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의 배 루쭈와 호루스의 눈 쌍꺼풀 앞트임 흉터치료
성 요한의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주권 구호기사수도회(聖 요한의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主權 救護騎士修道會, 이탈리아어: Sovrano Militare Ordine Ospedaliero di San Giovanni di Gerusalemme di Rodi e di Malta)은 1080년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예루살렘에 세워진 아말피 병원에서 시작된 기사수도회의 이름이다. 지역에 따라 병원 기사단(病院 騎士團), 구호 기사단(救護 騎士團), 로도스 기사단(로도스 騎士團), 성 요한 기사단(聖 요한 騎士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 정복(1099년)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군사적인 성격을 띤 기사단으로 성지와 순례자들의 보호를 위한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세력이 축출된 이후에 기사단은 로도스 섬으로 근거지를 옮겼으며, 1522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로도스 섬에서 쫓겨나서는 다시 스페인 관할의 몰타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몰타 섬에 자리잡고 주권까지 있는 나라였지만 178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끈 프랑스군에게 정복당했다. 그러나 몰타 기사단은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 현재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존재하고 있으며, 영토를 제외하고 독자적인 헌법과 법원 등 독립국으로서 갖춰야 할 대부분의 요소들을 갖추고, 현재까지 국제법 상 주체로 인정받는 경향이 있다.
로도스 섬에서 추방당한 이후 기사단은 서유럽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기사단에게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을 대신 소탕하게 할 목적으로 몰타에 근거지를 마련해 주었다. 지중해의 강자였던 몰타 기사단은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집트 원정길에 오른 나폴레옹은 몰타에 항구와 보급의 제공을 요구하고 위협을 가해왔다. 같은 그리스도인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규정한 기사단의 규율 때문에 당시 기사단장이었던 페르디난트 폰 홈페쉬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기사단은 다시 유럽을 떠돌면서 유럽 각국에 의탁했는데 특히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19세기초에 기사단은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결국 1834년 로마에 정착하였다. 이때부터는 군사적인 측면은 거의 사라지고 인도주의적·종교적 조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1986년 몰타 공화국에서 주권을 인정하면서 영토의 일부를 넘겨주겠다고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이탈리아와 남아메리카 전 지역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들뿐만 아니라 이집트, 아프가니스탄, 타이 등 비기독교 국가들도 몰타 기사단을 나라로 인정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 퍼져있는 단원들이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외교 사절, 자국 등록 선박, 자체 자동차 번호판 등을 갖고 있고, 우편 협정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나라들에서만 통용되는 우표도 발행함으로써 영토 없는 국가로 불리기도 한다.
세계테마기행-지중해의 푸른 전설, 몰타<제 1부. 중세 성채 도시를 거닐다, 발레타>가 2016년 5월 30일 오후 9시에 방영했다.
몰타(Malta)'에서의 첫 여정은 ’열린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발 닿는 곳마다 유적지로 가득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 '발레타(Valletta)'에서 시작한다.
발레타에서 전망대로 유명한 '어퍼 바라카 가든(Upper Barrakka Garden)'은 지중해와 어우러지는 몰타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몰타의 360여 개 성당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성 요한 대성당(St. John's Co-Cathedral)'에 들어서면 수수한 외관과 달리 내부의 화려한 도금빛 향연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천장에는 성 요한의 일생을 생생하게 표현한 '마티아 프레티(Mattia Preti)'의 그림이 펼쳐져 있고 바닥 전체를 덮은 400여 개의 대리석 무덤에는 옛 기사들이 잠들어있다.
성당 깊숙한 곳에서는 초기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카라바조(Caravaggio)’의 유일한 서명이 담긴 작품 ‘세례 요한의 참수’까지 감상할 수 있다.
몰타 섬 남동쪽에 위치한 ‘마샤슬록(Marsaxlokk)’은 작은 포구에 떠 있는 형형색색의 배인 ‘루쭈(Luzzu)'들이 시선을 끄는 곳이다.
조용한 어촌 마을이지만 일요일이 되면 지중해의 싱싱한 해산물로 유명한'선데이 마켓(Sunday Market)'이 열려 활기를 띠는 곳이다.
몰타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사단의 흔적을 쫓아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오스만 제국과의 혈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세인트 엘모 요새(Fort St. Elmo)’. 세인트 엘모 요새에서 우연히 만난 ‘인 구아디아 퍼레이드(In Guardia Parade)’는 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요새 수비대를 결성하고 실제 군사 훈련을 잘하고 있는지대 집행관이 점검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당시의 제복을 갖춰 입고 칼과 창을 든 채 훈련에 임하는 모습에서 과거 몰타를 지켜냈던 기사들의 용맹함이 느껴진다. 시간을 알리기 위해 12시에 대포를 쏘고 크루즈나 외국 대통령이 오면 예포를 쏜다.
발레타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불꽃 경연대회 결승전’이 열린다고 해서 찾아간 그랜드 하버 지중해를 배경으로 밤을 수놓는 불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몰타 기사단은 1023년 이탈리아 아말피와 살레르노 출신의 상인들이 이집트 칼리프의 허가를 얻어 병원을 다시 세웠는데 그 병원은 세례자 요한의 묘지에 세워졌고 베네딕토회 수사들의 봉사로 성지 순례자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몰타의 전통배인 루쭈(Luzzu)에는 액운을 물리치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부적처럼 악마의 눈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호루스의 눈이다.
호루스의 눈(우제트, Wedjat, Wadjet, Udjat, Udjet)는 고대 이집트의 신격화된 파라오의 왕권을 보호하는 상징이다. 태양의 눈, 라의 눈 또는 달의 눈이라고도 불린다. 호루스의 눈은 건강과 총체적인 인식과 이해를 상징한다. 오른쪽 눈은 라의 눈으로 태양을 상징하고 왼쪽 눈은 토트의 눈으로 달을 상징한다. 파라오와 왕권을 지켜주는 상징 외에, 이집트 장례의식에서 미라가 착용하는 귀금속으로 사용되었으며, 근동지역에서는 뱃머리에 그려넣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호루스의 눈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호루스와 세트는 하마로 변해 강 밑바닥에서 누가 더 오래 버티나 겨루기로 했는데, 이시스 여신이 아들 호루스를 돕기 위해 세트를 작살로 찌른다. 세트는 눈물로 이시스에게 남매의 정을 호소하였고, 망설이던 이시스 여신은 작살을 뽑는다. 그러자 분노한 호루스는 어머니 이시스의 머리를 베어 산으로 들어가버렸고, 분노한 신들은 세트를 시켜 자던 호루스의 눈을 뽑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데, 이를 하토르(Hwthor)가 치료해준다. 사실은 후대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얘기라는 주장이 강하고 해서 지금은 이시스가 쓰고 있던 왕관을 땅에 쓰러트렸다고 묘사한다.
혹은 찢어진 눈 조각을 다시 주워 모았으나 각각 1/2, 1/4, 1/8, 1/16, 1/32, 1/64크기의 조각이라 다 합쳐도 63/64 밖에 되지 않아서 나머지 1/64를 지식의 신 토트가 채워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달의 힘이 들어갔다고 해서 달의 눈. 호루스의 눈을 부르는 다른 명칭이다. 특히 오른쪽 눈은 태양의 눈, 왼쪽 눈을 달의 눈이라고 부른다. 낮과 밤에 있는 천체들이라 그런지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이다. 이러한 연유로 호루스의 매의 눈을 본 딴 심볼과 악세사리는 악령을 막고 병을 치료한다 여겨져 이집트인들에게 사랑받았다.
호루스의 눈은 필자는 1달러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홀리 시[전시안wholly see= holy see聖座, Sancta Sedes]를 의미한다 추측하고 본다.
관상학에서도 눈이 얼굴의 50%를 차지하니 눈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며 사람의 정보입력도 거의 80~90%를 받아들인다. 그만큼 성형수술하면 눈의 성형수술을 많이 한다. 쌍꺼풀 수술이나 앞트임 수술, 뒤트임 수술등 그럼에 따라서 눈에 흉터도 많이 생기는데 이미지한의원은 쌍꺼풀이나 앞트임등 눈수술 흉터도 수술후 흉터침으로 치료하고 기타 코성형수술 흉터나 가슴 성형수술 흉터, 지방흡입 수술 흉터등도 흉터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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