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4일 수요일

검투사 주치의 갈레노스와 수술후 흉터치료

검투사 주치의 갈레노스와 수술후 흉터치료


인문학의 코드로 의학을 읽는다! 동서양 문명의 탄생과 만남, 갈등의 역사 인간을 닮은, 인간을 담은 의학은 움직이고 변화한다. EBS201532()부터 4()까지 밤 950분 다큐프라임 <의학, 동과 서>를 방송한다. ‘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 의학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다.
3000년 전 존재했던 중국 상나라의 갑골문 속 질병의 기록을 시작으로, 현대의학의 중심 미국 M.D.앤더슨 병원의 통합의학과 미국 하버드-M.I.T 연계 마르티노스 영상의학센터의 침술연구까지 동서양 의학의 역사를 돌아본다. 의학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고찰한다. 거기서 갈레노스란 의사가 등장했는데 특이한 점은 외과술에 능하기도 했고 또 같은 비슷한 시대 중국 명의 장중경처럼 진맥을 통해서 질병을 인식하였다.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라틴어: Claudius Galenus, 그리스어: Κλαύδιος Γαληνός, 12991~ 199?)는 고대 로마의 의학자이며 철학자이다.
페르가몬에서 출생하였으며 스미르나·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의학을 배운 후 출생지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했는데, 후에 로마로 이주하여 유명해졌다. 로마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4명의 황제의 시의(侍醫)가 되었으며 히포크라테스 이래 최고의 의학자로 꼽히며 고대 의학의 완성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체 해부를 실시하였고, 특히 신경계에 관해서는 실험적인 연구를 많이 하였다. 그는 의사에 대해 '최고의 의사는 철학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400권 이상의 철학 및 의학 관계 저술이 있다.
갈레노스는 페르가몬으로 돌아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동료 학생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의 검투사 학교 의사직을 갈레노스와 계약하였다. 갈레노스는 그곳에서 일하면서 많은 상처를 관찰할 수 있었다. 상처가 난 피부 아래로 근육, 신경, 인대를 자세히 관찰하였고 한쪽 뇌가 손상을 입으면 그 반대쪽 몸이 마비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검투사들이 심하게 다치는 만큼 그는 심장, 간 등 여러 장기를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었다. 그는 상처가 인체 내부로 열린 창문이며 이를 통해서 직접적인 인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직접 수술도 하며 검투사들의 상처를 중점적으로 치료했고 그가 일한 4년 동안 단 5명만이 죽는 쾌거를 이루어 낸다. 이것은 그의 선임자 시절 60명이 죽은 것과 비교하였을 때 매우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검투사의 의사로 4년 동안 생활한 갈레노스는 상처를 포함한 식단, 운동, 위생, 예방조치뿐만 아니라 심한 외상에 대한 치료 중요성을 배움과 동시에 그가 추구하던 의학과 철학에 관하여 연구를 계속하였다.
32살이 된 해인 161년 검투사 학교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갈레노스는 페르가몬을 떠나 로마로 이주하였다. 갈레노스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에우데무스를 찾아갔다. 그러나 당시 에우데무스의 건강은 아주 좋지 않았고 로마의 수많은 의사가 그의 병을 고치려 노력해 보았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이때 갈레노스가 자신의 의술로 에우데무스를 낫게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갈레노스는 순식간에 의사로서 로마에서 유명해지게 된다.
이후 갈레노스는 보에티우스의 도움을 받아 대중들 앞에서 많은 강연을 할 수 있었다. 이 강연에서 해부 실험을 직접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그는 해부를 통해서 돼지의 발성기관이 뇌에 의해서 조절되며, 동맥은 공기 뿐만 아니라 혈액까지 운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는 척수의 중요성과 신장, 방광의 기능을 개의 해부를 통해 대중에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가 된 갈레노스는 당시 공동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주치의가 되었다. 나중에 마르쿠스의 아들 콤모두스의 주치의도 된다. 또한, 그의 환자는 대부분이 원로원 의원, 집정관, 건축가, 기술자, 귀족과 같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갈레노스는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37살이 된 해인 166년 갑자기 로마를 떠난다. 자신의 저서에는 잇따른 다른 의사들과의 충돌 때문에 그들의 시기와 질투, 끊임없는 논쟁에 휘말려 그들은 갈레노스에 대해 독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으며, 이것에 두려움을 느껴 떠났다고 밝혀놓았다. 그리고 당시 로마를 휩쓸었던 역병에 대한 공포 또한 그를 떠나게 한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로마를 떠나 갈레노스는 페르가몬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은 전쟁 탓에 들어온 역병으로 많은 인구를 잃고 있었고 이에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갈레노스를 다시 불러 로마 군사들과 백성을 역병에서부터 치료할 의사가 필요다고 했다. 이에 갈레노스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황제의 주치의가 된다.
계속해서 로마에 있던 갈레노스는 로마 제국의 17번째 황제인 콤모두스와 20번째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주치의로 일했다. 갈레노스는 남은 생애를 꾸준히 글을 쓰면서 보냈다.
갈레노스가 사망한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그가 70살이 되던 해인 199년에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많다. 하지만 갈레노스의 논문 중에는 204년에 쓰인 것도 있고 이슬람 문헌에 의하면 216년에 87살로 사망했다고 나와 있다.
 
갈레노스는 중세까지 1000년동안 서양의학을 이끌어 오던 사람인데 검투사의 칼에 찔린 자상등 외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달해왔다. 즉 히포크라테스가 섭생법을 중시하며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함과 달리 갈레노스는 외과수술의 원조라고 할수 있다. 현대 서양의학의 후예인 의사들은 수술적인 치료를 많이 한다. 그 부작용으로 이미지한의원에서 수술후 흉터침 치료도 많이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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