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3일 금요일

박인량의 오자서의 글과 시각의 중요성 성형흉터치료

박인량의 오자서의 글과 시각의 중요성 성형흉터치료


박인량 [朴寅亮]은 고려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翰)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일찍이 거란이 압록강 동쪽지역에 야심을 가지고 강을 건너와서 동안(東岸)에다 보주(保州 : 평안북도 의주)를 설치하여 고려에서 여러 차례 반환을 요청해도 듣지 않다가, 1075(문종 29) 박인량이 지은 진정표(陳情表)가 요주(遼主)를 감동시켜 철거하게 되었다.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1080년에는 예부시랑으로서 호부상서유홍(柳洪)과 함께 송나라에서 약재를 보내준 데 대한 사은사로 갔는데, 저장(浙江)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대부분의 방물(方物)을 잃은 죄로 귀국한 뒤 죄를 받을 뻔하기도 하였다.
박인량이 저술한 천독(天牘((시 등은 동행하였던 김근(金覲)의 시문과 함께 소화집(小華集)이라는 이름으로 송에서 간행되어 중국에까지 그 문명을 날리었다. 1089(선종 6)에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오르고, 이어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저술로는 고금록(古今錄)10권과 수이전(殊異傳)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세 아들 경인(景仁경백(景伯경산(景山)이 모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름으로써 고려 전기 명문가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인량은 오자서 묘란 글을 지었다.
오자서 묘(伍子胥廟)
掛眼東門憤未消괘안동문분미소; 동문에 눈알 걸어도 분노가 소멸되지 않아
碧江千古起波濤벽강천고기파도 ;천년동안 푸른 강에 파도를 일으키네
今人不識前賢志금인불식전현지 ;지금 사람들 선현의 뜻을 알지 못하고
但問潮頭幾尺高단문조두기척고 ;단지 조수 머리 얼마나 높은지만 물어보네
 
오자서(伍子胥, ? ~ 기원전 485)는 중국 춘추 시대 오나라의 정치가로, 자서(子胥)는 자이며, 이름은 운()이다. 본래 초나라 출신이나 아버지와 형이 평왕(平王)의 노여움을 사 처형된 뒤 초나라를 떠났다. 그 뒤 오나라의 약진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점점 오나라 왕 부차(夫差)와 사이가 벌어져 목숨을 잃었다.
오자서는 죽기 전에 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必樹吾墓上以梓, 令可以爲器 ; 而抉吾眼縣<>東門之上, 以觀<>寇之入滅<>.”
필수오묘상이재 령가이위기. 이결오안현오동문지상 이관월구지입멸오야.
나의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하라. 내 눈을 도려내 오나라 동문 위에 매달아 월나라 도적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라.”
乃自剄死.
내자경사.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吳王>聞之大怒, 乃取<子胥>尸盛以鴟夷革, 浮之<>.
오왕문지대노 내감자서시성이치이혁 부지강중.
오나라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나서, 오자서의 시체를 취해다가 말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담어 장강 물속에 띄워 버렸다.
오자서는 백문이 불여 일견이란 속담에 어울리게 죽기 전에 자기 눈을 성문에 매달아 암군인 부차가 죽는 꼴을 꼭 보겠다고 유언을 남겼다. 영어 속담에서 seeing is believing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속담도 물론 시각의 중요을 말한다.
미녀는 실제 솜씨, 말투, 태도나 행동거지등 여러가지로 정의내릴수 있겠지만 우선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는 시각적인 자극이 남성에게는 가장 중요할 수 있다.
또한 요즘에는 인간관계가 피상적이고 즉물적이며 쉽게 만나서 쉽게 헤어지며 오랜 시간을 끌지 않기 때문에 외모에 대한 추구가 더욱 높아진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증가하는데 성형수술의 부작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www.imagediet.co.kr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 02-336-7100의 성형 수술후 흉터침으로 치료하며 치료 대상은 콧볼 축소등 코나 앞트임등 눈 흉터, 지방흡입수술등 온 몸 전체, 가슴확대수술의 겨드랑이등 부위와 종류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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