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일 월요일

두의 유상 마마 천연두 흉터와 수두 대상포진 흉터치료

두의 유상 마마 천연두 흉터와 수두 대상포진 흉터치료


명성대비도 숙종이 어렸을 때에 마마를 앓지 않자 평생 조바심하며 걱정했던 것이다. 명성대비가 기도하여 숙종의 마마가 나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치료한 의원은 유상이다.
1018일에 숙종의 마마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이틀 뒤에 유상을 불러 진료케 했으며, 의원 일곱 명이 번갈아 숙직했다. 현종이 왕궁을 비워두고 온천에 행차했을 때같이 몇 십일 치의 군호(軍號)를 미리 정해 올렸으며, 숙직하는 군사도 새로 뽑지 않고 활쏘기 시범도 중지시켰다.
왕이 마마를 앓기 시작하자 비상사태에 들어간 것이다. 숙종의 증세는 나날이 심해져, 열흘째 날에는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안부를 물어도 혼미한 상태로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28일에야 비로소 곪은 데가 아물며 딱지가 생기기 시작했다.29일에는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사면령을 내렸다.
111일에 딱지가 떨어져 완쾌되자, 대비의 수라상에도 고기와 생선이 오르게 되었다.5일에 시약청(侍藥廳)을 해체하고, 군사들의 비상체제도 원상으로 복구했다.10일에 유상을 종2품 동중추부사로 초자(超資)하고, 금관자를 내려 주었다. 상을 줄 때에는 품계를 하나씩 올리는 것이 관례인데, 유상의 경우에는 두 계급 이상 올렸다는 뜻이다. 14일부터 의원들에게 지나친 상을 주었다는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언관들도 유상의 공로는 인정했다. 17일에 종묘 사직에 경사를 아뢰었으며, 전 승지 이현석이 성두가(聖痘歌)’를 지어 기쁨을 표현하자, 많은 사람들이 외워 전하였다. 그 정도로 왕의 마마는 큰 사건이었다.
124일에 유상을 종4품 서산군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튿날 임금의 환후가 평상시 같이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멀리 내보낼 수 없다.”고 하여 한양 옆의 고양군수로 옮겨 주었다. 언제라도 불러 들일 수 있는 곳에 둔 것이다.
 
굿으로 마마신을 달래던 시절
 
유상이 숙종의 마마를 치료한 비법이 청구야담에 실려 있다.
유상이 영남관찰사를 따라 책실(冊室)로 내려갔는데, 몇 달 동안 할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관찰사에게 말했다. 금호를 건너 우암창에 이르기 전에, 종이 변을 보겠다고 고삐를 맡겼다. 유상이 채찍을 들어서 한번 치자, 나귀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하루가 다하도록 멈추지 않다가, 날 저물 무렵에야 어떤 집 마루 앞에 멈춰 섰다. 마루에 있던 노인이 아들을 부르더니 손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으니, 나귀도 잘 먹이고 손님도 잘 모시라.”고 했다. 인사를 나눈 뒤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자 주인이 긴 칼을 차고 나가면서 내 책은 보지 마시오.”라고 했다.
유상이 휘장 속을 보니 의서(醫書)가 가득해 아무 책이나 들춰 보았다. 주인이 돌아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첫닭이 울자 주인이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한낮이 되어 판교에 다다르자, 액정서 아전들이 열댓 명이나 길가에 줄지어 서서 유상에게 빨리 서울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지금 성상께서 마마를 앓으시는데,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서 의원 유상을 부르라고 했다오.”
구리개를 넘어서는데 어떤 할미가 마마에 걸렸던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묻자 할미가 설명했다.“이 아이는 곪긴 속에 출혈이 심해 숨까지 막혔었다오. 다들 팔짱을 낀 채 죽기만 기다렸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柹蔕湯)을 달여 먹게 해서 효험을 보았지요.”
말린 시체탕은 감꼭지를 달인 약인데, 딸꾹질에 복용했다. 듣고 보니 어젯밤 보았던 의서에도 시체탕이란 말이 있었다. 왕을 진찰했더니, 할미가 업고 있던 아이와 같은 증세였다. 그래서 시체탕을 올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어, 숙종이 왠쾌되었다고 전해진다.
 
병균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에 두창은 귀신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었다. 민간에서는 두창신을 중히 여겨 왔으며, 여러 가지 금기(禁忌)가 생겨났다. 그래서 그 귀신을 마마, 손님이라고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고을마다 여단(癘壇)을 쌓아 놓고 전염병이 돌 때마다 여제(癘祭)를 지냈는데, 억울한 원혼(寃魂)을 달래 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마가 유행하면 마마배송굿이나 하던 시대에 유상은 숙종뿐이 아니라 1699년에는 세자, 1711년에는 왕자와 왕비의 마마까지 모두 치료했다. 더 이상 승진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으니, 왕실의 마마를 치료하던 의원은 조선 최고의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상의 아들이 대를 잇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까지 생겨난 그의 의술은 전수되지 못했다.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허경진 지음, 랜덤 하우스 코리아, 페이지 206-209
 
유상 [柳瑺]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이름은 柳相(유상柳尙(유상)으로 쓰기도 한다. 판관 유인(柳湮)의 손자이자 문해백(文海伯) 유경집(柳景緝)의 서자이다. 의학에 밝았는데, 특히 두환(痘患:천연두)을 잘 치료하였다. 1683(숙종 9) 숙종의 두환(痘患:천연두)을 치료하여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어 서산군수에 임명되었다가 왕이 완치되지 않았으므로 멀리 보낼 수 없다 하여 고양군수로 전임되었다. 1699(숙종 25) 세자의 두환을 완치시켰으므로 지중추부사에 오르고, 1711(숙종 37) 왕자를 치료하여 합천군수를 거쳐 삭녕군수에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고금경험활유방(古今經驗活幼方)1권이 있다.
저미고(猪尾膏) 일화가 있는데 유상이 숙종을 치료할 때 저미고라는 약재를 쓰려 하자, 숙종의 어머니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준제(峻劑:약성이 강한 약)라고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유상은 소매 속에 몰래 저미고를 가지고 와서 약에 섞어 쓰니 이내 숙종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두산백과)
 
한 사람 치료로 중인인 의사가 종 4품까지 올라간 것은 정말 대단한 승진이며 특전이다. 이처럼 천연두는 치료가 매우 어려웠던 질병이다. 현재 다행히 천연두는 박멸되고 균만 실험실에서 존재하니 서양의학의 세균과 전쟁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공로라고 할수 있다.
요즘에는 천연두 곰보는 없지만 서양의학적으로 바이러스를 치료하지 못하기 때문에 헤르페스 조스터 바이러스로 수두와 대상포진이 생길수 있다. 이런 물집 이후에 표피가 박탈되고 진피가 드러나면서 진피까지 손상받아 흉터가 발생하는 것인데 이런 수두와 대상포진 흉터는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 또한 레이저등으로 점뺀 흉터도 파인 흉터가 비슷한데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침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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