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일 월요일

조선의 중인이 만든 문화와 백패 백색튼살치료

조선의 중인이 만든 문화와 백패 백색튼살치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바로 중인이 꿈꾸던 시대
 
조선시대 신분 계층은 크게 양반과 평민 · 천민으로 나뉘지만, 실제로는 양반과 평민 사이에 중인이 있었다. 중인은 관자 그대로 중간 계층이다. 한양에서 실세 양반이 살던 북촌과 몰락한 양반이 살던 남산 사이의 중간 지역인 청계천 일대에 기술직 하위 관원이 많이 살았기에 중인이라고도 했지만, 거주 지역보다는 중간 계층이라는 신분상 의미가 더 크다. 실제로 역관이나 의원은 청계천 일대에 많이 살았지만, 하위 관원인 경아전이나 서리는 인왕산 기슭에 많이 살았다.
중인은 과거 시험을 치러 선발한 전문직 관원이다. 양반은 승진할 때마다 다른 관청으로 옮겼기에 직업의 전문성이 약했지만, 중인은 평생 한 직장, 한 분야에서만 근무했기에 전문성이 강했다. 왕의 치료를 책임진 내의원의 경우에도 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는 재상이 겸하고 부제조는 승지가 겸했지만, 이들은 자문 역할만 했을 뿐이지 실제로 치료는 의원이 맡았다.
조선시대 사대부도 문 · · (文史哲)을 겸비한 르네상스적 인물이지만, 한 해에도 몇 번씩 관청을 옮겨 다니다 보면 모든 실무에 능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해당 관청의 실무는 중인이 맡아 처리하였다. 관청 책임자는 중인의 실무 능력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중인 관원을 선발하는 과거는 잡과(雜科)라 하여 천시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역() · () · 음양(陰陽) · ()4과를 설치하고, 합격자에게는 진사 수준의 백패(白牌)를 주었다. 그러나 생원 · 진사 합격자에게 주는 백패에는 국보(國寶)를 찍었지만 잡과 합격자에게 주는 백패에는 예조인(禮曹印)만 찍어 기술직을 차별하였다.
잡과에도 채택되지 않은 과목은 예조에서 취재(取才)라는 형식으로 선발했는데, 의학 · 천문학 · 지리학 · 율학 · 산학 등을 전공한 기술관과 화원 · 악공 등의 예능인이 대상이었다. 중인은 그야말로 전방위 지식인이었다.
중인은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재산을 모은 사람이 꽤 있었다.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7년 동안 독서만 하며 생업을 돌보지 않았던 양반 허생에게 일만 냥을 빌려준 한양 최고의 부자 변씨도 중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돈만 아는 졸부가 아니라, 허생 같은 인재를 알아보고 큰 밑천을 대어 줄 정도로 경륜을 갖춘 인물이었다. 인왕산의 호걸 임준원도 한때 가난을 이기지 못해 내수사 서리로 취직하였지만, 큰 재산을 벌어들이자 곧 사임하고 가난한 중인들을 자기 집에 불러들여 문학모임인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이들이 있었기에 중인의 세력이 결집될 수 있었으며, 여러 대에 걸쳐 시사를 결성하여 문화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중인은 외국에 나가면 특히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했는데, 정사(正使)나 부사(副使)로 임명된 사대부는 대개 중국어를 하지 못해 중인 출신인 역관이 모든 대화를 통역하였다. 따라서 갑작스런 외교 현안이 생기면 역관의 수완에 따라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 파견했던 조선통신사의 경우에는 중인의 역할이 더욱 컸는데, 막부에서 요청하는 전문직이 별도로 있을 정도였다. 조선통신사는 글자 그대로 양국이 신의를 소통하는 기회였지만 국력을 기울인 문화 전쟁이기도 했다.
중인은 외국에 나가면 대접받으며 기량을 맘껏 펼칠 수 있었지만, 국내에 돌아오면 신분과 사회적인 차별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한 불만을 문학으로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문학동인 시사였고,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중인의 전기(傳記)를 편집하는 움직임도 다양하였다. 그러한 문화 운동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중인의 신분 상승을 인정하지 않자, 왕의 행차에 상소문을 올리려는 집단적인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처럼 중인은 사회 제도에 불만이 많았으므로 천주교가 들어오자 다른 계층보다 앞서서 신앙을 받아들였다. 신자와 지도층에서 중인의 비율은 박해가 심할수록 더 높아졌는데, 기득권을 가진 양반 신자가 조정의 교화 정책에 순응하여 신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천주교 신자 가운데는 평민이 많아 한문을 읽기 힘들었으므로 역관이 청나라에서 수입해 온 성경을 비롯한 천주교 교리들이 일찍이 한글로 번역되었다. 총회장으로 추대된 역관 최창현이 성경직해를 한글로 번역 · 보급한 것도 번역이 역관의 고유 업무였기에 가능했다. 19세기 말에 신교가 들어오면서 성경의 한글 번역이 본격화되었으니, 우리 국민의 문맹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이유는 중인의 종교 활동 덕분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서양과 일본 세력이 밀려 들어오자 중인은 양반보다 앞서 외국어를 배웠으며, 새로운 전문직으로 진출하였다. 통역이나 세관 직원, 측량기사는 물론 선교사의 서기로 취직한 이들도 대부분 중인이었다. 반면, 성리학으로 무장한 양반층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세워 구제도를 지키려고 애썼지만,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다.
문과 출신보다 각계의 전문가가 대접받는 지금이 어쩌면 중인이 꿈꾸던 시대였는지도 모르겠다. 의사 · 약사 · 변호사 · 동시통역사 · 공인회계사 등의 (, )’자 돌림 직업부터 화가 · 음악가 · 서예가 등의 예술가가 모두 조선시대에는 중인이 아니었던가.
조선의 문예부흥기였던 정조대왕 시대도 그 뒤안길에서 중인이 르네상스인으로 활동하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허경진 지음, 랜덤 하우스 코리아, 페이지 4-7 책 머리에
 
백패 [白牌]는 조선시대 소과(小科:生員進士)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증서이다.
소과는 15, 225, 370명으로 하여 모두 100명을 합격시켰는데, 시험 결과에 대한 전형(銓衡)이 끝나면 합격자의 성적순으로 써서 국왕에게 올리는 동시에 이를 발표[掛榜]하고, 길일(吉日)을 택하여 전정(殿庭)에서 방방의(放榜儀)라는 의식을 베풀었는데, 생원은 동편에 진사는 서편에 줄지어 서서 국왕에게 사배(四拜)를 올린 뒤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받았다. 백패는 흰 종이에 관명(官名) ·성명 ·과별(科別:생원 ·진사 ·잡과 등) 성적등급(成績等級)이 적혀 있는데, 이 백패는 잡과(雜科) ·이과(吏科)에 합격한 자에게도 주었으며, 대과(大科)에 합격하면 홍패(紅牌)를 주었다. (두산백과)
 
제사상에도 紅東白西홍동백서라는 유교 문헌에 근거하지 않는 원칙이 있는데 처음에는 백색패를 나중에는 홍색 패를 준것을 봐서 홍색이 백색보다 더 숭상받는 색임을 알수 있다. 그런데 튼살은 처음에는 염증단계인 홍색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백색으로 변화하는데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으로 등소평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말처럼 흰색 튼살이나 백색 튼살이나 다 치료가 된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