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4일 월요일

한의학과 몸-출처불명

한의학의 몸
- 󰡔황제내경󰡕의 몸에 대한 이해

왜 몸이 문제인가

사람에게 몸이 문제로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라는 것은 항상 현실적인 근거를 갖는다. 현실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과의 연관을 갖지 않는 문제는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은 그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실천적인 욕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욕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곧 현실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내가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실천했는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바로 그 속에 이미 문제의 해결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몸에 대해 문제를 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 번째로 생물학적인 측면이다.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몸이 있어야 한다. 이런 생물학적인 조건이 갖춰져야 문제가 나올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는 사회적 측면이다. 사회관계가 배제된 채 생물학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처럼 말구유에서 태어나거나 귀족으로서 은 스푼을 입에 물고 태어난다는 말은, 갓 태어난 생물학적인 존재가 이미 벗어 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사회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의학은 사람의 몸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것도 생물학적인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학문이다. 따라서 한의학에서 몸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주로 병과 무병장수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물론 한의학에 몸을 둘러싼 환경, 곧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자칫 세상을 얻어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건강 지상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이런 측면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한의학, 부분적인 것이 되겠지만 특히 󰡔황제내경󰡕(이하 󰡔내경󰡕으로 줄임)을 중심으로 한의학에서의 몸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는 하나의 거울로 삼고 싶다.

사람이 꽃보다 귀하다

󰡔내경󰡕에서 사람이 꽃보다 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은 모든 것을 덮고 있고 땅은 그 위에 모든 것을 싣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태어나서 네 계절의 법칙을 본받아 삶을 이루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지위가 높든 낮든 모두가 몸을 온전히 하고자 한다. 그리고 ‘살림’(生)을 좋아하고 ‘죽임’(死)을 싫어하여 몸을 온전히 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여기에는 매우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먼저 자연에 대한 이해이다.
사람은 땅 위에서 태어나지만 자신의 명命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과 땅이 그 기를 합하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다. 하늘이 내게 있는 것이 덕이며 땅이 내게 있는 것은 기다. 덕이 아래로 흘러 기와 서로 작용하여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낳는 것이다. 인간의 인위적인 작용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다. 의식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인간에 대對한 것, 인간의 외부에 실체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연이 아니다. 하늘과 땅은 모든 것(만물)을 덮고 싣고 있을 뿐이며 그 안에 모든 것이 있고 그 중의 하나가 사람일뿐이다. 따라서 이때의 사람이나 사람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서로가 대상적인 것이 아니다. 시각으로 본다면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우주라면 사람이 소우주라고 하는 말은 바로 이런 관계를 전제로 한다. 우주가 기라고 한다면 사람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기이다. 이러한 기의 일체성이 바로 사람이 소우주라는 말의 첫 번째 전제이지만 이 일체성은 서로 의식적으로 구분되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각 대상들의 일체성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은 다만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장자가 똥과 같이 하찮은 것에도 도가 있다고 할 때의 의미도 바로 이런 의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기로 이루어진 것이며 다만 이런 기의 운동에 따라 이런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전제가 없이는 한의학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각각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한다면 역시 한의학은 존재할 수 없다.

몸은 음양의 변화를 본받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 중에서 사람은 가장 귀한 존재이다. 그것은 사람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의 기로 태어난 것이지만 사람은 네 계절의 법칙을 본받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늘과 땅을 부모로 삼으며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하늘의 자식이라고 한다. 하늘에는 음양이 있고 열두 달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팔 다리와 같은 열두 마디(혹은 열두 경맥)가 있다. 하늘에는 찬 기운과 더운 기운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허실이 있다. 하늘과 땅의 변화를 쫓을 수 있다면 네 계절의 규율을 벗어나지 않으며 열두 마디의 이치를 안다면 성인일지라도 그를 업신여길 수 없다. 기를 음과 양이라는 두 범주의 운동으로 파악한다면 음양의 성쇠에 따라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에 맞추어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귀한 것이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음양은 하늘과 땅의 법칙이다. 모든 것이 작용하는 크고 작은 원칙이며 모든 변화의 근원이며 살리고 죽이는 근원이다. 하늘도 양이 쌓여서 된 것이며 땅도 음이 쌓여서 된 것이다. 음양의 변화야말로 하늘과 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음양의 변화에 그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맞추어 살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 존재가 귀한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네 계절로 표현되는 음양의 변화를 본받아 삶을 이루어가기 때문이다. 동물이나 식물도 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 변화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성인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교화가 필요하다. 성인의 교화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음양이 그 가르침이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음양은 추상적인 원리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양생의 법칙, 곧 도이다. 이러한 도의 개념은 󰡔내경󰡕이 많은 점에서 󰡔노자󰡕와 닮았지만 다른 점을 보이는 측면이다. 노자의 도는 어떤 상태나 형상이 아니다.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상象과 물物과 정精과 신信이 들어 있다(제21장). 감각되지는 않지만 만물 생성의 근원으로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내경󰡕의 도는 음양의 도이며 이 음양은 자연과 인간의 몸을 모두 아우르는 운동 법칙이다. 양생을 위해 본받고 거기에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사회 규범으로서의 내용은 갖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초월적 관념으로 설정되어 있지도 않다. 도는 자연의 이치이며 그 구체적인 표현은 음양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술수術數이다. 만물 생성의 근원으로서의 도이면서도 실제 실천에 곧바로 쓰이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내경󰡕을 통해 도가 초월적인 어떤 것, 이념적인 것으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왕빙의 해석처럼 도를 얻은 것(道德)은 곧 온전한 몸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 덕(德)이란 도(彳)를 바른(直) 마음(心)으로 행해서 얻음(得)이 있는 것이다. 온전히 얻었으므로 건강하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인이 아랫사람을 교화할 때는 아주 간단하게, 모두 나쁜 기운과 병을 일으키는 바람을 피하는데 때를 맞춰 피하라 하였고, 고요하고 소박한 심정으로 마음을 비우면(恬憺虛無) 진기가 생겨날 것이며 그러면 정精과 신神이 안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은 기후와 같은 자연의 변화를 때에 맞춰 피하는 것이지 그것을 막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병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에 대해 그것을 대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비바람을 피하는데는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나 언덕 위의 하얀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음양의 변화하는 때를 잘 알고 거기에 맞춰 피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피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내경󰡕의 여기 저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물 흐르는 대로 내 마음도 흐를 수 있다면

뜻을 한가롭게 하여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안정하여 두려움이 없고 일을 하되 피곤하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기가 잘 돌아서 각자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그 모두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욕심을 줄인다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 끝없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이 욕망은 물론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람이 자연이나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내 마음만 다잡으면 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내경󰡕에서의 마음 다스리기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초점이 모아져 있다. 곧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자기가 먹는 음식을 달게 여기며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자기가 사는 곳의 풍습을 좋아하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서로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백성들을 소박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욕심으로 그 눈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며 음란하고 나쁜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게 되며 미련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모두 외부의 사물에 구애받지 않으니 도에 딱 들어맞게 된다. 이렇게 할 때 병이 생기지 않고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무병장수에 대한 욕구는 인지상정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어쩔 수 없는 바램이다.
이렇게 보면 󰡔내경󰡕에서의 몸은, 자연과 구분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적 실체가 아니라 자연과 하나된 존재이다. 이러한 주객의 통일을 전제로 기를 매개로 하여 자연과 일체화된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켜나가는 존재이며 자신의 몸을 온전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병 혹은 요절이라는 것은 바이러스와 같은 어떤 대상적 존재가 내 몸을 망가뜨린 결과가 아니라 음양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다.

병이 들기 전에 병을 고친다

병이 외부의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병들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양생의 법칙을 지키는 것이며 그 결과 몸이 튼튼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경󰡕에서는 병들기 전에 병을 고친다는 표현이 있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음양과 네 계절로 대표되는 이 변화의 법칙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며 죽음과 삶의 근본이다. 이를 거스르면 온갖 나쁜 일이 생기고 거기에 따르면 나쁜 병이 생기지 않으니 이런 상태를 도를 얻었다고 한다. 도라는 것은 성인은 실천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노리개 정도로 여긴다. 음양의 법칙에 따르면 살고 거스르면 죽는다. 따르면 다스려지고 거스르면 어지럽다. 성인은 병들고 난 뒤에 치료하지 않고 병이 들기 전에 치료한다. 난리가 난 뒤에 다스리려 하지 않고 난리가 나기 전에 다스린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병이 이미 들고 난 뒤에 약을 쓰면 난리가 난 뒤에 다스리려는 것과 같으니 이는 마치 목이 마른 뒤에야 우물을 파고 전쟁이 난 뒤에야 무기를 만드는 것과 같으니 이 얼마나 때에 늦은 것인가.
병들기 전에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병을 미리 ‘예방豫防’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방’이란 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것의 진행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내경󰡕의 예방은 백신을 맞는다든지 방역을 하여 면역을 높이고 외인을 없애는 방법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병을 막거나 정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리 피하는 것이다. 특정한 어떤 병원균을 막는 것이 아니고 그런 병원균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피하는 것이다. 또한 특정한 병원균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전반적인 내 몸의 기운을 강하게 하여 병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며 침범하더라도 깊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대표적으로 네 계절로 표현되는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경󰡕에는 서양 근대의학에서 말하는 예방의학이 없다.

때에 따라 변화하는 몸

사람이 네 계절의 변화를 본받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은 사람의 몸도 음양의 시간적 변화 속에 일체화되어 있으므로 그런 변화에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말을 한다. 이런 말의 뒤에는 시간은 마치 시계가 규칙적으로 작동하듯이 균질적으로 흐르며(절대 시간) 사람의 몸도 균질적으로 움직인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누구나 경험하듯이 밤과 낮의 몸은 그 상태가 다르다. 다시 말하여 객관적인 시간은 균질적으로 흐를지 모르지만 몸에 있어서의 시간은 균질적이지 않다. 시간이 음양의 운동과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몸의 시간 역시 음양의 운동과 변화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는 날(日) 혹은 계절, 해(年)를 두고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내경󰡕에서는 무조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음양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봄과 겨울의 예를 보자.

봄은 모든 것이 새롭게 발생하는 때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생겨나 만물이 싱싱하다. 봄에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한가로이 뜰을 거닐고 머리나 옷을 느슨하게 하고 마음속에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자꾸 생겨나게 하라. 다른 생물을 살리되 죽이지 말고 남에게 베풀되 빼앗지 말며 남을 칭찬하되 벌주지 말아라. 이것이 봄의 기운에 따라 발생(生)을 기르는 양생의 도이다. 이에 거스르게 되면 간(肝)을 상하여 여름이 되면 찬 기운으로 인한 병이 생기니 더운 여름의 자라는(長) 도를 맞이하기에 부족하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겨울은 가두어 깊이 간직해두는 때이다. 물이 얼고 땅이 갈라진다. 양기를 불필요하게 요동시키지 말아라. 겨울에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야 한다. 일어날 때는 해가 높이 뜨기를 기다리며, 마음속에 무언가 감춘 듯 밖으로 드러내지 말고, 이미 귀중한 것을 얻은 것처럼 하며, 추운 기를 없애고 따뜻하게 하라. 다만 너무 덥게 하여 필요 없는 땀을 흘려서 양기를 빼앗기지 않게 한다. 이것이 겨울의 기에 따라 갈무리하는 것(藏)을 기르는 도이니 이에 거스르면 신(腎)을 상하여 봄이 되면 손발이 무력해지고 차게 되는 병에 걸리니 봄의 자라나는 기(生)를 받들기에 부족하다.

󰡔내경󰡕에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할 때는 가을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봄과 여름에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겨울에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야 한다. 이는 사람의 몸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기의 흐름, 곧 음양의 변화에 맞추지 않는다면 내 몸의 음양은 그 조화가 깨질 수밖에 없다. 외부의 기와 감응感應하지 못할 때 내 몸은 병들게 된다. 이런 예는 계절만이 아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해당하는 노년에는 아침 햇살과 같은 아이들과 자주 어울리는 것이 마땅하다. 음양의 변화에 맞추어 내게 부족한 것은 채우고 넘치는 것은 덜어내는 것이 음양의 도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는 절대적인 시간은 없게 된다. 빠름과 느림은 절대적인 시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변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변화는 몸이 자연에 대해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로 일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변적인 시간은 사람의 몸이 하늘을 본뜬 것이기 때문이다. 󰡔내경󰡕에서의 시간은 어디까지나 몸 안에서의 시간이다.

몸이 한숨을 쉬는 이유

사람의 몸이 소우주라는 것은 몸이 우주의 일부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하나의 기라는 점에서는 우주의 일부이지만 몸은 우주의 운동을 본받기 때문에 소우주가 된다. 이런 관점은 한숨을 쉬는 이유에 대한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소문󰡕 「평인기상론平人氣象論」에서는 사람이 한숨을 쉬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이 한번 숨을 내쉴 때 맥은 두 번 뛴다. 다시 숨을 들이 쉴 때 맥은 또 두 번 뛴다. 내쉬고 들이쉬며 숨을 잠시 쉬는 사이에 맥이 모두 다섯 번 뛴다. [숨과 맥이 똑 고르게 맞지 않는 그] 자투리를 모아 크게 한숨을 쉰다. 이런 사람을 평인이라고 한다.

평인은 병이 걸리지 않는 건강한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이 숨을 쉴 때는 호呼와 흡吸, 흡과 호 사이의 길이가 같지 않아서 호와 흡 사이가 더 길다. 그런데 맥은 그 사이에 다섯 번을 뛰므로 호흡과 맥의 박동이 서로 어긋날 수 있다. 마치 일년의 길이가 한 달을 30일로 했을 때 360일로 모자라서 윤달을 두는 것처럼 숨도 자투리를 모아 한숨을 쉬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경󰡕에서 말하는 ‘평인’이 하늘의 ‘기’를 본뜬(‘상象’) 것이며 몸이 소우주라는 의미이다.

상관적 사고인가 감응적 사고인가

이렇게 본다면 몸만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은 하나의 기가 음양의 운동에 따라 변화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분류될 수 있다. 󰡔내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북쪽의 기는 찬 기운을 낳고 찬 기운은 물을 낳고 물은 짠맛을 낳고 찬 맛은 신장을 낳고 신장은 골수를 낳고 골수는 간을 낳는다. 신장의 기는 귀의 기능을 주관하는데, 하늘에서는 찬 기운이 되고 땅에서는 물이 되고 몸에서는 뼈가 되며 장부에서는 신장이 된다. 색에서는 검은 색이 되며 가락에서는 우羽가 되고 소리에서는 신음소리가 되며 병적인 변화에서는 벌벌 떠는 것이 되고 감각 기관에서는 귀가 되며 맛에서는 짠맛이 되고 정서에서는 두려움이 된다. 두려움은 신장을 상하게 하는데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두려움을 이긴다. 찬 기운은 혈을 상하는데 마른 기운이 찬 기운을 이긴다. 짠맛은 혈을 상하는데 단맛이 짠맛을 이긴다.

여기에서 ‘낳는다’는 말은 ‘살린다’는 말이다. 어떤 기운이 다른 기운을 살려주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이들이 같은 기이기 때문이다. 신장이 뼈도 되고 검은 색도 되고 신음소리도 되는 것은 신장 자체가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장의 기나 뼈의 기, 검은 색의 기가 결국은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서로 상감相感하여 살려 준다는 의미이다. 이는 서로 대상적인 존재로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일정한 구조적 연관 관계가 있어서 서로 작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기로서 서로 감응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구조의 동일성이 아니라 기의 동일성이다.

감정의 신체화

이렇게 볼 때 인간의 감정 혹은 정서가 몸의 특정 부위와 바로 연관된다는 󰡔내경󰡕의 사고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화내는 것(怒)은 간, 기쁜 것(喜)은 심心, 골몰히 생각하는 것, 혹은 바라는 것(思)은 비脾, 근심하는 것(憂)은 폐, 두려워하는 것(恐)은 신腎과 각각 연관된다. 이는 마치 하늘에 네 계절이 있고 오행이 있어서 태어나고 자라고 거두어들이고 갈무리하며 춥고 덥고 마르고 습한 기운과 바람을 낳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다섯 장기가 있어서 다섯 가지 기를 만듦으로써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근심하고 두려운 정서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를 많이 내면 간이 나빠지고 반대로 간이 나빠지면 화를 잘 내게 된다. 이는 화내는 정서가 간의 기와 같기 때문이다. 화내는 정서는 간만이 아니라 다시 근육(정확히는 인대), 혈血, 눈(目) 등과 다 감응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 천천히 걸으면 근육이 풀어지게 되고 따라서 화난 정서도 풀어지게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연관은 몸만이 아니라 자연계의 모든 것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원리에 따라 약을 쓰는 것이다.

외인으로서의 바람

앞에서 몸이 병드는 것은 음양의 변화에 맞추지 못했거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의학에도 당연히 외인이 있다. 다시 말하면 외부의 어떤 것이 몸을 침범하여 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인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바람이다.
󰡔내경󰡕에서는 바람이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외인은 주체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경󰡕에서 이것이 병으로 발전하는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몸에 달려 있다. 곧 외인은 내인을 통해서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
󰡔영추󰡕에서 황제는 소사에게 기후도 알맞고 외인이 침범하는 주된 통로인 땀구멍(주리腠理)이 열리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병이 드는 경우를 물어보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은 땀구멍이 열리는 데에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해나 달과 상응하여 달이 차면 밀물이 되는 것처럼 혈기가 왕성하고 피부도 치밀해져서 이럴 때 외인(바람)이 침범하더라도 병이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반대로 달이 이지러지면 혈기가 허해져서 땀구멍이 열리고 이때 외인이 침범하게 되면 몸 깊이 들어가 병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몸 자체의 정기가 얼마나 강한가 여부도 병이 드는 것에 관여한다. 이런 내인 중심적 사고는 󰡔상한론󰡕에서는 또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지만 󰡔상한론󰡕에서도 역시 외인 자체의 분석이 아니라 몸 안에 들어온 외인이 몸 안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몸 안에 어떤 바이러스가 들어왔는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바이러스가 어떤 몸의 변화를 일으키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이는 외인이, 이를테면 바람인지 찬 기운인지 습한 기운인지, 어떤 기인지를 파악하면 되는 것이지 바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기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바로 몸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병적인 변화이다. 이 병적 변화는 또한 몸의 내부적 상태, 조건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 덩어리인 몸

󰡔내경󰡕에서 정상적인 기의 운행과 병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주요 통로는 경락이다. 그러나 강물이 흐르는 큰 길이 따로 있지만(이것이 수로다) 땅 속 어디에도 물(물기)이 있듯이, 몸을 흐르는 기의 큰길은 있지만 몸 전체에 기는 스며들어 있다. 아니 몸 전체가 하나의 기 덩어리이다. 다만 그 큰 줄기가 경락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경락이 수로에 비유된 것은 여러 의미에서 적절하게 보인다. 크게 열두 줄기가 있지만 거기에는 다시 작은 갈래가 있으며 이것들이 다시 서로 얽히고 설켜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몸 안을 흐르는 기의 운행과 유사하다. 다른 하나는 이 수로가 폐쇄된 것이 아니라 외부, 하늘과 열린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도 기의 운동을 잘 비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로가 내부로, 다시 말하자면 땅속으로도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은 기의 운동을 상징하는 비유로서 적절하다. 마치 수로처럼 경락은 몸 전체를 얽어놓고 있으면서 내외로 열린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경락은 열두 개의 큰 경맥(십이정경十二正經)만이 아니라 기경팔맥奇經八脈, 경별經別, 락맥絡脈, 경근經筋 나아가 경피經皮(체표 부분)에 이르는 복잡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오장육부라고 할 때의 장기들도 사실은 마치 물이 흐르다 작은 연못이나 호수를 만들듯이 기가 흘러가는 한 지점에 불과하다. 경락은 물이 흘러가듯 정상적이건 병적이건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통로인 셈이고 장부는 그런 변화들이 중점적으로 나타나는 곳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을 유지하는 한 󰡔내경󰡕에서 실질 장기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고대에 수많은 해부 경험이 있었겠지만 그러한 경험을 거의 의학 이론에 반영하지 않은 것은 󰡔내경󰡕에서 보려고 한 것은 장기 자체가 아니라 각 장기가 갖는 기적氣的인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각각의 장기가 몸의 다른 부분과 갖는 경락적인 연관성 속에서 다섯 가지 기를 만드는 것으로서의 장기라는 개념이 바로 내경의학內經醫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경󰡕의 몸에 대한 인식은 17세기까지 의연히 이어져 왔으며 이후 도입되는 서양 의학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 그 근간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서양 의학의 분류학 - 주객의 분리

서양의 의학은 18세기 이전까지는 주로 임상적인 상태에 따라 질병을 분류했다. 이는 한의학적인 방법과 비슷하다. 다만 차이는 한의학이 음양이라는 원칙에 따라 허실, 한열, 표리 등의 분류를 해 나간 반면 서양에서는 그런 원칙이 없이 특정한 증후군으로 나열했다는 차이가 있다. 서양의 경우, 19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해부학이 대두되고 이에 따라 병을 해부학적으로 분류하고 19세기 후반에는 생리학적인 기능 장애를 중심으로 보기 시작한다. 위궤양이나 디스크라는 병명은 해부학적인 분류에 따른 것이고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나 당뇨, 고혈압은 생리학적인 기능장애에 따른 분류이다. 20세기 초반으로 들어오면서 병은 세균과 같은 감염원에 의해 분류되기 시작한다. 결핵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현재는 면역학적인 분류가 시도되고 있다(에이즈가 이러한 최초의 분류이다). 이런 분류, 곧 병을 보는 눈의 변화는 서양 과학의 변화와 일치한다. 서양 과학이 발전하면서 어떤 학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따라 서양 의학의 관점도 변화를 가져온 셈이다. 이런 흐름의 밑에는 주체와 대상이 되는 객체의 구분이라는 큰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의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 객체나 주체의 어떤 측면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방법이 결정되어 온 것이다.
이에 비해 한의학에서는 서양과 같은 의미에서의 주객 분리는 없다. 주체나 객체나 다 같은 원리에 의해 움직이며 이는 음양 나아가 오행에 의해 설명 가능한 것이므로 어떤 바이러스가 들어왔는지, 어떤 해부학적인 부위에 병이 생겼는지, 인체의 자기 조절 기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서양 의학에서는 새로운 관점에 따라 항상 새로운 병이 생기고 새로운 병균에 의해 새로운 병이 생기지만 한의학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서양 의학에서는 새로운 검사 기계가 도입되면 새로운 병이 생긴다. 심하게는 정상인을 ‘충분히 조사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보는 서양 의학자도 있다. 시대에 따라 병은 분명히 바뀐다. 그러나 병의 근본 원인을 음양의 부조화로 보는 한 다양한 병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음양을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의학에서는 에이즈와 같은 어떠한 새로운 병이 나타나더라도 이를 음양으로 나누고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있다는 원리가 성립된다. 그렇다고 모든 병이 실제 치료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의학과 의술에는 서로 간에 일정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의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인간과 분리된 어떤 외부의 물질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초래된 내 몸의 상태다. 그러므로 내 몸의 정기신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이를 잘 지키려면 외부와 잘 조화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도교에서는 정기신을 세 가지 보물로 생각하여 이를 잘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동의보감󰡕도 제일권의 첫 머리에 이 정기신을 먼저 서술하여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마치면서

󰡔내경󰡕에서는 몸을 소우주로 보고 있다. 그 의미는 위에서 본대로 주객의 혼연한 일체화이다. 그러나 이런 일체화는 주객이 분리된 다음 다시 즉자 대자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다. 주객의 분리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체성이다. 물론 개별적인 물物에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바로 음양의 차이이며 이러한 차이는 오행으로 분류되어 인식된다.
이러한 󰡔내경󰡕의 사고 방식은 19세기까지 의학은 물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온 것이었으나 오늘날 이런 사고 방식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관점에서 단발령을 거부했던 것이 한 세기가 채 안 되는 과거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병이든 먼저 속을 들여다 보려하고 주사를 맞아야 하고 수술을 해야 하는 것으로 병과 몸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포경 수술율 세계 1위라는 현실은 󰡔내경󰡕의 몸에 대한 생각이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경󰡕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회구조가 오늘날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경󰡕을 읽고 있는 것은 󰡔내경󰡕의 세계를 다시 재현하여 그것을 우리 사회에 일반화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韓’의학이 모두 󰡔내경󰡕의 관점과 방법론에 기초한 것도 아니다. 또한 한의학이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주요한 분과로 떠오른 것은 주로 한의학이 갖는 기술적 측면이 초래하는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가 기여한 측면이 강하다. 물론 일부에서 한의학의 철학적 내용을 연구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오늘날 서양의 근대 과학, 나아가 근대 시민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모순을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도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모색이 바로 그런 시도이다. 분명히 󰡔내경󰡕의 세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러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보고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의 근거가 없이는 유토피아에 그치고 만다. 일정하게 변용된 형태일 수밖에 없겠지만 󰡔내경󰡕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는 그것을 실현할 주체의 형성과 그런 주체에 의해 그려지는 새로운 사회의 구상이 결합될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면서 새로운 의학 이론과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이 모색된다면 우리가 읽는 󰡔내경󰡕은 그제야 제 빛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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