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0일 금요일

양초로 불을 땐 석숭과 화상흉터치료

양초로 불을 땐 석숭과 화상흉터치료


석숭(石崇, 249~ 300)은 중국 서진의 문인으로, 석포의 막내아들이며, 자는 계륜(季倫), 아명은 제노(齊奴)이며 청주(靑州) 발해군(渤海郡) 남피현(南皮縣) 사람이다. 무제(武帝) 때 수무령(修武令)으로 관직을 시작해 성양태수(城陽太守) 등을 지내고 안양향후(安陽鄕侯)로 봉해졌다. 혜제(惠帝) 때 중랑장(中郞將), 형주자사(荊州刺史) 등의 벼슬을 하였다.
형주자사에 부임하면서 항해와 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는데, <진서(晉書)>에는 "멀리 가는 상인과 상인을 위협하여 치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충의 황후인 가남풍(賈南風)이 조정에서 전권을 휘두르며 가씨(賈氏) 일족의 권세가 커지자 가남풍(賈南風)의 조카인 가밀(賈謐)과 가까이 지내며 이른바 '24명의 벗(二十四友)' 가운데 하나로 불렸다. 학문과 시에도 능통하여 문인으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6권으로 된 문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사귀인(思歸引)', '사귀탄(思歸歎)' 등의 시가 전해진다. 또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는데, <진서(晉書)><세설신어(世說新語)> 등에는 황제의 인척인 왕개(王愷)와 부를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낙양[洛陽] 서쪽에 금곡원(金谷園)을 지었는데, 집안을 매우 호화롭게 꾸며 뒷간도 화려한 옷을 입은 십 여명의 시녀들이 화장품과 향수를 들고 접대하게 하여 손님들은 침실인 줄 알고 놀라 돌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금곡원(金谷園)에 관리와 문인들을 초대하여 주연(酒宴)을 자주 열며 풍류를 즐겼는데, 주연(酒宴)에서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세 말의 술을 마시게 하였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금곡주수(金谷酒數)'라는 말은 '술자리에서 받는 벌주'를 가리키게 되었다..
석숭에게는 녹주(綠珠)라는 애첩(愛妾)이 있었는데, 피리를 잘 불 뿐 아니라 악부(樂府)도 잘 지었다. 그는 녹주를 총애하여 '원기루(苑綺樓)' 또는 '녹주루(綠珠樓)'라고 하는 백장 높이의 누각을 지었다.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의 측근이었던 손수(孫秀)가 녹주의 미색을 탐하였으나 석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300, 사마륜이 가후(賈后)의 세력을 제거하고 전권을 장악하자, 석숭은 황문랑(黃門郞) 반악(潘岳)과 함께 사마윤(司馬允)과 사마경(司馬冏)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제거하려 했다. 손수가 이를 알고 대군을 이끌고 금곡원을 포위하자, 녹주는 누각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석숭은 반악 등과 함께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석숭은 서진의 개국공신 石荀석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가황후의 외조카인 가밀에게 아부해 최고의 권세와 엄청난 부를 누렸다.
석숭이 형주자사로 재직할 때 남만교위와 응양장군을 겸하면서 멀리서 원정 오는 상인들을 강탈해 재산을 긁어모았다. 석숭의 재산은 화려하게 장식된 방에 수없이 이어졌고 뒤쪽의 방에는 아름다운 자수로 꾸민 비단옷을 입고 온 몸에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한 수백 명의 첩이 살았다. 천하의 모든 악기로 내는 아름다운 음악소리는 모두 그의 귀에 들어왔고, 지상에서 나는 진귀한 산해진미가 그의 주방으로 들어갔다.
석숭과 진 무제의 장인인 왕개 사이에 벌어진 사치 경쟁은 볼만했다. 왕개가 식사 후 설탕물로 그릇을 닦자 석숭은 양초로 불을 땠다. 왕개가 40리에 달하는 보랏빛 포를 자리에 깔자 석숭은 50리에 달하는 綿면을 깔았다.
진 무제가 몰래 왕개를 도와 두 척이나 되는 산호수를 하사했는데 가지가 무성하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모양이 장관을 이루었다. 왕개가 산호수를 석숭에게 가져가 보여주자 석숭은 구경을 마친 뒤 철로 만든 공을 슬쩍 던져 산호수를 깨뜨렸다. 왕개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니 석숭은 하인에게 집 안에 있는 산호수를 모두 가져오도록 했다. 왕개가 보니 높이가 3, 4척 되는 산호수가 많았고 그 모양들도 휘황찬란했다. 왕개가 가져온 산호수 같은 것이 아주 많았다. 조왕 사마윤이 정변을 일으켜 가황후를 죽이고 가밀도 죽였따. 석숭은 가밀과 가깝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중국인은 어떻게 부를 축적하는가, 사마천 화식열전에서 샤오미 스마트폰까지, 소준섭, 한길사, 페이지 210-211
 
관리인 석숭이 강도처럼 약탈 행위를 하고 또 사치 대결을 펼친 장면을 보면 그의 훗날이 어떨지 명약관화하다. 또 그 재물이 결국 백성의 고혈에서 나온 것이니 그냥 누대에서 떨어져 죽은 것은 오히려 다행일수 있다.
사치를 표현하기 위해서 양초를 땔감으로 불태우는 장면이 정말 특이하다. 통일신라[원래 남북국 시대]도 전성기 때 밥짓는데 연기가 나지 않았다던데 그 이유는 숯으로만 불을 때어서 그랬다고 한다.
예전에는 목조 가옥이 많았고 또 촛불등으로 조명을 밝히니 화재 사고가 매우 빈번했다. 최근 첨단 기술과 문명에서도 안타까운 화재 사건이 많은데 현대에도 불로 사망, 부상사고가 많은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요즘에 화상사고는 직접적인 불보다는 끓는 물등에 데여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불론 직접 불에 탄 피부는 오징어처럼 구워져 진피가 뒤틀리니 심도 2도 이상의 화상을 입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화상은 드레싱등 치료과정도 힘들지만 나중에 화상흉터로도 마음고생 눈물을 짜낼수도 있다.
화상흉터는 이식수술, 자연치료나 레이저등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침인 BT침을 이용하여 화상흉터를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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