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장군의 문신 진충보국과 문신흉터치료
악비( 岳飛, 간체: 岳飞, 병음: Yue Fei 웨페이, 1103년 3월 17일 [1] ~ 1142년 1월 27일)는 송나라 남송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금나라 때 여진족 군대에 대항해 싸웠던 남송 초기의 장군이다. 학자로서도 뛰어났으며, 저서 《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고,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았다가 뒤에 충무로 개정되었으며, 1204년 왕으로 추존되어 악왕(鄂王)이 되었다. 명나라 이후 한(漢)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그는 가난한 농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현재의 허난 성(河南) 안양 시(安阳市) 탕음현(湯陰縣)이다. 태어나자마자, 황하가 범람해서 태어난 고향이 파괴되고, 그의 부친인 악화(岳和, 1054년-1122년?)는 홍수에 익사하여, 악비와 그의 모친인 요부인(姚夫人)은 허베이 성에 정착했다. 야사로는 악비의 아버지는 홍수에서 살아남아서 훨씬 후에까지 생존했다고 한다. 8살의 악비는 들판에서 악화와 만나게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악비는 1122년 군에 입대한다. 부친의 사망과 2년의 애도기간으로 인해, 1124년까지 군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시절에, 악비는 매일밤 잠들기 전에 손자병법을 읽는 것으로써 군사전략을 익혔다. 이 지식은 그가 후일 장군으로서 활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첫 무술 스승은 그 고장에서 창술과 검술 사범으로 유명한 진광(陳廣)이었다. 그는 악비가 11세였을 때부터 창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주(孙遒)가 저술한 악왕사(鄂王事)에서는 진광은 악비의 외조부 요대옹(姚大翁)에 의해 고용되었다고 한다. 성년이 되었을 때, 그의 두 번째 무술 스승은 궁술을 가르친 주동(周同)이었다. 송사(宋史) 악비전(岳飛傳)에서는 악비에 대해서 300척(90m)까지 활을 쏠 수 있고, 노(弩)를 8석(石)까지 감당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122년 개봉을 방어하고 있던, 종척을 따라 의용군으로 참가 했다. 그의 뛰어난 무용은 금나라와의 싸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전공을 세우고, 정강의 변으로 남송이 들어서자 우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 성(湖北省)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1126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군대가 화북(華北) 지방을 침입하여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했고, 금나라가 화북을 점령하고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점령하자 고종을 따라 남하하였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기고, 백성들에게는 결코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백성들이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군단은 '악비가 이끄는 군대' 라는 뜻의 '악가군'이라 불리며 남송 제일의 최정예 군단으로 꼽혔다.
악가군은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등의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 강(淮河), 친링산맥(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그는 구릉지가 많은 강남지역의 지리적인 이점을 잘 이용하여 금의 기마공격을 막았다.
고종과 함께 남쪽으로 퇴각한 악비는 정원장군(靖遠將軍)·절도사(節度使)를 거쳐 무승진(武勝鎭)·정국진(定國鎭)의 2개 진의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136년 선무부사(宣撫副使), 1137년 선무사에 임명되어 양쯔 강과 화이허 강[淮河] 남부 사이에 위치한 중원(中原) 지역의 회복에 진력했으며, 이로써 금이 점령했던 일부 지역을 수복할 수 있었다.
악비는 조정 내에서도 북벌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북진하여 잃어버렸던 모든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주화파(主和派)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들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소속 병사들을 모두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1141년 조정의 군제 개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양자 악운과 악가군의 최고 간부인 장헌과 함께 투옥된 뒤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 악운의 나이는 23세 였다. 그리고 북방의 영토를 포기하고 금을 섬기며 조공을 바친다는 내용의 화의(和議)를 체결하였고, 이 화의를 굴욕으로 본 인사들에 의해 당대에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다.
1155년 진회가 죽고 난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고,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1204년 악왕(鄂王)으로 추봉되어 항주의 서호 부근의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다. 뒤에 충무의 시호가 가증되었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주살당한 악비는 1178년에 복권되어, 1204년 악왕에 추대되게 되어 시후 근처에 악왕묘(岳王廟)가 건립되었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關羽)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악비의 등에는 그의 어머니에 의해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악왕묘에도 진충보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사성어대사전 (김성일 | 시대의창)에 따르면 진충보국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남북조시대 북주(北周)의 선제(宣帝)가 죽고 8세의 어린 정제(靜帝)가 뒤를 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이 어린 정제의 후견인 문제로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신하인 유방(劉昉), 정역(鄭譯) 등은 선제가 죽기 전에 반포한 명령을 사칭하여 양견(楊堅, 후의 수문제(隋文帝))을 승상으로 세워 정제를 보좌하게 하려고 했다. 안지의(顔之儀)는 선제의 유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부하고 따르지 않았다. 유방 등은 조서를 만들어 서명을 하고 안지의에게도 서명을 강요했다. 그러자 안지의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선제께서 막 돌아가시고 즉위한 황제는 연소하므로 집정하는 대신들은 마땅히 황족 중에서 가장 걸출한 조왕(趙王)에게 담당하도록 해야 하오. 여러분들은 조정의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지, 어찌하여 제위를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오.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선제를 기망할 수는 없소.” 그러자 유방 등은 안지의를 굴복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안지의를 대신해서 자신들이 서명을 했다. 양견이 후에 옥새를 찾자 안지의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것은 천자의 물건으로 주인이 있는 것인데 재상이 어찌하여 찾는 것이오?” 양견이 크게 노하여 안지의를 끌어내 죽이라고 명했으나 백성들이 보고 있으므로 죽이지를 못하고 서쪽 변방의 군수로 내보내 버렸다.(宣帝崩, 劉昉, 鄭譯等矯遺詔, 以隋文帝爲丞相, 輔少主. 之儀知非帝旨, 拒而弗從. 昉等草詔署記, 逼之儀連署. 之儀厲聲謂昉等曰, 主上升遐, 嗣子沖幼, 阿衡之任, 宜在宗英. 方今賢戚之內, 趙王最長, 以親以德, 合膺重寄. 公等備受朝恩, 當思盡忠報國, 奈何一旦欲以神器假人. 之儀有死而已, 不能誣罔先帝. 於是昉等知不可屈, 乃代之儀署而行之. 隋文帝後索符璽, 之儀又正色曰, 此天子之物, 自有主者, 宰相何故索之. 於是隋文帝大怒, 命引出, 將戮之, 然以其民之望也, 乃止, 出爲西疆郡守.)」
이 이야기는 《주서(周書) 〈안지의전(顔之儀傳)〉》에 나온다. 당시 양견의 딸은 선제의 황후였으므로 선제가 죽고 아들 정제가 즉위하자 태후가 되었으며, 양견은 태후의 아버지로서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결국 북주의 정권을 찬탈한 후, 마지막으로 남조의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으며, 수나라의 초대 황제(수문제)가 되었다. 같은 이야기가 《북사(北史) 〈안지의전(顔之儀傳)〉》에도 나온다.
「악비(岳飛)가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하주(何鑄)에게 악비를 국문하라고 명했다. 악비는 윗옷을 찢어 등을 하주에게 보여 주었는데, ‘진충보국’이라는 네 글자가 피부 깊이 새겨져 있었다.(初命何鑄鞫之, 飛裂裳以背示鑄, 有盡忠報國四大字, 深入膚理.)」
이 이야기는 《송사(宋史) 〈악비전(岳飛傳)〉》에 나온다. 악비는 남송(南宋)의 명장으로 금(金)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워 마지막에는 금나라의 사령부가 있는 개봉(開封) 부근까지 압박해 들어갔지만, 금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는 진회(秦檜) 등의 모함으로 인해 소환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필자 생각에는 악비는 충성을 다했는데 간신 모함에 죽고 중국 동북공정등으로 여진족을 포함한 소수민족을 끌어안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악비에 대한 찬양은 좀 사그라들고, 대신 진회가 민족통합의 선구자로써 재평가되고 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죽는다는 말처럼 거짓된 나라에서는 충성이란 쓸데 없는 짓일뿐이다.
아무리 충성을 다한다는 좋은 뜻을 가져도 문신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문신을 시술받은 뒤에 지우는 과정에서 흉터가 남는 문신제거 흉터 환자를 흉터침, 침, 한약 재생약침등으로 기혈순환을 돕고 진피 대부분을 차지하는 콜라젠을 자극 재생해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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