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3일 월요일

징비록 비격진천뢰와 화상흉터치료

징비록 비격진천뢰와 화상흉터치료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조선 중기에 군사목적으로 사용된 폭탄이다. 조선 선조 때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처음 발명하였다.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여 5~6백보의 사정거리를 가지는 일종의 시한 폭탄이다. 둥근 박 모양의 형태에 표면은 무쇠로 처리를 하였으며, 내부는 화약과 철조각(빙철) 등을 장전하게 되어 있어 폭발 시 파편이 튀어나가도록 하였다. 비격진천뢰는 지름이 21cm, 둘레가 68cm로 도화선을 감는 둥근 나무 그릇과 얇은 철조각, 뚜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둥이가 넓고 포신이 좁은 모양으로 생긴 완구를 화포로 이용해 발사하였다.
비격진천뢰에 대해 이서(李曙)가 지은 화포식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그 체형은 박과 같이 둥글고 부리는 네모가 졌으며, 그 부리에는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다. 내부에는 도화선인 약선을 감는 목곡(木谷)이 있고, 또한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竹筒)이 있으며 내부에는 빙철(憑鐵)이 채워진다. 특히 목곡은 폭파시간을 조절하는 장치로서 그 재료는 단목(檀木)을 사용하며, 그 골을 나사모양으로 파서 폭파를 빠르게 하려면 열 고비로, 더디게 하려면 열다섯 고비로 하되, 중약선을 감아 죽통에 넣어 한 끝은 죽통 아래 중심에 꿰고, 또 한 끝은 죽통 위 개철 밖으로 내되 두 치를 넘지 못하게 하며, 이 때에 죽통과 개철 주위에는 홈이 생기지 않도록 종이로 밀봉한 뒤 화약은 허리구멍으로 채워넣고 격목으로 구멍을 막은 뒤 안구에 실어 발사하되 불꽃을 막으려면 진천뢰 심지에 불을 붙이고 나서 완구 심지에 불을 붙인다.
이서, 화포식언해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는 방식으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 가장 좋은 무기였지만 실전에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가, 1592년 선조 2591일 박진이 경주를 수복할 때 비격진천뢰를 성 밖에서 발사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선조실록에는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쏘자, 이것이 뭔지 몰랐던 적들이 구경하느라고 서로 밀고 당기며 만지다가 포가 터져서 적장을 포함한 20명이 즉사를 하여 이튿날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비격진천뢰로는 육군박물관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 외에 경남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고현성지에서 발굴된 것과 진주성지에서 발굴된 파편, 그리고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석마리에서 발굴되어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있다.
 
2015221일 방송된 KBS 1TV 대하사극 징비록’ 3회에서는 조선의 기밀 무기 비격진천뢰의 도면이 간첩에 의해서 유출될뻔할 위기에 봉착했다. 정해왜변 당시 적장과 반란민들을 처형시키는데 반역자 사화동이 살기 위해 비격진천뢰라고 외치자 선조(김태우 분)와 류성룡(김상중 분)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류성룡이 사화동에게 네가 어찌 그걸 알고 있느냐고 묻자 사화동은 일본에서 들었다. 조선의 군사 기밀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이다. 말하면 나를 살려주겠는가?”하고 협상을 하려고 했다.
류성룡은 옥사에 갇힌 사화동에게 물어 조선인 반민이 군기시에 세작으로 들어가 도면을 훔치기로 한 사실을 알아냈다. 군기시의 기록을 살피며 어머니가 아프다는 핑계로 도망친 세작이 살던 곳을 찾아냈지만 이미 세작들은 떠난 뒤였다. 류성룡은 군사들은 남해안으로 보내고, 신립에게는 제물포로 갈 것을 제안한 뒤 매미는 벗은 허물과 다른 부위에 있는 금선탈각의 지혜를 보였다. 류성룡의 제안 덕분에 제물포로 빠져나가려던 세작들은 신립의 활에 맞아 모두 잡혔고, 비격진천뢰 도면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비격진천뢰가 경주성 안에 떨어지자 그게 폭발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왜병들이 주위에 몰려들어 웬 쇳덩어리가 날아들어왔나 하고 구경(심지어 굴리면서 갖고 놀았다던가 또는 장군이 발로 차고 놀다가 병사들 줬다는 설화도 있음)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펑! ! ! 터지면서 왜병 수십 명이 살해당했다. 그러자 남은 왜병들은 겁에 질려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임진왜란의 경주성 이외에도 임진년 7월 고경명 의병군이 금성을 공격할 때, 계사년에 우배선 의병군이 향교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역시 계사년에 이순신 함대가 웅포 해전에서 육상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쓰였다. 계사년의 2차 진주성 전투와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서도 사용하는 등, 널리 활용하였다. 유성룡의 진사록에서 임진년 10월 기사를 보면 북쪽 지방에도 이미 비진천뢰가 각 지역 무기고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정만록에서 중인이었던 저자가 15926월 용인 전투 패전을 논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이장손이 수년 전에 비진천뢰를 만들어 쏘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실제 비진천뢰 발명 시기는 임진년 이전이 될 확률이 높다. 안동의 김해 의병대는 특이하게도 계사년 224일 반암의 야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진천뢰를 운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향병일기
 
비격진천뢰는 時限爆彈이다. 그런데 화약에 의해서 화상사고가 발생할수 있다. 중국 새해 춘절에 불꽃놀이를 하는 이유는 새해의 소원을 빌고 더불어 귀신을 쫓아서 액운을 막기 위해서 불꽃놀이를 한다. 축제라겠지만 화재로 화상을 입거나 직접 불꽃에 살갗이 타들어가 끔찍한 재앙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만약 화상흉터 사고가 발생한다면 피부의 진피 대다수를 차지하는 콜라겐을 끊어서 재생시키는 이미지한의원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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