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수치와 튼살치료
2015년 10월 27일 밤 10시에 방영된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8회 줄거리의 명장면과 명대사는 다음과 같다.
이성계: 배신자로구나
왜구(왜구로 변장한 백성): 왜 우리는 배신입니까? 운봉에서 그 난리를 칠 때 도당에 그 높으신 개*끼들은 우리를 지켜준답시고 땅이며 곡식이며 쓸어가셨는데 그 고귀하신 개*끼들은 배신이 아니고 왜 힘없는 나만 배신이냐구요?
이성계: 조금의 수치도 없는 놈이로구나!
왜구: 수치심 전혀 없습니다요. 아니 난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요. 내 아들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었다고 내 애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비보단 이런 짓 이라도 해서 아들을 살린 내가 더 자랑스럽다고 수치스럽냐고? 아니 자랑스러워 난 자랑스럽다고 그러니까 빨랑 죽여 빨랑 죽이라구요! 난 자랑스럽게 죽을 거니까!
이성계: 부끄럽지 않느냐? 수치스럽지 않느냐? 아들을 보기가 힘들지 않느냐? 그래서 그래서 죽여달라는거 아니냐? 오냐!
정도전은 도당 3인방을 죽여달라며 이성계를 포섭했다. 정도전은 “전장터 백성들의 그 어느 것도 빼앗지 않는 분. 언제나 좋은 사람으로 남는 분. 그러면서 정치로 뛰어들지 않는 분. 왜? 정치하는 순간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라며 이성계의 스타일을 분석했다. 정도전은 과거 이성계가 왜구로 분장해 마을을 약탈했던 고려인들을 죽이지 않고, 자신의 병사로 썼던 당시를 회상했다.
정도전: 그리고 그 자에게 이렇게 말 했었지요 ‘니 수치스러움에 대한 벌로 죽음은 너무 가볍다 남은 세월 온 힘을 다해 니 몸뚱아리를 굴려 벌을 받으며 살거라. 내 밑에서 왜구를 무찌르는 선봉장이 되어 니 자식에게 니 마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상하거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느꼈습니다.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요. 장군에게 전쟁이란 무언가에 대한 속죄였습니다. 하여 이 고려를 지켜내는 것만이 고려의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만이 장군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습니다. 제 말이 틀렸는지요? 만약 제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도당의 3인방이 남아있는 한 장군의 바람은 이룰 수 없습니다. 도당 3인방을 꺽고 새 나라를 만듭시다. 새 나라여야 합니다 고려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내가 만들려는 새 나라의 왕으로 난 당신을 선택했소.
이 드라마에는 수치스러운 것을 승화하는 것에 대해서 잘 나와 있다. 수치스럽다고 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용기가 아니라 수치를 극복하고 이겨나가는 과정에서 더 큰 인간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제나라의 양공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차례차례로 죽였기 때문에 제나라는 혼란했다. 소백은 거(莒)에, 형 공자 규는 노나라에 망명했다. 양공은 그 후, 사촌형제인 공손 무지에게 암살되었다. 양공이 죽은 후에, 공손 무지가 제공에 즉위 했다고 칭하고 국정을 관리하지만, 공손 무지도 또 곧바로 암살되었다. 공손 무지 사후, 소백과 같이 노에 망명한, 노의 후원자를 얻고 있던 형 공자 규와의 사이에 후계자 싸움이 생겼다.
이 때, 공자 규의 심복인 관중이 소백을 매복해 암살하려고 하고 있었다. 관중은 활을 쏘아 맞혔다. 화살은 소백 배에 맞아, 소백은 쓰러졌다. 이에 관중은 기뻐하고, 공자 규에게 소백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소백이 죽어 경쟁 상대가 사라진 공자 규는 노의 군사를 뒤로 천천히 제나라에 들어오려고 했다. 그러나, 소백이 이미 먼저 제나라에 들어와 제나라 공이 되어 있었다. 공자 규는 기다리고 있던 소백에 공격을 받고 노나라로 도망쳤다. 실은 관중의 화살은 배에 명중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허리띠의 쇠고리에 꽂혔었던 것이었다.
관이오(管夷吾, 기원전 725년? ~ 기원전 645년)는 중국 춘추 시대 초기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자는 중(仲)이며 영상(潁上) 사람이다. 보통 성씨와 자를 합쳐 관중(管仲)으로 불리며, 제환공을 춘추오패의 첫번째 패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젊은 시절 포숙과 함께 지냈으며, 널리 알려져 있는 ‘관포지교’의 기록외에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출신지인 영상의 특성과 관포지교의 내용 중 상업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관중과 포숙은 각각 제나라의 공자인 규와 소백을 모셨다. 제양공이 관지보와 연칭에게 시해당하고 제나라의 군주자리가 공석이 되자, 관중과 포숙은 각기 규와 소백을 모시고 제나라를 향했다. 포숙의 신속한 대처로 소백이 먼저 군주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관중이 모시던 규가 죽고, 노나라로 망명했던 자신 역시 목숨이 위태로워졌으나 포숙의 천거로 그는 하루아침에 제나라의 재상에 오르게 된다.
공자의 문답록 논어 헌문편을 보면 어떻게 죽어야 옳은지가 나와 있다. 일반적으로 유교의 공자는 작은 신의를 지켜 무조건 충성을 지키게 조장한다고 생각되지만 실제 공자는 미생이 다리 밑에서 여자와 만나기로 하다가 홍수가 나서 도망가지 않고 돌다리를 끌어앉고 빠져죽은 미생지신(尾生之信) 같은 융통성 없는 약속 지킴을 나쁘게 보았다.
子貢이 曰管仲은 非仁者與인저? 桓公이 殺公子紏어늘 不能死오 又相之온여
자공이 왈 관중은 비인자여인저 환공이 살공자규어늘 불능사오 우상지온여.
자공이 말하길 “관중은 인자한 사람이었습니까? 제나라 환공이 관중이 모시던 공자 규를 살해했거늘 죽지 않고 또한 환공을 도왔습니다.”
子 曰管仲이 相桓公覇諸侯하야 一匡天下하니 民到于今히 受其賜하나니 微管仲이면 吾其被髮左衽矣러니라.
자왈 관중이 상환공패제후하야 일광천하하니 민도지금히 수기사하나니 미관중이면 오기피발좌임의러니라.
공자가 말하길 “관중이 제환공이 제후의 패자가 됨을 도와 한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혜택을 받으니 관중이 아니었다면 나도 또한 머리를 풀고 좌측으로 소매를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이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리오
기약필부필부지위량야이 자경어구독이막지지야리오.
“어찌 마치 일반 남자와 여자처럼 작은 신의만 가져 도랑에 스스로 목매 남들이 모르게 죽겠는가?”
특이하게 공자는 유교적 명분론과 의리론과 상관없이 주군을 배신하고 따라죽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편에 붙었던 관중을 칭송했다. 사기를 쓴 사마천은 궁형이란 생식기가 잘리는 형벌을 받고도 불후의 대 역사를 기록하였다. 죽는 것이 쉽지만 살아서 치욕적이더라도 오히려 더 값진 일을 한다면 더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다. 고귀한 죽음이 깃털처럼 가볍고 훌륭한 업적은 태산처럼 무거우니 대한민국의 하루의 자살자수인 42명은 부디 이런 고사를 생각해주기 바란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남에게 보여주면 수치를 느끼게 되는 튼살을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으로 진피 콜라겐을 자극 재생시키고 기혈순환을 도움을 줘서 치료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