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일 수요일

드라마 역적의 석전과 돌에 맞은 흉터치료

드라마 역적의 석전과 돌에 맞은 흉터치료


2017131일 밤 10시에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2회에서는 홍길동(이로운 분)이 힘을 숨기기 시작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홍길동은 개경으로 떠난 아버지 아모개(김상중)를 기다리다가 형 홍길현(이도현)의 재촉에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홍길동은 형보다 더 많은 나무가 담긴 지게를 지고 갈 수 있었지만 아모개의 말을 떠올리며 일부러 힘이 없는 척했다.
아모개는 홍길동에게 아기장수 얘기를 해 주며 어떤 일이 있어도 힘을 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홍길동은 도련님이 진두지휘하던 석전놀이 연습 중에도 힘을 숨기느라 애를 썼다. 홍길동은 얄미운 도련님을 단숨에 돌팔매질로 맞출 수 있었지만 참았다.
아모개가 몰래 축적한 재산 탐내는 조참봉 부인, 시숙부를 불러 뒷조사하게 한다. 형방과의 관계는 못알아냈지만 아모개네가 이밥에 글공부를 한다는 것도 확인하는 대감부인은 아모개의 숨겨둔 재산을 가질 생각을 합니다. 노비가 주인 몸의 생채기를 내면 노비를 죽일 수 있다 말하며 노비의 재산을 가로챌 생각을 한다.
시장에서 시숙부는 길동의 엄마를 보고 길을 가는데 내가 먼저 물건을 골랐다는 식으로 계속 시비를 걸었다. 길동의 엄마는 조용히 넘어가려고 하지만 결국 몸싸움을 하다가 바위에 배로 넘어진다. 그 모습을 본 길동은 결국 화가나서 돌을 던지고 그 돌은 나무도 바위도 뚫는다. 결국 튄 돌에 생채기가 난 시숙부가 살려달라고 한다. 그리고 아모개가 길동을 말려요. 시숙부는 "노비가 양반을 죽인다"며 포졸들을 데려와요. 아모개는 자기가 그랬다고 끌려갔다.
 
석전 [石戰]음력 정월 대보름날 각 지방에서 행하던 남성의 돌던지기놀이로 편쌈이라고 하며 한자어로는 석전(石戰)’ 또는 편전(便戰)’이라고 쓴다.
석전 놀이는 들판에서 한 마을 혹은 한 지방이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 수백보의 거리를 두고서 돌팔매질을 하는 것으로 패하여 달아나는 편이 진다. 처음에는 먼 곳에서 던지다가 놀이가 점차 고조되면 서로 가까이서 돌을 던진다. 석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수서 隋書고구려전에 보이는바, “고구려는 매년 정초에 패수(浿水:지금의 대동강) 위에 모여 좌우 두 편으로 나누고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운다. 이 때 국왕은 요여(腰轝)를 타고 와서 구경한다.”고 하여 고구려에서는 석전이 하나의 국가적 연중행사로서 국왕의 참석하에 행하여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사신우 135월조에는 왕이 석전놀이를 연암(鳶岩)에서 보고 그 이튿날에도 석전 구경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때에는 고구려와는 달리 5월 단오에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에는 석전을 주로 담당한 석투반(石投班)과 석투군(石投軍)을 별도로 설치하여 석전을 장려하였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때와 세종 때에 석전이 성행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1419(세종 1) 4월에는 왕이 태조 시대에 있던 날쌘 석전대(石戰隊)가 폐지된 것을 걱정하고 이를 부활시킬 목적으로 석전자발대를 모집하였다.
이 모집에 응하는 자는 천민일 경우 복호(復戶:부역·조세를 면해주던 일)시키고, 양민일 경우 서용(敍用:일정한 품급으로 임용하던 일)을 시키라고 하였다. 또한 세종 35월조에는 상왕(上王)인 태종이 병환중임에도 불구하고 석전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여 상왕으로 하여금 친히 구경을 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부상자에게는 어의(御醫)를 보내어 치료하여주고, 선수에게는 상을 내렸다고 한다. 1426(세종 8)1427년에는 명나라 사신이 친히 구경하기를 청하여 이틀 동안 종루(鐘樓)에 올라서 구경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4366월에는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에게 명하여 석전군으로 야인(野人)을 방어하라고 하였다.
한편, 1508(중종 3) 삼포왜변 때에는 안동과 김해의 석전선수 수백 명을 모집하여 왜인을 쳐서 격파하고 실전상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안동대도호부 풍속 석전조·김해도호부 풍속조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해마다 48일에 아이들이 성 남쪽에 모여 석전 연습을 하고, 단옷날에는 장정들이 모여 좌우로 편을 나누어 기를 들고 북을 치며 돌을 빗발같이 던져서 승부를 결정하는데, 상하거나 죽어도 후회하지 않고 수령이 금하여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18세기말 유득공(柳得恭)경도잡지 京都雜志석전조에는 삼문(숭례문·돈의문·흥인문) 밖과 아현(阿峴)사람이 만리재萬里峴에서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웠는데 삼문 밖 사람이 이기면 경기도에 풍년이 들고, 아현사람이 이기면 다른 도에서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는 기록과이 있다.“이 석전이 한창 심할 때는 함성이 천지를 울리는 것 같고, 이마가 깨지고 팔이 부러져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당국에서는 왕왕 금하였다.”고 하여 당시 서울의 석전 광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한편 동국세시기에도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이와 같은 석전놀이가 행하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제는 우리나라 세시풍속의 하나인 석전(石戰)놀이조차 폐지시켰다. 석전 놀이는 전쟁 준비를 하는 측면과 풍년을 점치는 세시풍속으로 발달했는데 문제는 돌에 맞아 상처를 입고 부상에 흉터가 생긴다. 살다보면 돌은 아니겠지만 물건에 맞거나 넘어져서 이마가 깨지거나 다쳐서 흉터가 생길수 있다. www.imagediet.co.kr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에서는 위와 같이 뜻밖의 사고에 의해서 발생한 흉터를 흉터침, , 한약 재생약침등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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