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편지는 없다와 동양평화론 사마천의 용기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편지는 없다와 동양평화론 사마천의 용기
유명한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도 어머니에게 사형판결 후 유서를 겸한 편지를 보냈다.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법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안중근 의사 천주교 세례명) 올림
필자는 처음에 이 내용을 접했을 때 아무리 독립운동했던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깨끗이 죽으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믿기지 않았다. 역사저널 그날에도 등장하고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 조마리아 여사는 편지를 쓰지 않았고, 대신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이 면회를 갔을 때 어머니의 말을 전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혹시 안중근 동생들이 형을 빨리 죽이면 가족들만 살려줄게 하는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받아서 일찍 죽일려고 하는 술책에 말려들었는지 궁금했는데 안정근과 안공근 모두 독립운동가였고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을 후회하였다. 참고로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변절,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토 히로쿠니)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라는 발언을 하고, 나중에 소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찰에서 이토 히로쿠니에게 공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저질렀다. 이 일은 친일 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으며, 이에 분노한 김구가 안준생을 죽이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암살 계획을 세웠었다는 대목이 <백범일지>에 있다. 그런데 2014년 광복절 특집으로 M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안중근 -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는 안준생의 퍼포먼스가 일제에 의해 꾸며진 퍼포먼스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강룡: 안중근 의사의 사형 구형 소식을 듣고 조마리아 여사가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게 사실인가요? 안중근 의사와 어머니 사이에 오갔을 대화나 서신에 관한 이야기가 평전에 나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황재문:조마리아 여사의 편지에 대한 부분을 다루지 않은 것은, 편지(특히 편지 내용)에 대한 분명한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이 면회를 했을 때 어머니의 말씀을 전했다는 내용이 만주일일신문에 실려 있습니다. 신문에서 전한 내용이 사형판결을 받는다면 깨끗이 죽어서 명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필자가 안타까워 하는 점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완결되지 못하고 순국하신 것이다.
그의 재판을 맡았던 일본 판사 히라시는 그가 그의 책(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수 있도록 그의 사형일을 재판이 끝나고서 몇달 후에 집행하려고 했으나, 도쿄에서의 직접명령으로 인해 미룰 수 없었다고 한다. 일본이 3국간섭으로 뤼순을 청에 반환하고 한중일 3국이 공동관리하는 중립지대를 만들며, 그곳에 3국 평화회의를 설립하고 3국에서 대표를 파견하며 동양 3국의 의견을 조율하며, 3국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을 창설하고 은행, 공용화폐 등을 만들자는 주장이 실려있지만 서문만 완성하고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 사형당해 뤼순 감옥 묘지에 묻혔다.
필자 생각에는 안중근 의사가 너무 결벽증처럼 불의를 싫어하여 항소를 하지 않고 목숨을 빨리 끊은 것에 대해 동양평화론을 짓지 못해서 매우 안타깝다. 분명히 오래 살아 계시고 동양평화론등을 저술하여 세상에 알리고 세계 여론에 호소했더라면 사형은 피해갈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빠른 죽음이 더욱 빛나게 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안중근 의사의 딱 한가지 부족한 점은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서라도 아버지와 약속과 필생의 대업을 이루려는 사마천과 같은 비겁해 보이는 용기이다. 안중근 의사는 살아서도 전설적인 존재였고 돌아가셨을때도 유해 자체가 대단한 존재였다. 안중근은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처형당한 뒤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당국은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넘겨주지 않았고, 결국 안중근은 고국이 해방을 맞이하였음에도 돌아오지 찾지도 못하고 있다.
아래는 동양평화론의 전문이다.
東洋平和論동양평화론
서문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실용기계연구에 농업이나 상업보다 더욱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새 발명인 전기포(電氣砲: 기관총),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잠수함)은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물을 해치는 기계이다.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희생물(犧生物: 하늘과 땅이나 사당의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쓰는 짐승, 소, 돼지, 양 따위)처럼 버려,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마음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예로부터 동양민족은 다만 문학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도무지 한치의 유럽 땅도 침입해 뺏지 않았다는, 오대주(5大洲)위의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백 년 이래로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다. 그 중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서구(西歐)나 동아(東亞)에 어느 곳이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神)과 사람이 다같이 성낸 까닭에 하늘이 한 매듭을 짓기 위해 동해 가운데 조그만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 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다.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하는 이치이다.
당시 만일 한·청 두나라 국민이 상하가 일치해서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해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를 도왔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나 어찌 그것을 예상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한·청 두 나라 국민은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본군대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물건을 운반하고, 도로를 닦고, 정탐하는 등의 일의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거기에는 두가지 큰 사유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때, 일본덴노('천황'으로 되어 있는 것을 필자가 고쳤음--필자)가 선전포고하는 글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대의(大義)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의 빛보다 더 밝았기 때문에 한·청 인사는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동심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황백인종(黃白人種)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졌던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큰 하나의 인종사랑 무리[애종당(愛種黨)]를 이루었으니 이도 또한 인정의 순리라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동안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소리 한번에 크게 부수었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국과 청국 두 나라의
뜻있는 이들이 기약없이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이나 일 헤쳐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천만 번 의외로 승리하고 개선한 후로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같은 인종인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만주의 장춘(長春)이남인 한국을 조차(租借: 땅세를 주고 땅을 빌림)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명성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보이게 되었다. 슬프다.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와 같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로다.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에 대한 문제는 이미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 이목에 드러나 금석(金石)처럼 믿게 되었고 한·청 두 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음에랴! 이와 같은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도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한두 사람의 지모(智謀)로 어찌 말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서세동점(西勢東漸)]환난을 동양 사람이 일치 단결해서 극력 방어함이 최상책이라는 것은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리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치고 우의(友誼)를 끊어 스스로 방휼의 형세[방휼지세(蚌鷸之勢):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물고 물리며 다투는 형세. 이때 어부가 나타나면 힘 안들이고 둘 다 잡아가게 된다고 해서 어부지리(漁夫之利)라는 말이 생겼다--필자]를 만들어 어부를 기다리는 듯 하는가. 한·청 양국인의 소망은 크게 깨져 버리고 말았다.
만약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한·청 두나라 사람의 폐부(肺腑: 체내의 모든 기관, 부아, 깊은 마음 속--필자)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의 앞잡이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수억 황인종 가운데 수많은 뜻있는 인사와 정의로운 사나이가 어찌 수수방관(袖手傍觀:팔짱을 끼고 앉아 남의 일 바라보듯 함--필자)하고 앉아서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르빈에서 개전하고, 담판(談判)하는 자리를 여순(旅順口)로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여러분의 눈으로 깊이 살펴보아 주기 바란다.
1910년 경술 2월
대한국인 안중근
여순옥중에서 쓰다.
전감(前鑑)
(전감: 앞사람이 한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경계한다. )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의 어느 주(洲)를 막론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대세(大勢)의 번복(飜覆)이고, 알 수 없는 것은 인심의 변천이다.
지난날(갑오년:1894년) 청일전쟁을 보더라도 그때 조선국의 좀도둑[서절배(鼠竊輩)] 동학당(東學黨)이 소요를 일으킴으로 인해서 청·일 양국이 함께 병력을 동원해서 건너왔고 무단히 개전(開戰)해서 서로 충돌하였다. 일본이 청국을 이기고 승승장구, 요동의 반을 점령하였다. 군사요지인 여순을 함락시키고 황해함대를 격파한 후 마관(馬關)에서 담판을 벌여 조약을 체결하여 타이완(대만)을 할양받고 2억원을 배상금으로 받기로 하였다. 이는 일본의 유신(維新)후 하나의 커다란 기념사이다.
청국은 물자가 풍부하고 땅이 넓어 일본에 비하면 수십배는 되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패했는가.
예로부터 청국인은 스스로를 중화대국(中華大國)이라 일컫고 다른 나라를 오랑캐[이적(夷狄)]이라 일러 교만이 극심하였다. 더구나 권신척족(權臣戚族)이 국권을 멋대로 희롱하고 신하와 백성이 원수를 삼고 위아래가 불화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욕을 당한 것이다.
한편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로 민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다툼이 끊임이 없었으나, 외교상의 전쟁이 생겨난 후로는 집안싸움[동실조과지변(同室操戈之變)]이 하루아침에 화해가 되고 연합하여, 한 덩어리 애국당을 이루었으므로 이와 같이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친근한 남이 다투는 형제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러시아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당일에 동양함대가 조직되고 프랑스, 독일 양국이 연합하여 요코하마(橫濱)해상에서 크게 항의를 제출하니 요동반도가 청국에 돌려지고 배상금은 감액되었다. 그 외면적인 행동을 보면 가히 천하의 공법(公法)이고 정의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호랑이와 이리의 심술보다 더 사납다.
불과 수년 동안에 러시아는 민첩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여순을 조차(租借)한 후에 군항(軍港)을 확장하고 철도를 부설하였다. 이런 일의 근본을 생각해 보면 러시아 사람이 수십년 이래로 봉천(奉天)이남 대련, 여순, 우장(牛莊)등지에 부동항(不凍港)한 곳을 억지로라도 가지고 싶은 욕심이 불같고 밀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국이 한번 영·불 양국의 천진(天津)침략을 받은 이후로 관동(關東)의 각 진영에 신식 병마(兵馬)를 많이 설비했기 때문에 감히 손을 쓸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단지 끊임없이 침만 흘리면서 오랫동안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셈이 들어맞은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해서 일본인 중에도 식견이 있고 뜻이 있는 자는 누구라도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이유를 따져 보면 이 모두가 일본의 과실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구멍이 있으면 바람이 들어오는 법이요 자기가 치니까 남도 친다는 격이다. 만일 일본이 먼저 청국을 치지 않았다면 러시아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행동했겠는가. 가히 제 도끼에 제발등이 찍힌 격이다.
이로부터 중국 전체의 모든 사회 언론이 들끓었으므로 무술개변[(戊戌改變):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등 변법파(變法派)에 의한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 1898년 이른바 백일유신(百日維新)은 겨우 100일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그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이 자연히 양성되고 의화단[(義和團): 중국 백련교계(白蓮敎系) 등의 비밀결사. 청일 전쟁후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에 항거해서 1900년대에 산동성(山東省) 여러 주현(州縣)에서 표면화하여 북경, 천진 등지에 확대되었다. 반제반만배척운동(反帝反滿排斥運動)의 주체였다]이 들고 일어났으며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는 난리가 치열해졌다.
그래서 8개국 연합군이 발해 해상에 운집하여 천진이 함락되고 북경이 침입을 받았다. 청국황제가 서안(西安)으로 파천하는가 하면 군민(軍民) 할 것 없이 상해를 입은 자가 수백만명에 이르고 금은재화의 손해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참화는 세계 역사상 드문 일이고 동양의 일대 수치일 뿐만 아니라 장래 황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분열경쟁이 그치지 않을 징조를 나타낸 것이다. 어찌 경계하고 탄식하지 않을 것인가.
이때 러시아 군대 11만이 철도 보호를 핑계로 만주 경계지역에 주둔해 있으면서 끝내 철수하지 않으므로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 구리노(栗野)가 혀가 닳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폐단을 주장하였지만 러시아 정부는 들은 체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군사를 증원하였다.
슬프다! 러·일 양국간의 대참화는 끝내 모면하지 못하였다. 후략 전문은 아래 http://twitaddons.com/forum/detail.php?id=39993&group_id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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