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3일 금요일

끊임없는 수적과 팽형당한 이시카와 고에몬 화상흉터 치료

끊임없는 수적과 팽형당한 이시카와 고에몬 화상흉터 치료


중종 때인 1526년에는 포도장 윤희평이 강화도 근처에 있는 아차도와 보로음도, 말질도를 수색해서 76명을 붙잡아 개성부 감옥에 가뒀다. 왕과 신하들은 체포하고 처형해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수적[해적]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들은 그 원인을 무지하고 잔인한 백성들 탓으로 돌렸지만 백성이 도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가혹한 수탈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끝까지 모른 척했다. 처형당한 자들 중에서 처음부터 도적이었던 자도 없고, 위험천만한 도적이 되고 싶은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칼을 들고 노략질을 하고 잔인해진 것은 그것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명한 도적 이시카와 고에몬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아들과 함께 들어가기 죽기 직전에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바닷가의 모래가 모두 없어진다고 해도 도적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불합리한 세상은 늘 저항을 불러온다.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조선백성실록 우리 역사의 맨얼굴을 만나다, 정명섭 지음, 북로드, 페이지 148
 
이시카와 고에몬(일본어: 石川五右衛門 いしかわ ごえもん, 생년 미상 ~ 1594108)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도적이다. 분로쿠3(1594)에 붙잡혀, 교토 산조오하시에서 외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실존했던 인물인지 의견이 분분했으나, 예수회 선교사의 일기 등의 사료로, 동명의 인물이 실재했다고 밝혀졌다. 기름이 끓자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들어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 처형에 대한 설화도 굉장히 다양한데,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계속 들어 결국 자신은 최후를 맞았지만 아들은 사면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반면, 처음엔 아들을 들고 버티다가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들을 솥 밑바닥으로 밀어넣어 최대한 고통받지 않게 죽인 다음, 다시 그 시신을 들어올려 밖으로 나오려고 저항하다가 결국 최후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꼈던 보물인 치도리 향로를 훔치려다 향로가 스스로 울어서 히데요시가 깨는 바람에 잡혔다. 그 처벌로 산 채로 가마솥에 넣어 기름을 끓여 죽였다고 한다. 역사서에는 단지 "고에몽이라는 도둑이 잡혀서 삶기워 죽었다"정도의 얼마 안 되는 기록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민간에서 널리 이야기가 퍼지고 가부키 등으로도 만들어졌다. 권력자에게 불만을 가진 민중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인물이면서도, 막부가 아니라 막부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도요토미 정권에 반항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고에몽을 칭송하는 것이 막부 정권에도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끓는 가마솥에 팽형으로 죽여도 도적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근본적인 원인이 탐관오리나 먹고살기 힘들어서 근절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질병에서도 지엽적인 증상 말고 뿌리를 치료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화상을 당해서 화상흉터를 입어서 그 정신적인 트라우마의 후유증으로 불면이나 대인기피증등을 앓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화상이 입었을 당시 화재나 끓는 물 등에 대해서 자꾸 상기하고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등을 앓는 경우인데 이런 문제도 실제 화상흉터를 없애는 것, 즉 몸에 남은 흔적을 지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 www.imagediet.co.kr 에서는 불에 데인 화상의 흉터를 흉터침, , 한약 재생약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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