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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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 도스트옙스키와 사형집행에서 다시 삶 재생하는 흉터

대문호 도스트옙스키와 사형집행에서 다시 삶 재생하는 흉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러시아어: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표도르 미하일로비츠 도스또옙스끼, 18211111/구력 1030~ 188129/구력 128)는 러시아의 소설가이다.
젊은 시절 도스토옙스키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 를 중심으로 작가 등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공상적 사회주의 를 신봉하는 급진적 정치 모임에 참가하였다. 당시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첩자를 보내 정치 모임들을 감시하였는데, 도스토옙스키는 모임에서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불온문서로 간주되었던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한 것이 원인이 되어 18494235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체포된 지식인들을 사형에 처할 생각은 없었으나, 당시 확산되고 있던 급진주의 정치 모임들에 대해 경고하고자 직전에 특별 사면할 계획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회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나온 이 경험으로 인하여 몇몇 사람은 공포와 충격으로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도백치등의 작품에 사형 집행 직전의 심정을 묘사하는 등 이 사건은 그의 작품 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인텔리겐치야)의 폭력적인 혁명을 부정하고, 기독교, 특히 정교회 교리에 바탕을 둔 기독교 사상을 담고 있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와 사상을 변증하는 호교론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행한 기독교의 폭력을 비판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그의 소설은 흔히 이질적, 극단적 심리의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을 보여주고 당대 러시아의 정치, 사회, 정신세계 등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때로 그를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여기기도 하는데, 발터 카우프만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실의 수기"실존주의를 위한 최고의 서곡"이라 묘사한 바 있다.
 
2017223일 오후 950. EBS 1TV <세계 문학기행>에서는 배우 정진영이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일생을 따라가며 여행을 떠난다.
여름궁전, 겨울궁전, 페트로파블로브스크 요새 등 화려한 건축물들과 유유히 흐르는 네바강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습지대를 메꿔 인공도시로 건설된 이곳은 당시 빈부격차가 심해졌고 흐린 날과 맑은 날의 이미지가 다르게 느껴지는 도시다. 따라서 밝은 햇볕과 음울함이 대비적으로 나타나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탄생지로 유명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말년까지 머물며 거리 곳곳을 소설 속 무대로 등장시켰다. 정진영은 야외무대에서 하는 보드카를 무료로 주는 러시아 연극을 보면서 러시아 민요를 부르고 많은 양의 보드카를 원샷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화려한 도시 속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이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빈민병원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병원을 사실적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란 처녀작을 쓰자마자 대 히트를 쳐서 대문호가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왜 인간 내면 심리에 몰입하며 집착했을까? 아버지의 살해사건, 평생을 괴롭힌 뇌전증[간질],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대에 올라야 했던 고통의 순간, 도박빚에 쫓겨 궁핍한 삶을 이어갔던 시간들. 도스토옙스키가 보고 걷고 느꼈던 그 길을 따라가며 그의 굴곡진 생애를 만난다.
 
도스토옙스키는 창문으로 빛이 조금 들어오는 방에 갇힌채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될때까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마태복음을 읽는등 성경공부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고 했고 죽기 전에도 아내 안나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했다.
러시아의 거장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어 보면 주인공 중 하나인 알료샤가 예수회를 무슨 죽음을 먹는 자를 언급하듯이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 이반의 극단적인 주장을 듣고 '그런 건 예수회나 할 법한 사악한 생각이에요!'라고 외쳤다.
이반. 아이고, 요놈, 구린내 나는 예수회 놈 같으니, 그래, 누가 네 놈을 가르쳤더나... ”
하지만 맹세코 이건 정말로 예수회 교도 들이나 써먹는 궤변이고 , 맹세코 그때 일어났던 일을 나는 지금 토씨 하나 안 때고 자네한테 그대로 전해 준 거야.”
만약 그 더러운 행복만을 위해 권력을 갈망하는 군대의 우두머리로 단 한 사람이라도 이런 인물이 나타난다면 이런 인물 한 사람만으로도 비극을 낳기에 충분하지 않느냐 그 말이야. 뿐만 아니라 이런 인물이 단 한 사람이라도 우두머리가 된다면 로마의 사업, 그 군대도 예수회도 모조리 포함해서 로마의 사업에 대한 진실하고도 지도적인 고상한 이상을 낳기에 충분하지 않느냐 그 말이야. 나는 단언한다. 그리고 굳게 믿는다 이와 같은 '유일한 인간'은 모든 운동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 가운데 지금까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고. 어쩌면 로마의 추기경들 중에도 이런 종류의 '유일한 인간'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거야. 그리고 이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비밀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동맹 또는 비밀결사로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야. 이러한 비밀을 나약하고 불행한 인간으로부터 감추는 것은 그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지. 이것은 반드시 존재해. 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돼.”
 
책 대심문관에도 예수회가 등장한다. 이반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노인 자신도, 그리스도는 옛날에 자기가 말한 것 이외에 무엇 하나 덧붙일 권리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으니 말이야.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바로 여기에 로마 가톨릭의 가장 근본적인 특질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도 있을 것 같아. ‘너는 이미 모든 것을 교황에게 넘겨주지 않았느냐 말이다. 따라서 지금은 모든 것이 교황의 수중에 있는 거야. 그러니 이제는 제발 나타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 적어도 어느 시기가 올 때까지는 방해를 말아 주게라고 말하는 거야. 그들은 이런 말을 입으로만 뇌까리는 게 아니라 책에까지 쓰고 있어. 적어도 예수회 친구들은 말이야. 나도 예수회 신학자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어.
도대체 너는 네가 방금 떠나온 저 세계의 비밀을 단 한 가지라도 우리에게 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대심문관은 그리스도한테 이렇게 묻고는 곧 자기가 대신해서 대답하는 거야.
 
266번째 교황으로 새로 선출된 예수회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 프란체스코 (Pope Francis)교황도 한때 문학도답게 도스토예브스키와 Jorge Luis Borges의 팬이며 바베트의 만찬이란 영화를 좋아한다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음모세력을 고발한 작가보다 자신 단체를 욕한 작가를 좋아하는 교황님이 한수 더 위라고 생각한다.
 
도스트예프스키와 정치 서클모임자들 앞에 한 장교가 나와 '죄인들은 모두 반역죄로 총살'이라 선고했다. 장교가 형수들의 죄명과 형을 낭독하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이 멍해지면서 근처 교회의 종탑에서 쏟아내리는 금색 햇빛이 차차 구름에 가려지며 어두어지는 것을 보며 그 또한 곧 영원히 어둠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때에 그는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만약 산다면 나의 삶은 끊임 없는, 영원처럼 느껴지며 일분이 백년과 같으리라,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인생의 단 일초를 소홀히 하지 않을 텐데'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신부에게 고해를 본 후, 머리에 두건이 덮히고 병사들이 총을 발사하기 직전 갑자기 형장에 마차가 급히 난입해 황제가 특사로 그들의 형을 감형하였음을 알렸다.
특이하게 도스토옙스키와 비슷하게 김구선생도 사형수로 사형을 기다리다가 전화가 도입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이렇게 파란만장한 일을 겪으니 김구선생도 백범일지란 위대한 문장을 남겼다.
김구는 민비살해사건과 관련된 민간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죽인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고종의 지시로 사형 집행이 중지되었다. 1896년 덕수궁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었는데, 이 전화는 주요 관아는 물론 인천까지 개통되었다. 고종은 인천감옥에 직접 전화를 걸어 청년 김구에 대한 사형집행을 중지시켰다. 이는 전화가 개통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九死一生이란 말이 있듯이 정말 죽은 목숨이었다가 다시 살아나듯이 피부의 진피도 거의 죽은 상태였다가 깨어나는 경우가 있다. 상처로 유발된 흉터도 그 중에 하나인데 극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수 있다. 그 방법은 도스토옙스키나 김구선생처럼 하늘의 천운이 아니라 한의학적인 흉터침이란 치료 수단으로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의 임진왜란(壬辰倭亂) 난중일기 임전훈(臨戰訓)에 나오는 명언처럼 반드시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아난다는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 必生則死] 살아나 원래 피부상태로 흉터가가 복구할 수 있다.

A Lady of England 15

A Lady of England 15



CHARLES. No anger, fair Miss Ratty, we had enough of this
indignation at the brink of the vault, when you were near
falling out with me because I would not fall in with your ideas,
and fall into the vault.
 
DARESBY. Ah, Sophy, how you treated me!
 
SOPHIA. I thought it my duty, dearest.
 
DARESBY. I can pardon you anything; but that deceiving Ratty,
whose word I can never again believe....
 
CHARLES. No more of that, Daresby. The farce is ended, the mists
of mistake are clearing up, the reign of Folly must fall, let
not Anger survive its cause!
 
Now that we have ended all this War of Words,
And fall to drawing corks instead of swords,
Now the Pretender may his Captors mock,
And view with glee a match without the lock,
Let each resentful thought and feeling cease,
And General Harmony conclude the Piece!
 
 
 
 
CHAPTER V
 
A.D. 1847-1849
 
HOME LIFE
 
 
In 1847 a new interest entered the life of Charlotte Tucker. The three
little ones of her brother Robert and his wife,--Louis, Charley, and
Letitia,--came to live at No. 3, and were made her especial charge. All
of them, but particularly the pretty little dark-eyed Letitia, then only
two years old, were thenceforward as her own; first in her thoughts,
and among the first in her love. She taught them, trained them, devoted
herself to them; and their names will often be found in her letters. The
death of Letitia, nearly twenty years later, was one of the heaviest
sorrows she ever had to endure. One is disposed to think that the care
and responsibility of three little ones, undertaken in the midst of a
full and busy family life, and in addition to all the duties of that
life, could have been no sinecure, and must have been fraught with many a
difficulty.
 
The Tuckers were much in society, as may indeed have been already
gathered. Mr. Tucker was a man greatly sought after, alike on account of
his position and influence, and because of his personal attractiveness.
Open house was kept; and the large circle of friends and acquaintances
never failed to find a welcome. So many indeed would drop in and out,
that three lunches in succession were occasionally known to take place
at No. 3; and so frequent were the ‘parties’ to which the family was
invited, that sometimes they would appear at three different houses
in the course of one evening. ‘Party’ in those days was a wide term,
embracing divers kinds of entertainment, from a simple musical gathering
to a large ball.
 
Dinner-parties also were numerous. In reference to these, Charlotte
Tucker wrote rather drolly to her sister late in life, speaking
of--‘those formal affairs, which you and I remember in our earlier
days. We _must_ ask So-and-so; and how shall we find gentlemen to
counterbalance Mrs. and Miss out of one house? Slow concerns those great
dinner-parties were; a kind of social duty, which cost much trouble and
expense, and gave not much pleasure. A kind of very stiff jelly, with not
many strawberries in it.’
 
An amusing story is told about these large dinners. In those days
the custom of ‘drinking healths’ had gained sway to an absurd and
objectionable extent; gentlemen being expected to respond to every toast,
and not only to sip their wine, but very often to empty their glasses,
under pain of giving serious offence. Mr. Tucker always had by his side
a decanter of toast and water, from which his glass was filled for the
various toasts; and probably those not in the secret counted him a
marvellously hard-headed man. One day a guest requested leave to taste
this especial wine, which was kept for the host alone, supposing it to
be of some very rare and choice vintage. His request was immediately
complied with; and the face of the _bon-vivant_ may be imagined when he
discovered himself to be drinking toast-and-water.
 
No doubt these dinners _were_ a ‘social duty’; and no doubt some of them
may have been extremely dull. Yet it must not be supposed that Charlotte
did not thoroughly enjoy London society, and did not fully appreciate
intercourse with polished and intellectual minds. That which in her
old age would have been a mere weariness to her, was no weariness in
youth and early middle age. One of her brothers remarks: ‘She was very
sociable, lively, and threw her whole heart into the kindly entertaining
of guests of all ages.’ Such powers of entertaining as she possessed
could not but have gone with enjoyment in the use of those powers.
 
Moreover, the study of different characters, the drawing out of other
people’s thoughts, the gaining of new ideas for herself, must have had
some fascination. And, despite all her kindness, all her readiness to see
the best in everybody, she could not, with her keen sense of humour, have
failed to be a good deal amused with the various foibles and absurdities
which certain people are wont to display, even in the best society, and
when upon their most circumspect behaviour.
 
Ever merry, and ever making others merry, she could, as one friend
says, ‘keep a whole tableful laughing and talking,’ without difficulty.
In fact, whatever the dinner-parties may have seemed to herself, her
own presence, her bright smile and sparkling conversation, effectually
prevented sensations of dulness on the part of others who were there.
 
Whether Charlotte ever had what, in the language of fifty or sixty years
ago, was delicately termed a ‘preference’ for anybody, cannot be known.
Her hand was at least once sought in marriage, while she was still a
girl; and some signs seem to have been visible that she was disposed to
‘like’ the gentleman in question. Her parents, however, disapproved of
the match, and it came to nothing. If at any time she really were in
love, it is pretty certain that she never would have revealed the fact
to any mortal being until sure that her ‘preference’ was returned. The
reticence which was so marked a feature in her otherwise frank and open
nature would undoubtedly have had sway in this direction.
 
Speaking to a friend, long after in old age, she said that in her young
days ‘at home,’ when a certain nameless gentleman was supposed to be
paying his addresses to Fanny, the other sisters were ‘very indignant’
at the idea of any man wishing to break into their sisterly circle. This
probably preceded her own little affair, since Fanny was four years her
senior. The pretty notion of home-life and of the unbroken sisterly
circle had in time to yield before stern facts, as first one sister and
then a second proved faithless to nursery traditions.
 
Wide as was the circle of family acquaintances, the girls possessed few
intimate outside friends. Mr. Tucker rather discouraged such intimacies,
considering that his five daughters ought to be content with the close
companionship of one another. Charlotte had above all her Laura, whom she
devotedly loved; and so satisfying was this friendship that she probably
cared little for others by comparison.
 
Mrs. Tucker, in her quiet way, was no less a power in the house than was
her husband. Though less brilliantly gifted, she was very observant,
very quaint, very wise, a most affectionate Mother, intensely loved and
revered by all her children. She had her own peculiar mode of looking
upon things. For instance,--having noticed that girls in an evening
party, glancing at a mirror, were apt to be disquieted to find their
dresses disorganised, she resolved to have no mirrors at all in her
rooms, hoping thereby to secure greater peace of mind among her guests.
It does not seem to have occurred to her, that a vague uneasiness about
the state of their attire might possibly trouble them quite as much as
even an uncomfortable certainty.
 
Another short story of Mrs. Tucker, showing her quiet, incisive force
of character, may well come in here. She had a very strong objection
to unkind discussion of people behind their backs. On one occasion,
when in the drawing-room of a certain lady, other callers beside
herself were present, and one of the latter rose to leave. No sooner
was the unfortunate lady gone, than the hostess began to speak of her
in disparaging terms. Mrs. Tucker made no immediate observation; but
presently, turning to the hostess, she said mildly, ‘I ought to be
going,--but I really am afraid to do so.’ Much surprised, the other asked
why. ‘Because,’ Mrs. Tucker replied, ‘I am afraid that when I have left
the room you will begin to speak of me as you did just now of Mrs. ----.’
The courteously uttered reproof--a pretty sharp one, however gently
bestowed--was accepted in an equally courteous spirit; and the hostess
earnestly assured her that nothing of the kind should take place.
 
There is no need to imagine, because Charlotte was gay and bright in
society, that she never knew the meaning of depression. Shadows of loss
and sorrow had not yet begun to fall across her pathway; yet even in
those happy days she must have grasped the meaning of ‘down’ as well as
‘up.’ Rather curiously, she spoke of herself in old age as having been
when young ‘subject to very low spirits’; or more strictly, she said that
she would have been so subject, but for the counteracting influences of
‘religion’ and ‘work,’ the latter arising from the former. High spirits
seldom exist without some tendency to occasional re-action. But certainly
the sense of depression, whenever it may have assailed her, was not
allowed to be a weight upon others in her everyday life.
 
It was most likely somewhere between 1847 and 1849 that she began to feel
uneasy about going to certain kinds of amusement. Fanny was the first to
dwell upon this subject, and to be unhappy as to exactly what she ought
or ought not to do. Long years after Charlotte Tucker wrote: Sweet Fanny
suffered _much_ from her sensitiveness of conscience’; and the words may
perhaps in part have borne reference to such debatings as these.
 
Fanny’s gentle, yielding nature went no farther than being troubled. She
did not speak out. But when the same questionings spread to the younger
sister, matters were different. Charlotte was not one who would hesitate
as to action, in the face of her own conscience. To some extent here lies
the gist of the matter. While she could go with a clear and perfectly
easy conscience, able to enjoy herself, and untroubled by doubts, she
probably did so without harm to herself, so long as her life was not
‘given to pleasures,’ that is to say, so long as she did not unduly
_love_ these things, or allow them to occupy a wrong place in her life.
The moment conscience became uneasy, however, there was nothing for her
but to stand still and carefully to consider her next step. For ‘he th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