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3일 월요일

후주 황불사 보탑의 불과 화상흉터

후주 황불사 보탑의 불과 화상흉터


왕의 기운이 서려 있어도 후주 진숙보의 마음이 변하지만은 않았다. 전당현에는 오래도록 잡초로 덮였던 임평호가 잡초를 쳐내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열리자 백성들은 이렇게 말했다. “호수가 열리니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이 말을 들은 진후주는 마음이 심란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천하를 태평하게 할 인물이 아님을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소문대로라면 자신이 태평 천하의 뒤안길로 사라질 확률이 높았다. 후주는 기발한 생각을 하나 해냈다. 전 왕조인 양무제 소연처럼 자신을 절에 노비로 팔아 화를 피해보려 한 것이다. 부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건강성 안에 皇佛寺황불사를 짓고 7층보탑을 세우기로 했다. 보탑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불이 났고 그 불이 크게 번져 백성에게 화가 미쳤다. 탑의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상주에서 나무를 가져오는데 목재를 실은 배가 막 우저기에 다다랐을 때 그만 침몰하고 말았다.
色狂暴색광폭 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황제들의 기행, 천란 엮음, 정영선 옮김, 시그마 북스, 페이지 198
 
양 무제(梁 武帝, 464~ 549)는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520년에 무제는 연호를 바꿨는데, 그 이후부터 차츰 정치를 방기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무제 자신이 귀의한 불교 교단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면서 불교에 차츰 빠져들었고, 결국 527년 이후부터는 황제 자신이 지은 동태사(同泰寺)에 사신(捨身)이라는 이름으로 막대한 재물을 보시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양의 재정은 궁핍해졌고 과거 남제 말기 소보권 시절에 민중에게 행했던 가혹한 수탈과 착취가 재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한문(寒門) 출신으로 대표되는 주이(朱异) 등을 중용하면서 관료 체계에서의 기강도 해이해지기에 이르렀다.
양무제의 불교 신앙은 표면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무제 자신이 불교 경전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를 집필하였다. 또한 황제 자신도 불교의 계율을 따르며 소식(蔬食)하기를 견지했기에, 당시에는 황제를 가리켜 황제보살(皇帝菩薩)로 부를 정도였다. 이는 당시 국가불교로서의 색채가 농후했던 북조에서 사용하던 황제즉여래(皇帝即如来)에 대비되어 남조의 불교를 상징하는 칭호로서 평가되고 있다. 후경의 난으로 유폐된 상태에서 식사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울분 속에 병이 든 황제는 마지막으로 꿀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못한 채, 실의와 쇠약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 결국 불교 공부와 막대한 보시를 했지만 양무제의 말년은 매우 비참하게 되어 북송의 역사가 사마광은 자신의 자치통감에서 무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양 고조(무제)가 마지막 자리를 보전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드는 조식(소식)을 성덕으로 하면서 군주로서의 도가 이미 갖춰지니 더 이상 더해질 것이 없어 군신의 간언은 어떤 것도 들을 필요 없다고 하였다.() 이름을 더럽히고 몸은 위험에 빠졌으며 나라는 뒤집히고 종묘의 제사가 끊어지니 길이 후세의 놀림거리만 되고 말았도다. 슬픈 일이다.”
 
아무튼 위 내용에 불이 난 것을 재앙으로 보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불로 화상을 입는 경우 길이 아니라 흉으로 보는데 화상으로 불에 데인 부위를 화상 흉터라고 말한다. 이런 불로 기인한 화상흉터는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의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