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천연두와 곰보 여드름 흉터치료
1879년 그루지야 카프카스 지역의 도시 고리에서 태어난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쥬가쉬빌리는 네 명의 아이들 중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아이였다. 애칭은 소소. 구두직공이던 그의 아버지 비사리온 쥬가쉬빌리는 술만 마시면 아들과 아내를 마구 구타했는데 스탈린이 11살때 마을 사람과 싸움끝에 살해당했다. 잔인한 아버지가 살해된 뒤 어머니는 카테리나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삯바느질과 세탁일을 하며 어린 이오시프를 키웠다.
이오시프의 신체조건은 좋은 편은 아니었다. 160센티미터의 작은 키에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곰보자국이 남았고 10살때 마차에 치어 왼쪽 발꿈치가 만성적으로 마비되곤 했다. 카테리나는 글을 몰랐으나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려고 했다.
세기의 악당, 악인은 왜 매력적일까? 북 카리반, 이종호 지음, 페이지 319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 이오씨프 위싸리오노비치 쓰딸린, 1879년 12월 21일 ~ 1953년 3월 5일)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운동가 ·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 언론인이다.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4년 4월 3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을 지냈다. 1941년 5월 6일부터 194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를 지내고 1945년 다시 총리에 재선되었으며 1941년 7월 1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부장관을 겸하였다. 1945년 6월 27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련군 대원수였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가 중 하나였던 소련을 산업화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과학 기술의 개발에도 중점을 두어 과학과 교육, 물리학자 등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후에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발판을 만들었다.[출처 필요]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독일이 1941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군사정책을 발휘하지 못하여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으나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독일군의 항복과 함께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되었으나 죽음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고 격하당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산주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고 국가 위상이 곤두박침에 따라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집권 이전에는 '선생님'이라는 애칭이 있었으나,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조직자',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사후에는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로 재평가받고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스탈린'이라는 가명은 '강철'을 뜻하며, 트빌리시 신학교 시절의 필명으로 쓰던 것이 굳어져서 본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본래 이름은 조지아어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조지아어: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이며, 어릴 적의 이름이자 애칭은 소소(조지아어: სოსო)다.
집권 과정, 집권 이후에 많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고 비판을 받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독재자 또는 살인마라는 비판도 있다. 나오미 울프는 스탈린이 히틀러를 연구했다고 하였다.
스탈린은 생전에도 제4인터내셔널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관료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소련을 관료국가로 만들었다"면서 강도높게 비판받았으며, 사후에는 생전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숙청들로 거세게 비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공범이라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의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지난달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고 지적했다. 비정상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새디스트였고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비판도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어쩔수없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지도자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북한에서 자신의 개인왕국을 세운 이후였기 때문이었다.
1953년 3월 6일, 스탈린이 사망한 다음 날 저녁 공산군들은 모든 전선에서 불꽃과 신호탄을 하늘에 올렸으며 각 병사는 스탈린에 대한 고별인사로 동시에 공중을 향하여 조총 사격을 하였다. 스탈린의 사망은 동서해빙과 외부 세계에 대한 소련 지도층의 새로운 접근 방식과 태도 변화를 초래했다.
김일성은 대한민국에서 미국이 손을 떼고 일본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이 진심으로 전쟁을 시작하자 전황을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드디어 전쟁 종결과 평화 달성의 주도권을 잡을 시기가 왔다며 좋아했다. 스탈린은 전쟁을 종결하자고 하였으나, 김일성이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자 지원을 감소시켰다. 또한 김일성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고 확신하여 경계하게 된다.
스탈린, 마오쩌둥, 히틀러 이 세명은 20세기 인간 학살의 대명사이니 전체 역사에 역적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스탈린는 천연두 곰보자국등 콤플렉스를 권력욕으로 변화시켰다고 본다. 20세기만 해도 두창이라고 불리는 천연두의 곰보 흉터가 맹위를 떨쳤지만 서양의학이 결국 유일하게 해결을 했다.
1975년 말이 되면 천연두가 버티고 있는 곳은 아프리카의 뿔밖에 남지 않았다. 도로가 거의 없는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의 사정은 열악했다. 내전과 기근, 난민들 역시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977년 초중반부터 호주의 미생물학자 프랭크 페너의 주도하에 이 두 나라에서 철두철미한 감시 및 격리 및 접종 작전이 실시되었다. 작전은 거의 목적을 달성했고, 페너와 그 팀은 천연두 박멸에 큰 역할을 해냈다. 최후의 소두창(Variola minor) 환자는 1977년 10월 26일 소말리아 메르카의 병원 요리사 알리 마오우 마알린이었다. 소두창보다 심각한 천연두(Variola major)의 최후의 자연감염자는 1975년 10월 방글라데시의 2세 여아 라히마 바누였다.
1979년 12월 9일부터 저명한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위원단이 여러 국가에서의 철저한 확인작업을 한 결과, 천연두의 세계적 박멸은 확실해졌다. 마침내 1980년 5월 8일 WHA는 천연두의 박멸을 선언했다.
1978년 영국 버밍엄에서 최후의 천연두 감염자(자연이 아닌 실험실에서의 감염)가 두 명 발생했으며, 그 중 한 명은 치명적이었다. 의학사진가 재닛 파커는 버밍엄 의대에서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1978년 9월 11일 죽었다. 당시 천연두 연구를 책임지던 과학자 헨리 베드슨(Henry Bedson) 박사는 자살했다. 이 사건을 고려하여 그때까지 보존되고 있던 천연두바이러스 표본들이 모두 파괴되거나 BSL-4 설비를 갖춘 WHO 지정 연구실들(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러시아 바이러스 및 박테리아 전염매개체 국립연구센터)로 옮겨졌다.
1986년, 세계보건기구는 처음으로 바이러스의 파괴를 권고했으며, 이후 1993년 12월 30일을 파괴 일자로 지정했다가 1999년 6월 30일로 연기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인해 2002년 세계보건회의는 특정 연구 목적으로 천연두바이러스 표본을 임시로 보유하는 것을 허가하는 데 동의했다. 현재 존재하는 표본들을 파괴하면 천연두 연구와 관련된 위험부담이 줄어들 것이다. 이 표본들은 천연두가 발생했을 때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무 쓸모도 없다. 일부 과학자들은 천연두바이러스 표본들이 새로운 백신이나 항바이러스제의 개발, 진단실험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10년 WHO가 임명한 공중보건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가반은 미국과 러시아가 천연두바이러스 표본을 계속 보유함으로써 그 표본을 이용할 수 있는 공공보건을 위한 필수적인 목적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평가는 과학자 공동체, 특히 특히 WHO의 천연두 박멸작전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위 내용을 보면 아직도 생물학적인 무기로 만들려는 강대국때문에 문제가 남아 있다.
요즘에는 천연두 때문에 얼굴에 곰보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여드름이나 기타 질환으로 울퉁불퉁한 흉터가 생긴다. 여드름 흉터의 경우 한의원이나 의원등에서 치료를 받지만 여드름 흉터침 치료 역사를 가지고 한방 피부과 전문의가 치료하는 한의원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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