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의 비밀인 암내와 겨드랑이 액취증 수술 흉터
양귀비(楊貴妃, 719년 6월 26일 ~ 756년 7월 15일)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다. 그녀의 성은 양(楊)이고 이름은 옥환(玉環)이며, 귀비는 황비(후궁)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이다. 당 현종 이융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이 과도하여 끝끝내 안녹산과 사사명이라는 두 호족 세력 무장 대표가 공동 주도하여 반란을 획책한 이른바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부른다.
서시, 왕소군, 초선과 아울러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747년 절도사 안녹산이 등장해, 양옥환은 안녹산과 친해진다. 새로운 권력자의 등장에 위기를 느낀 양국충은 견제하는데, 이것은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이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756년 지덕 원년 가서한은 안녹산에게 대패하면서 잡혔고 동관도 함락되었다. 이융기는 수도 장안을 빠져 나가, 촉(현 쓰촨성)으로 피난했고, 양옥환 및 양국충, 고력사, 이형(李亨)도 동행했다.
756년 7월 15일 섬서성 마외(馬嵬)에 이르러, 전란 원인이 된 양국충을 증오하던 진현례(陳玄禮)와 병사들은 양국충과 국부인들을 처형했으며, 현종에게 ‘도적의 근본’인 양옥환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현종은 “양옥환은 심궁에 있었고 양국충의 모반과 무관하다”라고 옹호했지만, 고력사의 진언에 따라 양옥환에게 사세부득이 자살을 명했다. 고력사에 의해 양옥환은 목매달아 죽었다.
이융기는 양옥환을 안장하고 장안에 돌아간 후 이장을 명했지만, 예부시랑 이규가 반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융기는 내시에게 은밀히 이장을 명했다.
중국의 사서 ‘신당서’에는 ‘당나라 현종이 자신의 아들 소왕의 아내 양옥환(양귀비)을 빼앗았고, 수왕에게는 다른 여인인 위씨를 소개시켜 줬다’고 명문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27세의 나이에 당현종의 귀비로 책봉된 양귀비는, 도대체 얼마나 그 미색이 뛰어나길래, 자신의 시아버지인 현종의 마음을 완전 사로잡아버렸던 것일까?
중국의 정사에는 양귀비의 미모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고 표현했는데, 양귀비는 얼굴이 동글동글하면서 통통하게 생긴 풍만한 미인이라는 의미이다. 즉, 양귀비는 지금처럼 날씬하고 갸름한 미인이 아니라, 통통하고 풍만한 몸매의 미인이었다는 것이다. 경국지색의 미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양귀비의 겨드랑이에서 나는 ‘암내’였다고 한다.
중국최고의 미인이라고 일컬어지던 천하의 양귀비에게 ‘암내’라고 하는 역한 냄새가 났다고 하니, 정말 믿기가 힘든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양귀비의 암내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양귀비의 목욕을 담당하던 궁녀들이 수시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양귀비의 겨드랑이에서 나는 암내는 엄청 역한 냄새였다고 하며, 보통 사람이 양귀비의 암내를 맡으면,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의 야사 기록에 따르면, 양귀비는 암내가 심해서 하루에도 5~6번씩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양귀비는 당대 최고의 미인답게 자신의 약점인 암내가 나는 것을 철저히 숨겼다고 하며, 소문을 내는 궁녀들은 가차없이 죽였다고 한다.
양귀비의 목욕을 담당하는 궁녀가 양귀비의 심한 암내 때문에, 놀라거나, 격한 반응을 보일 경우에도, 양귀비는 그 궁녀들을 죽이거나 교체해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점이 생기는데, 궁녀들도 냄새를 맡으면,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심한 암내를 현종은 어떻게 참았던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현종은 코에 심한 축농증이 있어서 냄새를 잘 맡지못했다고 한다. 축농증 때문에 항상 코가 막혀있었던 현종은, 양귀비의 역겨운 암내를 전혀 맡을 수 없었다고 하니, 두사람은 정말 천생연분이다.
1970년대에 일본국민들의 우상으로서, 일본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아이돌 여가수 야마구치 모모에가, 자신은 양귀비의 후손이었다고 2001년도에 중국에서 밝혔다고 한다.
2001년도에 중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아이돌가수 야마구치 모모에는 기자회견장에서 중국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자신의 조상이 바로 중국에서 온 양귀비라고 하며, 자신은 양귀비의 직계자손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중국의 정사인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근위대장이 양귀비의 시녀를 죽여서, 양귀비가 죽은 것처럼 위장한 후, 양귀비는 빼돌렸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같은 ‘구당서’의 기록에 ‘양귀비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으며, 일본에서 여생을 살다가 일본땅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도 양귀비의 묘가 있다고 한다. 양귀비의 묘는 일본의 야마구찌현의 오오쯔군 유야정 츠마에 있다고 한다.
천하의 미색 양귀비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으니 하늘은 모든것을 한 사람에게 주지 않는 모양이다. 양귀비의 신장은 155cm이고 체중은 65kg의 건강한 체형이었다 한다. 체질량 지수 계산 결과 27.06으로 비만에 해당했다. 필자가 알기로 태평한 시대에는 비만녀가 대우를 받는데 허리대 엉덩이 비율은 0.7로 일정했다. 만약 당현종이 냄새를 잘 맡았다면 양귀비는 낭패였을텐데 현대에 살았다면 아마 겨드랑이 아포크린 선을 파괴하는 腋臭症액취증 수술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액취증 수술을 해도 겨드랑이 흉터를 피할수는 없는데 이런 케이스에는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에서 수술후 흉터침 시술을 받는다. 수술후 흉터침은 3종류인데 지속을 오래 주기 위해 꽂아놓는 침, 피부 재생 한약 추출물이 들어간 약침, 유착해 달라붙은 진피피부를 뜯어내는 침의 3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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