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9일 일요일

한무제 유철 묘를 불태움과 화상흉터치료

한무제 유철 묘를 불태움과 화상흉터치료


한 세종 효무황제 유철(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 기원전 156714~ 기원전 87329)은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1~ 기원전 87)이다. 아명은 체()이며 자는 통()이다. 경제의 열한번째 아들이며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의 소생이다.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펼쳐 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남월, 위만조선 등을 멸망시켜 당시 한족 역사상 두번째로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요동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진 시황제·강희제 등과 더불어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운하를 굴착하여 농지의 관개와 운송을 도왔다. 대외적으로는 장건(張騫)을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파견하고, 장군 위청, 곽거병, 이광(李廣) 등에게 흉노를 토벌시켜 흉노족 선우를 사살하고 다수 흉노족을 포로로 잡아왔다. 기원전 119년에는 위청을 시켜 흉노를 외()몽골로 내쫓고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군을 두었다. 하서(河西)에 있던 흉노 혼야왕(渾邪王)도 항복했으므로, 그 곳에 무위·장액·주천·돈황 4(하서사군)을 두어 중앙아시아와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서역 제국의 입공(入貢)이 계속되었으나,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李廣利)에게 명해 파미르 고원 북서에 있는 대완국(大宛國:페르가나)을 정벌하게 했다. 흉노의 방위와 서역 유지를 위해 요지로 한인을 이주시키고, 또 둔전(屯田)을 두었다.
남방으로는 푸젠성[福建省]에 있던 민월과 동월(東越) 두 왕국을 병탄·흡수하고, 기원전 111년에는 번우(:廣東)에 도읍한 남월국을 멸망시켜 9군을 두고, 쓰촨성[四川省] 변경에서 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 방면에 이르는 염((((야랑(夜郞()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 그곳에 6군을 두었다.
또한 기원전 112년부터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진국(辰國)과의 직접 교역을 반대하고 한나라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는 고조선으로의 침략을 단행한다. 무제는 여러 차례 육로와 해로로 육군과 수군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모두 패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은 내부의 분열로 한군에 투항자가 발생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추측). 기원전 108년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요동지역에 낙랑·임둔·진번·현도의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 무제는 재정이 궁핍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소금과 철과 황,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여 경제적 재력 확충을 시도하였다. 토지분배 정책에서는 둔전제를 강력히 시행·추진하였고, 둔전제의 일부를 개정하여 정복한 북방지역에 주민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면서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외적에 성공한 반면, 궁전과 이궁을 짓고, 불로장생을 믿어 방사(方士)를 모아, 태산(泰山)에서 봉선의식(封禪儀式)을 치르고 각지를 순행했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고 군사비를 압박했다. 상홍양은 증세·신세(新稅)에다 소금[()을 전매하고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을 제정하였다.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고 평준은 물가를 조절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정책을 통해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해서 물가를 안정시켰다. 무공작(武功爵)을 팔기도 하여, 관리의 부정이 심해지고,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져 각종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서에 따르면 선제 이후 원제, 성제, 애제, 평제 4대 왕조가 집권한 53년동안 무려 16차례에 걸쳐 유민 반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걸핏하면 100만명이 넘는 대규모 유민이 광활한 관동 평원을 떠돌며 살 길을 모색했지만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재물 하나 구하지 못했다.
한 원제 연간 승상 광형이 혼자 35만 묘에 달하는 비옥한 토지를 독점했다. 성제 연간에 하남 지역에 물난리가 나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비극이 재차 연출됐다. 한 애제 연간 조정에서 대사마 동현에게 거액의 재물을 내렸는데 현금만 무려 43억개에 달했다. 지금의 위안화로 치면 약 110억원이 되는 거액이다. 동현이 입궁한지 2년밖에 안되었을 때의 일이다. 평제 연간 분노한 장안 시민이 한 무제 유철의 묘를 불태웠는데 그 불이 미앙궁을 비출만큼 불길이 크고 거셌다고 한다.
관료 집단의 세력은 이미 황권을 넘어섰다. 황권이 오히려 관가 호강의 눈치를 살피는 처지로 추락했다.
중국 역사 속에서 살펴보는 화폐 이야기, 천위루, 양중수 지음, 이지은 옮김, 아이넷북스, 페이지 176-177
 
필자가 중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황제는 도가적인 이상 정치인 국가의 최소개입을 하고 사적으로 동전 만들기까지 허용한 한나라 문제와 후한을 세운 광무제이다. 반대로 가장 싫어하는 황제 및 정치인은 진시황제, 모택동, 한나라 무제이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도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주었다.
영조: 한나라의 어느 제왕이 우수하다고 여기느냐?
세자: 문제입니다.
영조: 너는 어째서 한고조를 말하지 않느냐?
세자: 문제와 경제의 치적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영조: 너의 기질로는 필시 한무제를 좋아할 것인데 도리어 문제를 좋아한다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세자: 무제는 비록 쾌활하지만 오히려 오활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조: 어떤 일이 오활하고 어떤 일이 쾌활한 것이냐?
세자: 급암을 포용한 것이 영웅의 일이고 쾌활한 부분입니다.
영조: 그것을 어질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반드시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세자: 급암의 강직함을 포용하고 주었으니 자못 한고조의 활달한 기상이 있습니다.
영조: 네가 만약 급암을 포용한 것을 두고 참된 영웅이라 생각한다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중략) 심하다. 어리석은 말이다. 비록 강직함을 포용하였으나 역시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중서는 강도에서 늙어갔고, 급암은 회양으로 내쳐졌던 것이니 진실로 개연한 일이다. 강직한 것을 포용하는 것은 강직한 이를 등용하는 것만 못하니 너는 이러한 것에 더 힘써라!
여기서 나오는 급암이라는 자는 한무제의 신하로 바른 말을 잘하는 신하였다. 한번은 회의를 하다가 급암이 한무제에게 대놓고 돌직구를 던진 적도 있었는데 한무제는 욕만 하고 끝냈다고 한다. 급암의 돌직구에 기분이 상해서 욕은 했지만 따로 벌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급암을 중용하지도 않았고 그의 주장을 잘 들어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급암은 회양 태수로 세월을 보냈는데, 바로 영조와 사도세자가 이 일화를 두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조선 영조가 자기 아들 사도세자를 쥐잡듯이 잡을 때,
너는 한문제와 한무제 누가 더 좋으냐?”에 사도세자가 한문제입니다.”라고 대답하니까 영조는 너는 속으로 한무제를 더 좋아하면서 한문제라고 거짓말했다고 했다.”
 
황제 무덤을 불태우는 것은 정말 두번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화상을 입고도 또 설상가상으로 화상흉터로 남몰래 눈물짓는 경우가 많다. 위와 같은 화상흉터를 www.imagediet.co.kr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해서 잘 치료가 가능하게 만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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