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3일 금요일

상처의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 쑤시는 고통과 흉터치료

상처의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 쑤시는 고통과 흉터치료


조선시대에는 백성의 억울함에 하늘이 진노하면 가뭄 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세종은 신주무원록을 편찬하고 검시장식(檢屍狀式)을 반포하는 등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4391129일 대신들이 세종에게 의욕과 열정에 찬 관리들을 말려달라고 요청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시신에 난 상처의 크기와 깊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눈금이 새겨진 자나 곧은 나무가지를 이용해야 하는데 문제는 시신이 아닌 상처를 입은 백성들한테도 같은 방법을 쓴다. 부상의 경우는 겉에 난 상흔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한데도 관리들이 굳이 깊이를 재려고 들었던 것은 역시 세종의 열정을 본받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대신들은 이미 크게 다친 백성들이 더 고통스러워 한다고 걱정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경우 상처의 크기와 깊이를 재는 것을 금지해달라고 간청했다. 세종이 금지령을 내리면서 백성들은 더 이상 상처의 깊이를 재야 한다며 나뭇가지를 가지고 다가오는 관리를 보고 공포에 질리지 않아도 됐다.
부상당한 백성들의 상처를 나뭇가지로 쑤셔대는 것은 분명 당사자에게 큰 고통이었을 테지만 원칙에 충실하다는 측면에서는 대단히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조선백성실록 우리 역사의 맨얼굴을 만나다, 정명섭 지음, 북로드, 페이지 164-165
 
위 내용을 보면 융통성 없는 관리때문에 고통은 물론이고 세균감염 패혈증으로 백성이 여럿 죽어나갔을 것 같다. 상처에 소금뿌린다는 속담처럼 더 고통을 가중시켜 버리는 경우가 되었다. 그런데 상처 이후에도 피부에는 흉터란 것이 생겨 傷處가 아물면서 치료가 자연스레 이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흉터가 끝까지 소멸하지 않아 마음의 고생을 주는데 상흔으로 유발된 흉터를 02-336-7100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의 흉터침, , 한약 재생약침등으로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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