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도 모르는 것을 폭로와 튼살의 노출
이상(李箱, 1910년 9월 23일 ~ 1937년 4월 17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작가,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로 일제 강점기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 작가이다. 원래의 성은 김(金)씨로,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본관은 강릉 김씨(江陵 金氏)이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 가역반응〉, 〈BOITEUX·BOITEUSE〉, 〈파편의 경치〉 등을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3년 3월 객혈로 총독부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백천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가 기생 금홍(본명 연심)을 만나게 되어, 후에 서울로 올라와 금홍과 함께 다방 '제비'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중단하였다. 1935년에는 다방과 카페 경영에 실패하고 연인 금홍과도 결별하였으며 1936년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낸 뒤 그만두고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으며 《봉별기》가 '여성'에 발표되었다.
그는 12, 12라는 말을 종종했다. 이는 발음으로는 '십이, 십이'가 되지만 억양을 강하게 발음하면 성기의 다른 뜻이 된다. 구본웅의 당조카이자 구본준의 아들 구광모는 후일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이상이 조선총독부를 향해 12, 12라 욕한 것을 후일 접하게 된다.
“‘朝鮮(조선)’ 1930년 2월호를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격렬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이 책의 목차에서 총독, 정무총감, 재무국장 등 일본인 최고위층의 정책논설과 함께 이상(李箱)의 장편소설 ‘十二月 十二日(십이월 십이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월간지에는 이외에도 조선인의 글로 이능화(李能和)의 ‘朝鮮喪祭禮俗史(조선상제례속사)’와 안확(安廓)의 ‘各國(각국)의 綴字論(철자론)과 한글문제’ 등도 수록돼 있었다. ‘十二月 十二日’은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연재되었다.
소설 제목 ‘십이월 십이일’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에 파동치는 전율을 느꼈다. 오래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이상이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에 대해 해괴한 욕설을 퍼부은 작품을 썼다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큰 글씨로 12, 12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했다. 이상은 후일 자신의 친구들 몇 명에게만 십이 십이의 본의미를 살짝 알려주었다.
소설 속에서 12월 12일은 주인공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날인 동시에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날이며, 주인공이 죽을 날이기도 한 동시에 참으로 살아야 할 날이라고 깨닫는 날이기도 했다. 구광모는 '12, 12로 상징되는 욕설과 함께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라고 절규하는 그의 소설 속의 외침이 천둥소리처럼 나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고 평하였다. 한글과 그 발음을 전혀 모르던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은 12, 12를 단순히 숫자로만 이해했고 한글 발음으로 했을 때 욕설이 된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상은 숫자를 이용해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료들을 골탕먹였다. 시 ‘烏瞰圖(오감도)’에 나오는 “13人(인)의 兒孩(아해)가…”가 그렇고, 이상이 ‘제비’ 다방 다음으로 개업하려고 간판을 붙였다가 그 의미가 탄로나 허가 취소된 '69 다방' 등도 그렇다. 그 외에도 남녀의 성교를 상징하는 33과 23(二十三, 다리 둘과 다리 셋의 합침) 및 且8(한글로 차팔 또는 조팔이라 읽음. 발기한 남성 성기 또는 18과 대칭을 나타냄) 등의 표현 으로 조선총독부를 골탕먹였다.
이상의 필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근무시, 건축 현장의 일본인들이 그를 "이씨"란 의미로 "李さん(리상)"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시인 김기림이 주장하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림에 재주가 뛰어난 이상이 디자인한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는 자필 서명이 있어, 건축기사 근무 이전에 이미 이상이란 필명을 쓰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 필명은 화가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연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 때 받은 화구상자가 오얏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였기에 ‘이상(李箱)’이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소설가 이석훈(李石薰), 시인 김기림(金起林),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아동문학가 현덕(玄德), 소설가 안회남(安懷南) 등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들 가운데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이 이상보다 한 달 먼저 병으로 사망하였다.
말년의 이상은 술과 여자를 즐겼다고 한다. 동료 문인이자 친구인 박태원은 이상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었다."면서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고 하기도 했다.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옮겨가 1937년 사상불온 혐의로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친구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보고도 모르는 것을 曝露(폭로)식혀라! 그것은 發明(발명)보다도 發見(발견)! 거기에도 勞力(노력)은 必要(필요)하다.”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사진첩에 수록된 이상의 자필 문구)
얼마전 현재 한양공대 야간부에 재학 중인 이연복 군이 낡은 노오트 한 권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이 군은 초면이었으나 그가 문학청년이며 특히 이상을 좋아하고 있음을 곧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보이는 노오트는 이상의 일본어시작 습작장임이 곧 짐작되었다. 그 노오트를 이 군이 발견하게 된 것은 그의 친구인 가구상을 하는 김종선 군의 집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서 그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김종선 군의 백씨가 친지인 고서점에서 휴지로 얻어온 그 노오트는 그 집에서 그야말로 휴지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서 백 면 내외의 노오트가 이미 십분지구(十分之九)쯤 파손되고 십분지일(十分之一)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ㅡ조연현, 「이상의 미발표유고의 발견」,『현대문학』,1960. 11
위 내용에 이상이 12. 12를 자주 말했는데 결국 전두환 독재자의 12 12사태가 생각난다.
이상은 보고도 모르는 것을 폭로하라고 말할 정도로 천재였다. 보고도 모르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는 진리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이 **회라는 것을 말하여도 알수 없다.
보고도 모르는 것은 폭로하라고 하였는데 잘 보이지도 않는 튼살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지한의원에 튼살로 상담하러 내원한 환자가운데 보통 부모님은 튼살 치료를 말리기 위해 잘 안보인다고 말하고 환자는 튼살이 타인에게 보일까봐 심각하게 여긴다. 그 이유는
보통 보호자와 같이 오는 튼살 환자의 경우 치료비를 부모님이 대기 때문에 부모는 말리는 편이다.
튼살은 보통 2-3미터 사회적 거리를 띠면 잘 안보이지만 자기눈으로 자기몸은 가깝게 몇십 cm로 보기 때문에 잘 보이는 것이 있다. 또 사람들은 타인의 모습에 관심이 없는데 자기는 본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단체 사진에서 유독 잘 보이는 얼굴은 내 얼굴이다.
아무튼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에서는 튼살을 ST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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