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5일 목요일

로마의 남성 동성애와 화형 화상흉터치료

로마의 남성 동성애와 화형 화상흉터치료


테오도시우스 1세 또는 테오도시우스 대제(라틴어: Flavius Theodosius, (347111~395117)379년부터 395년 죽을 때까지 로마 황제였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동로마 제국을 다스릴 것을 임명받은 이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죽은 후, 동로마와 서로마 모두를 통치한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완전히 분리되어 다시는 통일되지 않았다. 그는 또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만들었다. 그의 강력한 기독교 부흥 정책 때문에 그는 기독교계 역사가들로부터 대제(大帝)’의 칭호를 받았다.
379년경 테오도시우스가 통치하던 동방 제국내에서 니케아 신경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아리우스주의자를 비롯한 다른 종파 사이에 적대 관계가 고조되면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자신은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380년 세례를 받고 니케아 신경을 신봉했다. 그는 제국 내에서 신앙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했는데 380228일 테오도시우스는 병에서 회복되자마자 교회 당국자들에게 아무런 자문도 구하지 않고 모든 시민들이 니케아 신경을 신봉해야 한다고 규정한 칙령을 발표했다. 이 때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설을 믿는 사람들만 보편적 기독교인(가톨릭)으로 인정되었다. 가톨릭이라는 호칭이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 열린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주교 150명이 모여 아리우스파와 그 종파를 이단으로 확고히 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는 향후 로마 교구와 버금가는 명예와 위신을 가진다고 발표하였다. 이 무렵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모든 도시에서 집회를 금지당했고 정통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385년부터 테오도시우스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더욱 엄격히 금지하였고, 391년 로마와 이집트에서 일체의 비기독교 의식을 금지하고 이듬해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제국의 전역에서 불법으로 규정했다.
390년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로마군 수비대장 한 명이 주민들과의 사소한 다툼 끝에 집단 폭행을 당하여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밀라노에 있던 테오도시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철저히 보복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당시 밀라노의 주교이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기독교 지도자인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의 명령에 반대하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테오도시우스는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명령을 밀어붙임으로써 약 7,000명의 테살로니카 주민들이 대량 학살 당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이러한 보복 행위를 비난하며 황제에 대한 성체 배령 집전을 거부하였으며, 황제는 결국 자신의 명령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맨머리에 베옷을 입고 밀라노 대성당으로 가서 용서를 구했다. 부활절에서부터 성탄절까지 황제는 성당으로의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고 성탄절이 되어서야 겨우 암브로시우스의 용서를 받고 성체 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현실의 최고권력자인 황제가 일개 교회의 성직자에게 굴복한 사건으로, 기독교 내에서 교권과 속권과의 첫 대립으로서, 이후 종교와 권력의 관계를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이후 이러한 추세는 강화되어 1077년에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고대 로마에서도 젊은 남성의 신체는 에로틱한 성적 대상이 되었고, 그리시와 마찬가지로 연장자인 시민 남성과 젊은 남성 노예나 해방 노예 간의 불평등한 주종 관계가 지배적이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제외한 모든 로마의 황제들은 남자 애인을 두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마니아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터키로 알려진 북서쪽 비티니아 출신의 잘생긴 꽃미남 청년 안티누스를 몹시 총애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안티누스는 130년 이집트 지역의 나일강에서 익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죽었을 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마치 여자처럼 계속 울기만 했다. 때문에 안티누스의 죽음 그 자체보다 황제의 지나치게 과도한 비통함이 오히려 세간의 조롱 내지 추문의 대상이 되었다. 어쨌든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안티누스는 사후, 황제에 의해 신격화되어 수많은 예술 작품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집트 소아시아에서는 그를 숭배하는 신앙까지 퍼졌었다.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만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086일에 동성 관계에서 수동적 역할을 하는 남성(남창)들을 말뚝에 박아서 화형에 처하도록 하는 엄령을 내렸다. 유스티아누스 황제 역시 그의 치세 말기인 558년에 신의 분노에 의해 로마 도시들이 멸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능동적 역할을 하는 남성 고객들에게도 동일한 처벌을 적용하였다.
 
명화들이 말해주는 그림 서양 생활사, 김복래 저, 제이앤 제이제이, 페이지 244-245
 
화형을 시키는 것은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다. 그 이유는 화형으로 불에 데인 작열통의 통증이 가장 심각하게 동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마음의 상처를 받을수 있는데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에서 화상후 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를 해서 치료가 가능하게 만들어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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