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와 앤의 임신 출산후 튼살치료
헨리 8세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으며, 그의 궁정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학구적이며 예술적인 혁신의 중심지였다. 그는 뛰어난 음악가, 작가, 시인이었다. 그가 작곡한 것으로 여겨지는 악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합창곡 Pastime with Good Company 또는 The Kynges Ballade이다. 또한, 그는 욕심 많은 노름꾼이었으며 주사위 선수였다. 특히 그는 운동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무예와 마상 경기, 사냥, 테니스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신앙심이 투철하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를 비판한 《칠성사의 옹호》를 저술한 공로로 교황 레오 10세의 칭찬을 받아 ‘신앙의 옹호자(Defender of Faith)’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였다. 덧붙여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는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에게 대대로 물려받아 현재 영국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의 칭호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1511년 교황 율리오 2세가 프랑스에 반대하는 신성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새로운 동맹에는 수많은 나라가 신속히 참가하였는데,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까지 포함되었다. 헨리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진짜 이유는 프랑스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는 1511년 11월에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었으며 캉브레 동맹 전쟁에 말려들 경우를 대비하였다. 1513년, 헨리 8세는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잉글랜드군은 스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헨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루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잉글랜드를 침공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1513년 9월 9일에 플로덴필드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이때 전사한 스코틀랜드 병사 가운데는 스코틀랜드의 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1520년대 초 시녀였다가 가면무도회에서 본 앤 불린을 보고 그의 한 눈에 들게 되었다. 앤은 바로 임신하였고 이는 그로 하여금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헨리는 즉각 교황청에 사람을 보내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헨리는 여러번 바티칸에 구약성서의 형제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조항을 인용해 캐서린과의 결혼이 신의 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이 먹은 캐서린에게 실증이 났고, 자신의 아들을 낳아 준 적 없으며 나이 40세가 다 된 아내 캐서린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이고, 폐경을 염두에 둔 고려의 결과였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아라곤의 캐서린의 조카이자 강력한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봐 부담스러워했고, 바로 거절하였다. 앤의 임신과 동시에 아들이리라는 기대와 함께 앤과 결혼하겠다는 마음이 점차 굳어가면서 헨리는 '왕의 중대사'를 달성할 수 있는 법적인 방도를 3년간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헨리는 로마가 그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작정이라면,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와 분리하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1527년 5월에 그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선언하고 교황의 반대를 무릅쓰고 앤과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5월에 대주교 크랜머가 그의 첫 번째 결혼은 없었던 일이며 법적으로 무효이고, 성경을 근거로 해도 형제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으니 무효라고 선포했다. 바로 그해 5월 앤은 왕비로 대관식을 올렸다. 9월에 헨리에게 딸 엘리자베스를 낳아 주었다. 아들임을 기대했으나 딸이 태어나자 그는 실망하게 된다. 그 뒤로도 앤은 다른 아들을 낳았지만 요절하고 만다.
아라곤의 캐서린이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함과 더불어 헨리 8세의 조급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러던 중 1525년, 헨리 8세는 당시 캐서린 왕비의 젊은 시녀이자 한때 자신의 애인이었던 메리 불린의 언니인 앤 불린에게 눈독을 들여 그녀에 대한 소유욕을 갖게 되었다.
앤 불린은 예전의 메리 불린처럼 그늘의 왕비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을 유혹하려는 그의 시도에 저항하였다. 그녀의 매몰찬 거절을 받은 헨리 8세는 오히려 더욱 그녀에 끌리게 되면서 집요하게 그녀를 유혹하였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계속된 유혹에도 앤 불린은 계속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헨리 8세에게 혼인을 무효화시키라는 제안을 했을 것이며, 그것이 아들을 상속자로 삼고자 하는 헨리 8세의 소원에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라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있다.
과거 헨리 8세의 아버지인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잉글랜드 왕국은 왕위를 놓고 내전을 겪은 전례가 있었다(장미 전쟁). 그러한 일을 잘 알던 헨리 8세는 왕위 계승을 탄탄히 하고 싶어했다.
그와 캐서린 사이에는 딸 메리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얼마 못 가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1536년 헨리는 앤을 처형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모시던 시녀 제인 시무어를 총애하여 약혼하였으며, 10일 후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세 번째 결혼과 동시에 헨리는 웨일스를 잉글랜드에 합병시키는 문서에 승인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강력한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그 후 1536년 개정된 왕위계승법에 따라 제인이 낳은 헨리의 아이들이 일차적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지며, 메리와 엘리자베스 공주들은 서출로 선언되었다. 제인은 훗날 1537년에 에드워드 6세가 되는 에드워드 왕자를 낳았다. 출산은 위험했으며 제인은 출산 후유증으로 1537년 10월 24일 그리니치 궁전에서 죽고 만다. 제인의 죽음 후, 헨리와 전 왕실은 장기간 동안 애도하였다.
헨리는 제인만을 자신의 ‘참된’ 아내로 생각하였으며, 그 이유는 그녀만이 그에게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아 주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헨리 8세는 조선시대 양반가문처럼 아들에 대한 욕심이 과도했으며 이혼 때문에 성공회를 만드는 등 자식과 여자에 대한 욕망이 과도했다.
성군인 세종대왕도 소헌왕후 심씨로부터 8남2녀, 영빈 강씨한테서 1남, 신빈 김씨 6남, 혜빈 양씨 3남, 숙원 이씨 1녀, 상침 송씨 1녀, 그래서 세종대왕의 자녀수는 18남 4녀로 총 22명을 두었다. 그런데 여성은 출산할수록 계급장도 아닌데 튼살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산후에 생기는 배의 튼살과 가슴의 튼살은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으로 치료해 원래 피부 상태로 복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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