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0일 금요일

환관 유근의 빨간 붓 표시와 붉은색 튼살치료

환관 유근의 빨간 붓 표시와 붉은색 튼살치료


정덕제(正德帝, 14911026~ 1521420)는 중국 명나라의 제10대 황제(재위 : 1505~ 1521). 휘는 후조(厚照)이고, 묘호는 무종(武宗). 시호는 승천달도영숙예철소덕현공홍문사효의황제(承天達道英肅睿哲昭德顯功弘文思孝毅皇帝)이다. 홍치제(弘治帝)의 맏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활쏘기 등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된 뒤로는 미색에 빠지고 팔호(八虎)와 같은 간신을 총애하였으며, 유교적 의례와 관습을 경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근(劉瑾) 등의 환관을 가까이하고 라마교를 광신하였으며 유희를 좋아하여 국비를 낭비하였고 그로 인해 명나라 각지에서 농민들과 제후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동시에, 무종은 결단력이 있었고 과감하여, 유근을 처단하거나 안화왕(安化王)과 영왕(寧王)의 반란을 진압하고 몽골의 침입을 저지하였으며, 또한 여러 차례 재물을 내어 빈민을 구휼하였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에 그 아래에는 수많은 명신들이 존재하였는데 이 역시 그가 정치에 우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이 무렵 포르투갈의 내항(來航)이 시작되었다.
남순(南巡)에서 돌아오던 중 청강포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진 뒤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북경에 돌아온 뒤 1521(정덕 16) 3, 표방(豹房)에서 사망하였는데 그의 나이 31세였다. 모두 16년간 재위하였으며 강릉(康陵)에 묻혔다.
그는 후사가 없었기에 사촌동생인 주후총(朱厚憁)이 뒤를 이었다.
 
유근(劉瑾)은 무종이 지나치게 쾌락에 탐닉하고 있는 틈을 이용해 점차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무렵 나라 안에는 부패가 만연하고 매관매직이 횡행했으며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었다. 유근 및 그와 더불어 권력을 휘두르던 다른 7명의 환관들은 8호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들의 통치방식이 그만큼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일부 관료들이 황제에게 유근을 축출하라고 간청했다. 유근의 집을 수색하자 금은 보화와 가짜 옥새가 많이 나왔다. 황제는 결국 유근의 부패 정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깨닫고 그를 처형했다.
 
유근은 명대 정덕제 무종 때 환관이었다. 그는 산시성 출신이며 여섯살때 궁중 태감에 맡겨져 키워졌다. 1505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재위를 이으니 그가 곧 무종이다. 유근은 당시 10여세에 불과한 황제를 모시면서 국정을 농단했다.
유근을 비롯해 마영성, 고봉등 7명의 태감은 무종의 총애를 받아 八虎팔호라고 불렸다. 유근이 팔호중의 우두머리였다. 이들은 경성의 정예 수비대까지 장악하면서 전권을 휘둘렀다. 조성 대신들은 잇달아 간언을 올렸고 무종도 마음이 움직여 유근을 강남으로 유배시키기로 결정했다.
대신들은 유근을 처형시켜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고 대신들이 다음날 함께 모여 황제에게 유근을 죽이라고 간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부방서 초방이 밤에 유근을 찾아가 그 계획을 폭로했다. 유근은 다른 일곱 태감과 함께 황제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무종은 충서을 다했던 것을 생각해 그들을 사면했고 司禮監사례감 직책을 주었다.
사례감은 중요한 내궁관서로 명나라 때 백관이 황제에게 상서하게 되면 먼저 내각에 보내져 내각 대신들이 의견 처리를 한 다음 황제에게 올려지고 황제는 빨간색의 붓으로 재가했다. 어떤 황제는 정무가 귀찮아 사례감에게 대필하도록 함으로써 사례감이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다. 사례감은 황제의 뜻을 하달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황제 대신 대필을 하고 이를 내각으로 하여금 기초하게 하거나 태감이 구두로 관련된 대신들에게 황제의 뜻을 전달했다.
이 제도는 환관들이 황제의 뜻을 왜곡시킬수 있도록 만들었고, 사례감의 주관이었던 유근의 전횡과 발호는 이 제도에 힘입은 바 컸다. 유근은 전권을 손에 넣자 자신을 반대하던 대신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중국인은 어떻게 부를 축적하는가, 사마천 화식열전에서 샤오미 스마트폰까지, 소준섭, 한길사, 페이지 218-219
 
조선왕조 실록에도 황색 점을 찍은 것과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이번 정사에서 의정부 당상들이 매일 빈청(賓廳) 에 나아가고, 이조·병조의 당상이 의논에 참여하여, 제수(除授)하는 대성(臺省정조(政曹연변 고을의 장수와 수령은 반드시 3인의 성명을 썼으나, 그 중에 쓸 만한 자 1인을 취하여 황표(黃標)를 붙여서 아뢰면 노산군(魯山君)이 다만 붓으로 낙점(落點)할 뿐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황표 정사(黃標政事)’ 라고 일컬었다.
황표정사를 빌미로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후, 김종서 일파의 권력남용으로부터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합리화되었다.
주상(主上)께서 처음 즉위하여 내린 교서(敎書) 안에 오직 당상 이상 및 연변(沿邊) 수령·대성(臺省정조(政曹) 등의 벼슬은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검찰(檢察)하여 제수하라 하였는데, 황보인·김종서 등이 주상을 어리다고 무시하고 문무관(文武官)의 제수를 대소 할 것 없이 모두 다 잡고 권세를 오로지하여 황표(黃標)[1] 를 붙여서 주상으로 하여금 손을 놀릴 수 없게 하고, 탐욕을 자행하여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아, 주군(州郡)에서 뇌물로 올리는 것이 공물(貢物) 바치는 것보다 배나 되었으며, 조정(朝政)을 탁란(濁亂)하여 매관(賣官)하고 옥()을 파는 것이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마음에 화심(禍心)을 간직하여 용()에게 아부하여 용의 복심으로 하여금 중외에 포열(布列)하여 권세 있는 요직을 나누어 차지하였다.
 
황색 표시가 아니라 중국에서는 붉은색으로 한것은 중국인이 전통적으로 붉은색을 좋아했거나 아니면 붉은색이 눈에 잘 띠기 때문일 것이다. 몸의 피부에 생기는 기초 질병도 적색으로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팽창선조라고 불리는 튼살도 처음에는 붉은색으로 시작해 무슨 질병인지 잘 모르는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 몇달 이후에 백색으로 변화하니 사람들은 이제 흰색 튼살은 치료가 안된다고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방 피부과 전문의가 치료하는 www.imagediet.co.kr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에서 시술하는 튼살침인 ST침으로 백색 튼살이 치료가 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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