하지도 못할 것이다. 해석해보면 “한의사는 한의학을 습관적으로 익히며 하늘과 땅의 운기(오운육기)와 진맥과 진찰과 내경과 외경과 성인과 소아의 처방과 한약의 차고 더움과 침구의 보법과 사법을 통하여 증상에 대응하여 약제를 투약한 사람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때 의사는 분명히 한의사를 말하며 의사들은 오운육기를 알수도 없고 침구법도 알 수 없다. 또한 양약에는 차고 덥다는 성질이 있지도 않을 것이니 한약을 말함이다. 간단히 말해서 더하는 보법과 빼는 사법도 오직 한의학에만 존재한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10년후에 일제에 강제 합병된후(그 조약도 국제법상으로 무효지만) 의사들은 오직 양의사만을 가리키며 한의사들은 의생으로 격하되었다. 의생이란 중국어로도 의사이지만 왠지 의학학생이란 말 같다. 즉 의사는 의학을 배운 스승, 의생은 의학을 배우는 학생이란 말처럼 한의사는 한단계 낮은 준의사 취급을 받는다. 일제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한의학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침구사란 제도를 설립하며 아직도 현재 의료법에도 의료유사업자란 존재에 간혹 침구사가 등장한다. 아니면 한의사는 의사(醫師스승사)가 아닌 의사(醫士)로도 표기되었다. 만약 병원가서 선생님이라고 소리 안하면 큰일 나는 것도 표기 때문이다. 지금 간호사는 ‘선비 사(士)’로 표기가 되어 있다. 따라서 서양의사는 절대로 병원에서 간호사에게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짜 의사란 말은 서양의학을 배운 Medical Doctor가 아닌 한의사이다. 한의사란 말은 어디서 생겼는지 알아보려면 우리는 국악을 상기하면 된다. 즉 모든 서양음악은 음악이며 국악은 서양의학에 대비할 때만 국악이란 이름으로 존재한다. 즉 일제전에는 음악은 모두 국악이며 서양의학은 없다. 즉 필자도 클래식을 좋아하지만 서양음악이 양악라고 불리어야 하며 국악이 음악이 되어야 한다. 같은 말로 한의학은 의학이며, 서양의학은 양의학이라고 불리어져야 한다. 그럼 의사는 어떻게 불리어야 할까?



예전에 여성이 의사가 귀한 시절에는 여의사라고 불렸다. 왜 그럼 남의사가 없는가? 숫자가 적고 열악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성 의사가 늘어났는데(의대생은 한 50%정도 될까?) 여의사라고 부르면 오히려 더 이상하다.



의사는 Medical Doctor라고 불리어야 하며 아니면 줄여서 M.D.라고 불리어야 한다. 즉 의사는 의학박사라고 불리어야 한다. 하지만 의사는 전문의는 많으나 학부만 나온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의학박사라고 불리면 실제 의학박사랑 혼돈이 된다. 따라서 메디칼 닥터라고 불리거나 서양의사라고 불리어야 한다. 아니면 그냥 닥터라고 불리면 된다. 나는 독일인 의대생에게 한의학을 가르친 적이 많은데 그들은 그냥 의사를 ‘독터[닥터의 독일말]’ 이런 식으로 부른다.



아니면 서양의학이 수술위주의 개체적이며 분석적인 Biomedicine(생의학)을 패러다임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생의학 의사라고 불리어야 한다. 더 황당한 사건은 liver가 동양의학의 간(肝)을 내쫒는 등 서양의 오장육부 이름이 한의학의 명칭을 내쫒아 버린 것이다. 이것은 뒤에 서술하겠다.

2010년 6월 14일 월요일

한의학과 몸-출처불명

한의학의 몸
- 󰡔황제내경󰡕의 몸에 대한 이해

왜 몸이 문제인가

사람에게 몸이 문제로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라는 것은 항상 현실적인 근거를 갖는다. 현실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과의 연관을 갖지 않는 문제는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은 그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실천적인 욕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욕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곧 현실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내가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실천했는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바로 그 속에 이미 문제의 해결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몸에 대해 문제를 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 번째로 생물학적인 측면이다.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몸이 있어야 한다. 이런 생물학적인 조건이 갖춰져야 문제가 나올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는 사회적 측면이다. 사회관계가 배제된 채 생물학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처럼 말구유에서 태어나거나 귀족으로서 은 스푼을 입에 물고 태어난다는 말은, 갓 태어난 생물학적인 존재가 이미 벗어 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사회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의학은 사람의 몸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것도 생물학적인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학문이다. 따라서 한의학에서 몸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주로 병과 무병장수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물론 한의학에 몸을 둘러싼 환경, 곧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자칫 세상을 얻어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건강 지상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이런 측면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한의학, 부분적인 것이 되겠지만 특히 󰡔황제내경󰡕(이하 󰡔내경󰡕으로 줄임)을 중심으로 한의학에서의 몸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는 하나의 거울로 삼고 싶다.

사람이 꽃보다 귀하다

󰡔내경󰡕에서 사람이 꽃보다 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은 모든 것을 덮고 있고 땅은 그 위에 모든 것을 싣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태어나서 네 계절의 법칙을 본받아 삶을 이루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지위가 높든 낮든 모두가 몸을 온전히 하고자 한다. 그리고 ‘살림’(生)을 좋아하고 ‘죽임’(死)을 싫어하여 몸을 온전히 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여기에는 매우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먼저 자연에 대한 이해이다.
사람은 땅 위에서 태어나지만 자신의 명命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과 땅이 그 기를 합하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다. 하늘이 내게 있는 것이 덕이며 땅이 내게 있는 것은 기다. 덕이 아래로 흘러 기와 서로 작용하여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낳는 것이다. 인간의 인위적인 작용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다. 의식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인간에 대對한 것, 인간의 외부에 실체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연이 아니다. 하늘과 땅은 모든 것(만물)을 덮고 싣고 있을 뿐이며 그 안에 모든 것이 있고 그 중의 하나가 사람일뿐이다. 따라서 이때의 사람이나 사람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서로가 대상적인 것이 아니다. 시각으로 본다면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우주라면 사람이 소우주라고 하는 말은 바로 이런 관계를 전제로 한다. 우주가 기라고 한다면 사람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기이다. 이러한 기의 일체성이 바로 사람이 소우주라는 말의 첫 번째 전제이지만 이 일체성은 서로 의식적으로 구분되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각 대상들의 일체성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은 다만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장자가 똥과 같이 하찮은 것에도 도가 있다고 할 때의 의미도 바로 이런 의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기로 이루어진 것이며 다만 이런 기의 운동에 따라 이런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전제가 없이는 한의학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각각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한다면 역시 한의학은 존재할 수 없다.

몸은 음양의 변화를 본받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 중에서 사람은 가장 귀한 존재이다. 그것은 사람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의 기로 태어난 것이지만 사람은 네 계절의 법칙을 본받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늘과 땅을 부모로 삼으며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하늘의 자식이라고 한다. 하늘에는 음양이 있고 열두 달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팔 다리와 같은 열두 마디(혹은 열두 경맥)가 있다. 하늘에는 찬 기운과 더운 기운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허실이 있다. 하늘과 땅의 변화를 쫓을 수 있다면 네 계절의 규율을 벗어나지 않으며 열두 마디의 이치를 안다면 성인일지라도 그를 업신여길 수 없다. 기를 음과 양이라는 두 범주의 운동으로 파악한다면 음양의 성쇠에 따라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에 맞추어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귀한 것이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음양은 하늘과 땅의 법칙이다. 모든 것이 작용하는 크고 작은 원칙이며 모든 변화의 근원이며 살리고 죽이는 근원이다. 하늘도 양이 쌓여서 된 것이며 땅도 음이 쌓여서 된 것이다. 음양의 변화야말로 하늘과 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음양의 변화에 그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맞추어 살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 존재가 귀한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네 계절로 표현되는 음양의 변화를 본받아 삶을 이루어가기 때문이다. 동물이나 식물도 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 변화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성인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교화가 필요하다. 성인의 교화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음양이 그 가르침이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음양은 추상적인 원리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양생의 법칙, 곧 도이다. 이러한 도의 개념은 󰡔내경󰡕이 많은 점에서 󰡔노자󰡕와 닮았지만 다른 점을 보이는 측면이다. 노자의 도는 어떤 상태나 형상이 아니다.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상象과 물物과 정精과 신信이 들어 있다(제21장). 감각되지는 않지만 만물 생성의 근원으로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내경󰡕의 도는 음양의 도이며 이 음양은 자연과 인간의 몸을 모두 아우르는 운동 법칙이다. 양생을 위해 본받고 거기에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사회 규범으로서의 내용은 갖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초월적 관념으로 설정되어 있지도 않다. 도는 자연의 이치이며 그 구체적인 표현은 음양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술수術數이다. 만물 생성의 근원으로서의 도이면서도 실제 실천에 곧바로 쓰이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내경󰡕을 통해 도가 초월적인 어떤 것, 이념적인 것으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왕빙의 해석처럼 도를 얻은 것(道德)은 곧 온전한 몸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 덕(德)이란 도(彳)를 바른(直) 마음(心)으로 행해서 얻음(得)이 있는 것이다. 온전히 얻었으므로 건강하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인이 아랫사람을 교화할 때는 아주 간단하게, 모두 나쁜 기운과 병을 일으키는 바람을 피하는데 때를 맞춰 피하라 하였고, 고요하고 소박한 심정으로 마음을 비우면(恬憺虛無) 진기가 생겨날 것이며 그러면 정精과 신神이 안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은 기후와 같은 자연의 변화를 때에 맞춰 피하는 것이지 그것을 막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병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에 대해 그것을 대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비바람을 피하는데는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나 언덕 위의 하얀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음양의 변화하는 때를 잘 알고 거기에 맞춰 피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피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내경󰡕의 여기 저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물 흐르는 대로 내 마음도 흐를 수 있다면

뜻을 한가롭게 하여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안정하여 두려움이 없고 일을 하되 피곤하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기가 잘 돌아서 각자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그 모두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욕심을 줄인다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 끝없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이 욕망은 물론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람이 자연이나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내 마음만 다잡으면 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내경󰡕에서의 마음 다스리기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초점이 모아져 있다. 곧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자기가 먹는 음식을 달게 여기며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자기가 사는 곳의 풍습을 좋아하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서로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백성들을 소박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욕심으로 그 눈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며 음란하고 나쁜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게 되며 미련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모두 외부의 사물에 구애받지 않으니 도에 딱 들어맞게 된다. 이렇게 할 때 병이 생기지 않고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무병장수에 대한 욕구는 인지상정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어쩔 수 없는 바램이다.
이렇게 보면 󰡔내경󰡕에서의 몸은, 자연과 구분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적 실체가 아니라 자연과 하나된 존재이다. 이러한 주객의 통일을 전제로 기를 매개로 하여 자연과 일체화된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켜나가는 존재이며 자신의 몸을 온전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병 혹은 요절이라는 것은 바이러스와 같은 어떤 대상적 존재가 내 몸을 망가뜨린 결과가 아니라 음양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다.

병이 들기 전에 병을 고친다

병이 외부의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병들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양생의 법칙을 지키는 것이며 그 결과 몸이 튼튼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경󰡕에서는 병들기 전에 병을 고친다는 표현이 있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음양과 네 계절로 대표되는 이 변화의 법칙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며 죽음과 삶의 근본이다. 이를 거스르면 온갖 나쁜 일이 생기고 거기에 따르면 나쁜 병이 생기지 않으니 이런 상태를 도를 얻었다고 한다. 도라는 것은 성인은 실천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노리개 정도로 여긴다. 음양의 법칙에 따르면 살고 거스르면 죽는다. 따르면 다스려지고 거스르면 어지럽다. 성인은 병들고 난 뒤에 치료하지 않고 병이 들기 전에 치료한다. 난리가 난 뒤에 다스리려 하지 않고 난리가 나기 전에 다스린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병이 이미 들고 난 뒤에 약을 쓰면 난리가 난 뒤에 다스리려는 것과 같으니 이는 마치 목이 마른 뒤에야 우물을 파고 전쟁이 난 뒤에야 무기를 만드는 것과 같으니 이 얼마나 때에 늦은 것인가.
병들기 전에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병을 미리 ‘예방豫防’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방’이란 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것의 진행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내경󰡕의 예방은 백신을 맞는다든지 방역을 하여 면역을 높이고 외인을 없애는 방법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병을 막거나 정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리 피하는 것이다. 특정한 어떤 병원균을 막는 것이 아니고 그런 병원균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피하는 것이다. 또한 특정한 병원균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전반적인 내 몸의 기운을 강하게 하여 병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며 침범하더라도 깊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대표적으로 네 계절로 표현되는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경󰡕에는 서양 근대의학에서 말하는 예방의학이 없다.

때에 따라 변화하는 몸

사람이 네 계절의 변화를 본받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은 사람의 몸도 음양의 시간적 변화 속에 일체화되어 있으므로 그런 변화에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말을 한다. 이런 말의 뒤에는 시간은 마치 시계가 규칙적으로 작동하듯이 균질적으로 흐르며(절대 시간) 사람의 몸도 균질적으로 움직인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누구나 경험하듯이 밤과 낮의 몸은 그 상태가 다르다. 다시 말하여 객관적인 시간은 균질적으로 흐를지 모르지만 몸에 있어서의 시간은 균질적이지 않다. 시간이 음양의 운동과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몸의 시간 역시 음양의 운동과 변화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는 날(日) 혹은 계절, 해(年)를 두고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내경󰡕에서는 무조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음양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봄과 겨울의 예를 보자.

봄은 모든 것이 새롭게 발생하는 때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생겨나 만물이 싱싱하다. 봄에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한가로이 뜰을 거닐고 머리나 옷을 느슨하게 하고 마음속에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자꾸 생겨나게 하라. 다른 생물을 살리되 죽이지 말고 남에게 베풀되 빼앗지 말며 남을 칭찬하되 벌주지 말아라. 이것이 봄의 기운에 따라 발생(生)을 기르는 양생의 도이다. 이에 거스르게 되면 간(肝)을 상하여 여름이 되면 찬 기운으로 인한 병이 생기니 더운 여름의 자라는(長) 도를 맞이하기에 부족하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겨울은 가두어 깊이 간직해두는 때이다. 물이 얼고 땅이 갈라진다. 양기를 불필요하게 요동시키지 말아라. 겨울에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야 한다. 일어날 때는 해가 높이 뜨기를 기다리며, 마음속에 무언가 감춘 듯 밖으로 드러내지 말고, 이미 귀중한 것을 얻은 것처럼 하며, 추운 기를 없애고 따뜻하게 하라. 다만 너무 덥게 하여 필요 없는 땀을 흘려서 양기를 빼앗기지 않게 한다. 이것이 겨울의 기에 따라 갈무리하는 것(藏)을 기르는 도이니 이에 거스르면 신(腎)을 상하여 봄이 되면 손발이 무력해지고 차게 되는 병에 걸리니 봄의 자라나는 기(生)를 받들기에 부족하다.

󰡔내경󰡕에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할 때는 가을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봄과 여름에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겨울에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야 한다. 이는 사람의 몸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기의 흐름, 곧 음양의 변화에 맞추지 않는다면 내 몸의 음양은 그 조화가 깨질 수밖에 없다. 외부의 기와 감응感應하지 못할 때 내 몸은 병들게 된다. 이런 예는 계절만이 아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해당하는 노년에는 아침 햇살과 같은 아이들과 자주 어울리는 것이 마땅하다. 음양의 변화에 맞추어 내게 부족한 것은 채우고 넘치는 것은 덜어내는 것이 음양의 도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는 절대적인 시간은 없게 된다. 빠름과 느림은 절대적인 시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변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변화는 몸이 자연에 대해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로 일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변적인 시간은 사람의 몸이 하늘을 본뜬 것이기 때문이다. 󰡔내경󰡕에서의 시간은 어디까지나 몸 안에서의 시간이다.

몸이 한숨을 쉬는 이유

사람의 몸이 소우주라는 것은 몸이 우주의 일부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하나의 기라는 점에서는 우주의 일부이지만 몸은 우주의 운동을 본받기 때문에 소우주가 된다. 이런 관점은 한숨을 쉬는 이유에 대한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소문󰡕 「평인기상론平人氣象論」에서는 사람이 한숨을 쉬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이 한번 숨을 내쉴 때 맥은 두 번 뛴다. 다시 숨을 들이 쉴 때 맥은 또 두 번 뛴다. 내쉬고 들이쉬며 숨을 잠시 쉬는 사이에 맥이 모두 다섯 번 뛴다. [숨과 맥이 똑 고르게 맞지 않는 그] 자투리를 모아 크게 한숨을 쉰다. 이런 사람을 평인이라고 한다.

평인은 병이 걸리지 않는 건강한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이 숨을 쉴 때는 호呼와 흡吸, 흡과 호 사이의 길이가 같지 않아서 호와 흡 사이가 더 길다. 그런데 맥은 그 사이에 다섯 번을 뛰므로 호흡과 맥의 박동이 서로 어긋날 수 있다. 마치 일년의 길이가 한 달을 30일로 했을 때 360일로 모자라서 윤달을 두는 것처럼 숨도 자투리를 모아 한숨을 쉬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경󰡕에서 말하는 ‘평인’이 하늘의 ‘기’를 본뜬(‘상象’) 것이며 몸이 소우주라는 의미이다.

상관적 사고인가 감응적 사고인가

이렇게 본다면 몸만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은 하나의 기가 음양의 운동에 따라 변화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분류될 수 있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북쪽의 기는 찬 기운을 낳고 찬 기운은 물을 낳고 물은 짠맛을 낳고 찬 맛은 신장을 낳고 신장은 골수를 낳고 골수는 간을 낳는다. 신장의 기는 귀의 기능을 주관하는데, 하늘에서는 찬 기운이 되고 땅에서는 물이 되고 몸에서는 뼈가 되며 장부에서는 신장이 된다. 색에서는 검은 색이 되며 가락에서는 우羽가 되고 소리에서는 신음소리가 되며 병적인 변화에서는 벌벌 떠는 것이 되고 감각 기관에서는 귀가 되며 맛에서는 짠맛이 되고 정서에서는 두려움이 된다. 두려움은 신장을 상하게 하는데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두려움을 이긴다. 찬 기운은 혈을 상하는데 마른 기운이 찬 기운을 이긴다. 짠맛은 혈을 상하는데 단맛이 짠맛을 이긴다.

여기에서 ‘낳는다’는 말은 ‘살린다’는 말이다. 어떤 기운이 다른 기운을 살려주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이들이 같은 기이기 때문이다. 신장이 뼈도 되고 검은 색도 되고 신음소리도 되는 것은 신장 자체가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장의 기나 뼈의 기, 검은 색의 기가 결국은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서로 상감相感하여 살려 준다는 의미이다. 이는 서로 대상적인 존재로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일정한 구조적 연관 관계가 있어서 서로 작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기로서 서로 감응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구조의 동일성이 아니라 기의 동일성이다.

감정의 신체화

이렇게 볼 때 인간의 감정 혹은 정서가 몸의 특정 부위와 바로 연관된다는 󰡔내경󰡕의 사고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화내는 것(怒)은 간, 기쁜 것(喜)은 심心, 골몰히 생각하는 것, 혹은 바라는 것(思)은 비脾, 근심하는 것(憂)은 폐, 두려워하는 것(恐)은 신腎과 각각 연관된다. 이는 마치 하늘에 네 계절이 있고 오행이 있어서 태어나고 자라고 거두어들이고 갈무리하며 춥고 덥고 마르고 습한 기운과 바람을 낳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다섯 장기가 있어서 다섯 가지 기를 만듦으로써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근심하고 두려운 정서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를 많이 내면 간이 나빠지고 반대로 간이 나빠지면 화를 잘 내게 된다. 이는 화내는 정서가 간의 기와 같기 때문이다. 화내는 정서는 간만이 아니라 다시 근육(정확히는 인대), 혈血, 눈(目) 등과 다 감응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 천천히 걸으면 근육이 풀어지게 되고 따라서 화난 정서도 풀어지게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연관은 몸만이 아니라 자연계의 모든 것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원리에 따라 약을 쓰는 것이다.

외인으로서의 바람

앞에서 몸이 병드는 것은 음양의 변화에 맞추지 못했거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의학에도 당연히 외인이 있다. 다시 말하면 외부의 어떤 것이 몸을 침범하여 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인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바람이다.
󰡔내경󰡕에서는 바람이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외인은 주체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경󰡕에서 이것이 병으로 발전하는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몸에 달려 있다. 곧 외인은 내인을 통해서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
󰡔영추󰡕에서 황제는 소사에게 기후도 알맞고 외인이 침범하는 주된 통로인 땀구멍(주리腠理)이 열리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병이 드는 경우를 물어보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은 땀구멍이 열리는 데에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해나 달과 상응하여 달이 차면 밀물이 되는 것처럼 혈기가 왕성하고 피부도 치밀해져서 이럴 때 외인(바람)이 침범하더라도 병이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반대로 달이 이지러지면 혈기가 허해져서 땀구멍이 열리고 이때 외인이 침범하게 되면 몸 깊이 들어가 병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몸 자체의 정기가 얼마나 강한가 여부도 병이 드는 것에 관여한다. 이런 내인 중심적 사고는 󰡔상한론󰡕에서는 또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지만 󰡔상한론󰡕에서도 역시 외인 자체의 분석이 아니라 몸 안에 들어온 외인이 몸 안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몸 안에 어떤 바이러스가 들어왔는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바이러스가 어떤 몸의 변화를 일으키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이는 외인이, 이를테면 바람인지 찬 기운인지 습한 기운인지, 어떤 기인지를 파악하면 되는 것이지 바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기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바로 몸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병적인 변화이다. 이 병적 변화는 또한 몸의 내부적 상태, 조건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 덩어리인 몸

󰡔내경󰡕에서 정상적인 기의 운행과 병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주요 통로는 경락이다. 그러나 강물이 흐르는 큰 길이 따로 있지만(이것이 수로다) 땅 속 어디에도 물(물기)이 있듯이, 몸을 흐르는 기의 큰길은 있지만 몸 전체에 기는 스며들어 있다. 아니 몸 전체가 하나의 기 덩어리이다. 다만 그 큰 줄기가 경락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경락이 수로에 비유된 것은 여러 의미에서 적절하게 보인다. 크게 열두 줄기가 있지만 거기에는 다시 작은 갈래가 있으며 이것들이 다시 서로 얽히고 설켜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몸 안을 흐르는 기의 운행과 유사하다. 다른 하나는 이 수로가 폐쇄된 것이 아니라 외부, 하늘과 열린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도 기의 운동을 잘 비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로가 내부로, 다시 말하자면 땅속으로도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은 기의 운동을 상징하는 비유로서 적절하다. 마치 수로처럼 경락은 몸 전체를 얽어놓고 있으면서 내외로 열린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경락은 열두 개의 큰 경맥(십이정경十二正經)만이 아니라 기경팔맥奇經八脈, 경별經別, 락맥絡脈, 경근經筋 나아가 경피經皮(체표 부분)에 이르는 복잡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오장육부라고 할 때의 장기들도 사실은 마치 물이 흐르다 작은 연못이나 호수를 만들듯이 기가 흘러가는 한 지점에 불과하다. 경락은 물이 흘러가듯 정상적이건 병적이건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통로인 셈이고 장부는 그런 변화들이 중점적으로 나타나는 곳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을 유지하는 한 󰡔내경󰡕에서 실질 장기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고대에 수많은 해부 경험이 있었겠지만 그러한 경험을 거의 의학 이론에 반영하지 않은 것은 󰡔내경󰡕에서 보려고 한 것은 장기 자체가 아니라 각 장기가 갖는 기적氣的인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각각의 장기가 몸의 다른 부분과 갖는 경락적인 연관성 속에서 다섯 가지 기를 만드는 것으로서의 장기라는 개념이 바로 내경의학內經醫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경󰡕의 몸에 대한 인식은 17세기까지 의연히 이어져 왔으며 이후 도입되는 서양 의학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 그 근간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서양 의학의 분류학 - 주객의 분리

서양의 의학은 18세기 이전까지는 주로 임상적인 상태에 따라 질병을 분류했다. 이는 한의학적인 방법과 비슷하다. 다만 차이는 한의학이 음양이라는 원칙에 따라 허실, 한열, 표리 등의 분류를 해 나간 반면 서양에서는 그런 원칙이 없이 특정한 증후군으로 나열했다는 차이가 있다. 서양의 경우, 19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해부학이 대두되고 이에 따라 병을 해부학적으로 분류하고 19세기 후반에는 생리학적인 기능 장애를 중심으로 보기 시작한다. 위궤양이나 디스크라는 병명은 해부학적인 분류에 따른 것이고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나 당뇨, 고혈압은 생리학적인 기능장애에 따른 분류이다. 20세기 초반으로 들어오면서 병은 세균과 같은 감염원에 의해 분류되기 시작한다. 결핵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현재는 면역학적인 분류가 시도되고 있다(에이즈가 이러한 최초의 분류이다). 이런 분류, 곧 병을 보는 눈의 변화는 서양 과학의 변화와 일치한다. 서양 과학이 발전하면서 어떤 학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따라 서양 의학의 관점도 변화를 가져온 셈이다. 이런 흐름의 밑에는 주체와 대상이 되는 객체의 구분이라는 큰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의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 객체나 주체의 어떤 측면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방법이 결정되어 온 것이다.
이에 비해 한의학에서는 서양과 같은 의미에서의 주객 분리는 없다. 주체나 객체나 다 같은 원리에 의해 움직이며 이는 음양 나아가 오행에 의해 설명 가능한 것이므로 어떤 바이러스가 들어왔는지, 어떤 해부학적인 부위에 병이 생겼는지, 인체의 자기 조절 기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서양 의학에서는 새로운 관점에 따라 항상 새로운 병이 생기고 새로운 병균에 의해 새로운 병이 생기지만 한의학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서양 의학에서는 새로운 검사 기계가 도입되면 새로운 병이 생긴다. 심하게는 정상인을 ‘충분히 조사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보는 서양 의학자도 있다. 시대에 따라 병은 분명히 바뀐다. 그러나 병의 근본 원인을 음양의 부조화로 보는 한 다양한 병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음양을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의학에서는 에이즈와 같은 어떠한 새로운 병이 나타나더라도 이를 음양으로 나누고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있다는 원리가 성립된다. 그렇다고 모든 병이 실제 치료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의학과 의술에는 서로 간에 일정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의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인간과 분리된 어떤 외부의 물질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초래된 내 몸의 상태다. 그러므로 내 몸의 정기신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이를 잘 지키려면 외부와 잘 조화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도교에서는 정기신을 세 가지 보물로 생각하여 이를 잘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동의보감󰡕도 제일권의 첫 머리에 이 정기신을 먼저 서술하여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마치면서

󰡔내경󰡕에서는 몸을 소우주로 보고 있다. 그 의미는 위에서 본대로 주객의 혼연한 일체화이다. 그러나 이런 일체화는 주객이 분리된 다음 다시 즉자 대자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다. 주객의 분리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체성이다. 물론 개별적인 물物에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바로 음양의 차이이며 이러한 차이는 오행으로 분류되어 인식된다.
이러한 󰡔내경󰡕의 사고 방식은 19세기까지 의학은 물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온 것이었으나 오늘날 이런 사고 방식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관점에서 단발령을 거부했던 것이 한 세기가 채 안 되는 과거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병이든 먼저 속을 들여다 보려하고 주사를 맞아야 하고 수술을 해야 하는 것으로 병과 몸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포경 수술율 세계 1위라는 현실은 󰡔내경󰡕의 몸에 대한 생각이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경󰡕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회구조가 오늘날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경󰡕을 읽고 있는 것은 󰡔내경󰡕의 세계를 다시 재현하여 그것을 우리 사회에 일반화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韓’의학이 모두 󰡔내경󰡕의 관점과 방법론에 기초한 것도 아니다. 또한 한의학이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주요한 분과로 떠오른 것은 주로 한의학이 갖는 기술적 측면이 초래하는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가 기여한 측면이 강하다. 물론 일부에서 한의학의 철학적 내용을 연구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오늘날 서양의 근대 과학, 나아가 근대 시민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모순을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도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모색이 바로 그런 시도이다. 분명히 󰡔내경󰡕의 세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러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보고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의 근거가 없이는 유토피아에 그치고 만다. 일정하게 변용된 형태일 수밖에 없겠지만 󰡔내경󰡕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는 그것을 실현할 주체의 형성과 그런 주체에 의해 그려지는 새로운 사회의 구상이 결합될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면서 새로운 의학 이론과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이 모색된다면 우리가 읽는 󰡔내경󰡕은 그제야 제 빛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6월 20일 금요일

신촌 이미지한의원 추천책 너와 나의 한의학

솔직히 본1년을 마치는 지금 본1을 마친다는 말을 하기가 두려운게 사실이다. 그만큼 내 학력수준이라는 것이 낮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내 스스로도 인정하는 셈인 것이다. 어쨌거나 정말 마치고 내년엔 본2에 들어서길 기대하며 글을 써 본다.
여러가지 생각과 기대와 부담속에서 지난 3월 본과에 들어섰고, 지금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 버렸는지 눈치챌 겨를도 없이 학년말이 됐다. 이제 곧 기말시험이 닥칠텐데, 어떻게 하지? 걱정하는 만큼만 공부를 해도 평점 2.5는 거뜬히 넘어서 부모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텐데. 그래도 이번 학기엔 기대를 해볼만 한게, 이젠 예전처럼 여자때문에 신경쓸 일도 없어졌고 게다가 두달이란 긴 시간동안 내 시간과 마음과 정력을 요구했던 연극이 10월 30일 공연을 끝으로 날 떠나 갔다는 거다. 이번 공연때 애들이 날 보구 제일 많이 웃었는데, 그러구 보면 인기나 명예같은 것은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따라 개구리 왕눈이 같은 큰 눈깔을 가진 어떤 여가수가 불렀던 노래처럼 내 인생은 남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과,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웃으면서 단을 거둔다는 (성경)구절과, 한 그루의 사과나무에 목숨을 걸겠다던 스피노자의 말을 떠올려 본다. 그런데 나는? 나는 뭐지?
평점미달될까봐 조마조마하는 내가 이 시점에 와서 인생이라는 것을 걸고 넘어져아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람이 생계만을 걱정하는게 비참한 것처럼 학생이 학점만 가지고 끙끙대는 것도 마찬가지로 비참한 것 같다. 나도 성인이 된지도 몇년됐고, 옛날같으면 결혼해서 아이가 두셋은 됐을텐데, 이렇게 살면 안되겠지.그리고 너무 작은 것에 내 시야를 고정시킨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겠고. 내 나름대로의 비젼을 갖고 싶다. 이 나이에 새삼스레 무슨 비젼이냐는 생각도 들지만 내 인생이 나의 것이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날 기다려 준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나도 한번 웃으면서 거두어 볼 줄도 알아야 될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앞뒤가 맞을지 모르겠는데, 사람이 준비하며 산다는 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다. 앞날을 다 알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할수 있는 길이 바로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생각한다고 해서 씨마이너스인 내 학점이 에이플러스로 깡충 뛰는 건 결코 아닐테지만 내 비젼을 바라보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내 구만리 인생을 위해 지금 준비하면서 살고 싶다. 혹시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에게 저 소말리아나 이디오피아 같은 어두운 땅으로 평생의료봉사를 보내실지 알 수없는 일이고, 그런데 그러면 난 지금 뭘 준비해야 되냐? 아이스 박스나 몇개 마련해 놓을까? 그러면 지금부터 적금을 넣어야 될텐데. 아니면 라면 서너박스 사서 쟁여 놓을까? 에라, 사발라면 한컵이나 끓여 먹자.

아! 아쉬운...: 장진요
어느덧 1992년도 5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기말고사만 보면 그렇게 희비가 엇갈리던 나의 본1도 끝나게 될것이다. 멋모르고 자나치면서 아무것도 이룬것이 없어 부끄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본1이라는 학년은 예과 1, 2학년동안 선배들의 지도만 받는 입장이다가 이제는 점점 후배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좀더 책임감이 생기는 시기인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번 1년 동안 공부에 치중하기보다는 써클활동에 더 치우친 것 같다. 그리고 이번 보칼공연을 마치고는 작년 재작년과는 약간 감회가 새로왔다. 그것은 아마도 이번 콘서트가 우리 학년에게는 마지막으로 서는 무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생활 면에서 말하자면 착실했던 예과 1, 2학년때와 비교해서 강의를 빠지는 횟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특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버릇이 생겨 오전강의를 많이 결석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주로 수업이 끝난 후 밤시간대를 잘못 이용하기 때문아닐까 싶다.
즉, 예과 2학년 때는 수업이 끝나고 써클에서 연습하기 바빴다. 그런데 본1이 되고 활동기수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남게 된 저녁시간대는 낯설고 무료하였다. 그 시간들을 나는 공부나, 어떤 미래지향적인 것들에 쏟기보다는 술이나 노는것에 낭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데는 외부적인 요인도 많이 있었으나, 궁극적으로 외부적인 유혹들을 내 스스로 자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년동안 나와 절친한 친구들이 대부분 군에 입대했다. 그들이 군에 가는 것을 보고 '어느덧 내 나이가 그렇게 되었나'하는 것을 느꼈다.
이번 일년동안 학교생활외에 여러 사회생활을 접하면서 '아! 이젠 내가 어른으로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자식으로서만이 아닌 하나의 능동적인 개체로서 성장해야 할 시기이구나'하는 생각을 무엇보다 많이 했다.
그러면서 자기주관없이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 더욱 부끄럽게 여겼다.
생각없이 살고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주관을 받쳐줄 수있는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항상 생할에서 생각하고 느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1년을 마치면서 한가지 아쉬운 문제는 이제 미팅, 소개팅 기회가 적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예과 1, 2학년때도 미팅같은건 별로 해보지 못했고, 더 중요한 사실은 여자하나 번번이 사귀게 보지 못했다는 점이 내가슴을 쓰리게한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때 미팅이나 많이 해 보는건데. 후에라도 미팅이나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어도 예과 1, 2학년때의 감정은 아니겠지.
학년이 올라 갈수록 1년이라는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남은 3년동안은 더더욱 빨리 지나갈 것 같다. 옛날에는 내 나이의 남자가 남편,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니, 지금의 같은 또래들이 당시의 청년들보다 정신연령이 낮다고 보아야 할까?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면서 내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가꾸어가야하는 것들중 하나가 바로 친구와의 우정이라 생각한다. 나의 좋은 친구들, 그들로 인해 나의 인격이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예과1학년 때의 사진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면 변화가 없는 듯한데, 좀 자세히 살펴보면 그래도 괴로웠던 일년의 그림자가 비친다.
미생물, 면역학 시험공부, 써클 콘서트, 친구들과의 여행등으로 고생과 즐거움이 교차했던 본1. 그 시간도 앞으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겠지.
@ff
이제부터라도: 김경수
벌써 11월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을 쏜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이나 빨리 지나가 버린 것이다. 일학기에 썼던 '본과생이되면서'란 글의 기억이 그리 오래지 않는데 벌써 '본과 1년을 마치면서'란 제목의 글을 쓴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나의 1년동안의 생활을 뒤돌아보니 그리 자랑스럽지 못하다. 아니 부끄럽다고해야 옳을 것이다.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별로 기억남는게 없으니말이다. 예과 2학년동안은 한의학을 배우기위한 준비과정이라고 할 수있다. 그리고 본과의 과정은 본격적인 한의학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의 사분의 일이 지났다. 올 한해 동안 많은 과목들을 배웠고 무사히 이수했던 것 같다. 본초학, 원전, 생리학, 경혈학, 의사학등 새로운 분야와 더 심도있게 배우는 분야가 어러가지 있었다. 본초학은 사실 우리를 많이 괴롭힌 과목중 하나다. 시험범위는 항상 누적이되고 배워가는 약물들의 수는 늘기만 하고, '평소에 조금씩만 해놀껄'하고 후회해본 적이 여러번이었다. 하긴 백에 육박하는 수의 약물들을 며칠간의 공부에 맡긴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본초실습같은 경우는 너무나 형식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작게 조각나버린 약재의 파편들을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기란 힘들 것 같았다. 농대처럼 직접 재배할 수 있는 것들을 길러 보여주는 고육이 되었으면 한다. 원전은 내가 가장 많이 빠진 과목중의 하나다. 예1때의 한의학한문, 예2와 본1의 2년 동안의 원전과정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게 후회된다. 방학중에라도 원전실력을 기를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다.거의 대부분의 강의시간들이 일방적인 교수님말씀으로 끝나는데 비해 약리학강의는 토론을 할 수 있고 무언가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의학과 양방의 약리학을 서로 매칭시켜 보려는 노력은 좋은 것 같았다. 생리, 경혈학을 배우면서 한의학을 배우는 이들이 느끼는 딜렘마, 즉 뜬구름을 많이 느껴보았다. 물론 이것은 제대로 학문을 탐구해 내지 못한 이들의 변명이겠지만. 커리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서 가장 매달렸던 과목은 미생물과 면역학이었다. 조금은 아이러니칼하다. 양방과목을 전부 없앨 수는 없을 테지만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단지 한학년을 올라가기 위해서 미생물과 면역학을 목숨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좀 더 한의학적인 방법으로 양방에 접근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한의학적으로 한의학을 해야한다는 박찬국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자기학문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학문까지 하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후배들에게만은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올해는 공중보건의문제로 심각했던 한해이기도 하다. 공중보건의를 쟁취해 내기위한 우리의 노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가적인 지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전통적인 것을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는 국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인식의 변화를 위한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우리 앞에 닥친 이런 문제에 너무 소극적이었다.
92년 올 한해는 너무 힘들었다. 건강이라는게 가장 큰 재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주 병치레를 했기때문에 공부에도 상당히 소홀했었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 여러가지 행사, 사건들에 별다른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생활에 변화를 갖고 바쁜 삶을 살아야겠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3년 밖에 남지 않았다.

인내심을 갖자: 장원석
우리 학년의 공부형태는 크게 세가지 형태 나누어 지는 것 같다. 학과 시간표에 맞추어 공부해 나가는 형태와 학과 시간표와 상관없이 자기주관에 따라 공부하는 형태와 공부에는 관심없이 학년을 올라가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있는 형태이다. 결코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한의학에 관심과 애정을 갖지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년동안 서양의 과학을 공부해 왔고 더구나 주입식교육을 받아온 우리에게는 분명히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한문보다는 영어에 더 익숙한 우리다. 우리가 지금의 현실에서 가장 빨리 한이학이론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은 한학을 공부하여 원전을 옛날 선비가 자유로이 읽을 수 있는 것 같은 실력을 기른는 것이다.하지만 우리 학우중에 과연 몇이나 원전에 자신을 갖고 있는가? 물론 나 자신이 원전실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보통의 한의학도의 입장으로는 원전은 하나의 큰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해석판을 보더라도 문맥상 어색한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어서 번역한 이가 저자의 뜻을 잘 반영하고 있는가하는 점도 난관에 부딪히는 문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의학서를 모두 우리것화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작업은 배움의 효율성을 높이는 가장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어느 누가 원전을 읽는 것이 국역판을 읽는 것보다 빠르겠는가? 생리병리에 나오는 고루한 언어문자를 모두 현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본초나 생리를 공부하다 보면 어려운 문자로 기록된 것들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도 과감히 북한처럼 우리의 쉬운말로 고쳐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그 어려운 글자를 우리가 원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그 의미가 희석될 수도 있지만 그 시간의 효율성을 생각해보면 누구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양방과목 즉 면역학, 미생물 이 두과목은 한의사라는 것보다 의사라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실존체로서 반드시 상식적으로 알아 둘 필요가 있는 과목이다. 하지만 이 과목은 한의사가 알아야 할 부수적인 것이지 소위 이것으로 밥을 먹지는 않는다. 가뜩이나 본초나 의사학이란 중요한 과목들이 학생들을 채찍질하고 있는데 미생물과 면역학이 우리에게 가하는 부담은 너무 큰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면역학은 반드시 공부해볼만한 가치있는 학문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예과학년들에게 양방과목에 대한 이질감과 거부감을 없애달라구 말하고 싶다. 어차피 의사라면 현대속에 살아간다면 서양의학의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후회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의대 6년의 생활 중에서 거의 반이 흘렀다. 3년이란 세월동안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때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허탈해진다.
이제까지 우리는 기초이론과목을 배웠다. 이것은 아직 시작의 단계라는 증거이다. 남은 시간은 3년의 시간이다. 지나간 3년의 세월을 아쉬워 하기보다는 남은 3년의 세월을 희망으로써 맞이하고 싶다. 우리의 한의학을 긴 안목으로 바라보는 인내심을 갖자.
'그림설명'
(원광대학이 자랑하는 대학박물관. 백제권 민속문화자료가 풍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