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5일 월요일

신촌 이미지 한의원 02-336-7100 정관정요 제 3 임현

王珪,太原祁縣人也,武德中,爲隱太子中允,甚爲建成所禮。
왕규는 태원[하동도] 기현 사람으로 무덕 연간중에 은태자 중윤이 되어 매우 건성으로부터 예우받았다.
後以連其陰謀事,流於巂州。
뒤에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휴주에 유배되었다.
建成誅後,太宗即位,召拜諫議大夫。
건성이 죽은 뒤에 태종이 즉위하여 불러 간의대부에 제수하였다.
每推誠盡節,多所獻納。
매번 성의를 밀어 예절을 다하여 많이 간언을 헌납하였다.
珪嘗上封事切諫,太宗謂曰:
왕규가 일찍이 밀봉한 일로 간절하게 간언하니 태종이 말했다.
“卿所論皆中朕之失,自古人君莫不欲社稷永安,然而不得者,只爲不聞己過,或聞而不能改故也。今朕有所失,卿能直言,朕復聞過能改,何慮社稷之不安乎?”
경이 말함이 모두 짐의 과실에 맞으니 고대 군주는 사직을 영원인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얻지 못하니 다만 자기의 과실을 듣지 않아서이니 혹은 들어도 잘못을 고치지 못했다. 지금 금에 과실이 있으면 경이 직언을 하여 짐이 다시 잘못을 듣고 고치면 어찌 사직이 편안하지 않음을 염려하겠는가?
太宗又嘗謂珪曰:
태종이 또한 일찍이 왕규에게 말했다.
“卿若常居諫官,朕必永無過失。”
경이 만약 항상 간언하는 관직이면 짐이 반드시 영원히 과실이 없을 것이다.
顧待益厚。
대우를 매우 두터이 하였다.
貞觀元年,遷黃門侍郎,參預政事,兼太子右庶子。
정관 원년에 황문시랑에 천거되어 정사를 참여하니 태자우서자를 겸직하였다.
二年,進拜侍中。
정관 2년에 시중에 진급했다.
時房玄齡、魏徵、李靖、溫彥博、戴胄與珪同知國政,嘗因侍宴,太宗謂珪曰:
때에 방현령, 위징, 이정, 온언부, 대주는 왕규와 더불어 국정을 함께 아니 일찍이 잔치에 모실 때 태종이 왕규에게 말했다.
“卿識鑒精通,尤善談論,自玄齡等,咸宜品藻。又可自量孰與諸子賢?”
경은 감식에 정통하여 더욱 담론을 잘하니 방현령등을 시작으로 모두 풍평해보시오. 또한 스스로 누가 여러 사람과 함께 현명하다고 생각됩니까?
對曰:“孜孜奉國,知無不爲,臣不如玄齡。
왕규가 대답하길 부지런히 나라를 받들어 행하지 않음이 없음에 신이 방현령만 못합니다.
每以諫諍爲心,恥君不及堯、舜、臣不如魏徵。
매번 간쟁함을 마음쓰며 군주가 요와 순에 이르지 않음을 부끄러워함은 신은 위징만 못합니다.
才兼文武,出將入相,臣不如李靖。
재주가 문과 무를 겸하여 나아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이 됨은 신은 이정만 못합니다.
敷奏詳明,出納惟允,臣不如溫彥博。
상소를 폄에 자세하고 분명함에 출납이 진실함이 신은 온언부만 못합니다.
處繁理劇,衆務必舉,臣不如戴胄。
번거로움을 처리하고 번거로움을 다스림에 여러 임무를 반드시 거행함에 신은 대주만 못합니다.
至如激濁揚清,嫉惡好善,臣於數子,亦有一日之長。”
탁함을 격하게 하고 맑음을 들음에 나쁨을 질시하고 착한 사람을 좋아함은 신이 여러 명보다 나으며 또한 하루의 장점이 있습니다.
太宗深然其言,群公亦各以爲盡己所懷,謂之確論。
태종이 매우 그 말을 심오하다고 여기며 여러 공 또한 각각 자기의 소회를 다하니 그를 확론이라고 말했다.

李靖,京兆三原人也。
이정은 경조 삼원 사람이다.
大業末,爲馬邑郡丞。
대업 말기에 마음군승이 되었다.
曾高祖爲太原留守,靖觀察高祖,知有四方之志,因自鎖上變,詣江都。
일찍이 고조가 태원유수가 되어 정관에 고조를 살펴보니 사방을 가지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 스스로 상부에 변고를 고하려고 하여 강도에 이르렀다.
至長安,道塞不通而止。
장안에 이르러 길이 막혀 통하지 않아 중지하였다.
高祖克京城,執靖,將斬之,靖大呼曰:
고조가 경성에서 이길때 이정을 잡아 장차 베려고 할때 이정이 크게 호소하였다.
“公起義兵除暴亂,不欲就大事,而以私怨斬壯士乎?”
공이 의병으로 포악한 혼란을 제거하려고 하는데 큰 일에 나아가지 않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장사를 베려고 합니까?
太宗亦加救靖,高祖遂舍之。
태종이 또한 이정을 구하여 고조가 글ㄹ 놓아주었다.
武德中,以平蕭銑、輔公祏功,曆遷揚州大都督府長史。
무덕중에 이정은 소선과 보공석를 평정한 공로 양주 대도독부장사를 역임하였다.
太宗嗣位,召拜刑部尚書。
태종이 대이어 즉위하자 형부상서로 불러 제수하였다.
貞觀二年,以本官檢校中書令。
정관 2년에 본관 검교중서령이 되었다.
三年,轉兵部尚書,爲代州行軍總管,進擊突厥定襄城,破之。
정관 3년에 병부상서로 옮겨가서 대주행군총관이 되어 돌궐을 진격하여 정양성을 깨뜨렸다.
突厥諸部落俱走磧北。
돌궐의 여러 부락이 모두 사막 북쪽으로 달아났다.
北擒隋齊王暕之子楊道政,及煬帝蕭後,送於長安,突利可汗來降,頡利可汗僅以身遁。
북쪽으로 수 제왕의 아들 양도정과 양제의 소후를 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여 돌리가한이 항복하러 오고 힐리가한은 겨우 몸으로 피신하였다.
太宗謂曰:“昔李陵提步卒五千,不免身降匈奴,尚得名書竹帛。卿以三千輕騎,深入虜庭,克復 定襄,威振北狄,實古今未有,足報往年渭水之役矣。”
태종이 말하길 예전에 이릉이 병사 5천명으로 흉노에 투항하여 역사책에 치욕을 남겼다. 경은 3천의 경기병으로 깊이 들어가 포로를 잡아 정양성을 극복하니 위엄이 북적에 흔들리니 실제로 고금에 없으니 족히 위수의 노역을 갚을만하다.
以功進封代國公。
공로로 대국공에 봉해졌다.
此後,頡利可汗大懼,四年,退保鐵山,遣使入朝謝罪,請舉國內附。
이 뒤에 힐리가한은 크게 두려워하여 정관 4년에 보철산으로 퇴각하여 사신을 조정에 보내어 사죄하니 국내부에 천거되었다.
又以靖爲定襄道行軍總管,往迎頡利。
또한 이정은 정양도행군총관이 되어 힐리가한을 맞이하였다.
頡利雖外請降,而心懷疑貳。
힐리가한은 비록 겉으로는 항복하러 청했으나 마음으로는 두 의심을 품었다.
詔遣鴻臚卿唐儉、攝戶部尚書將軍安修仁慰諭之,靖謂副將張公謹曰:
태종은 홍려경 당검과 호부상서장군안수인에게 조서를 보내 위로케 하니 이정이 부장 장공근에게 말했다.
“詔使到彼,虜必自寬,乃選精騎齎二十日糧,引兵自白道襲之。”
조서 사자가 이에 도착하니 포로에는 반드시 관대하니 정예기병 20일 식량을 선발하여 병사를 이끌어 백도에서 습격하시오.
公謹曰:“既許其降,詔使在彼,未宜討擊。”
장공근이 말하길 이미 항복을 허락하여 조서와 사자가 그 곳에 있는데 토벌해 공격하지 않아야 합니다.
靖曰:“此兵機也,時不可失。”
이정이 말하길 이는 병사의 기회이니 시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遂督軍疾進。
군사를 독촉하여 빠르게 나가게 했다.
行至陰山,遇其斥候千餘帳,皆俘以隨軍。
행차가 음산에 이르러 척후병 천여명을 만나 모두 포로로 잡아 군을 따르게 했다.
頡利見使者甚悅,不虞官兵至也。
힐리가한은 사자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관병이 옴을 근심치 않았다.
靖前鋒乘霧而行,去其牙帳七里,頡利始覺,列兵未及成陣,單馬輕走,虜衆因而潰散。
이정은 선봉을 안개를 틈타 행군하여 거리가 7리정도 접근함에 힐리가한이 비로소 느낌이 병사를 나열하여 진을 생성하기 전에 홀로 말달려 빨리 달려서 여러적을 사로잡아 궤멸해 흩어지게 했다.
斬萬餘級,殺其妻隋義成公主,俘男女十餘萬,斥土界自陰山至於大漠,遂滅其國。
만여명 수급을 베고 그의 처 수나라 의성공주를 죽이니 포로는 남녀 10여만으로 영토 경계가 음산에서 큰 사막에 이르러 나라를 멸망시켰다.
尋獲頡利可汗於別部落,餘衆悉降。
다른 부락에서 힐리가한을 잡아 나머지 대중이 모두 항복하였다.
太宗大悅,顧謂侍臣曰:
태종이 매우 기뻐하며 모시는 신하를 돌아보아 말했다.
“朕聞主憂臣辱,主辱臣死。往者國家草創,突厥強梁,太上皇以百姓之故,稱臣於頡利,朕未嘗
不痛心疾首,志滅匈奴,坐不安席,食不甘味。今者暫動偏師,無往不捷,單於稽顙,恥其雪乎!”
짐은 군주의 근심이 신하의 치욕이며 군주가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들었다. 지난때 국가의 초창기에 돌궐이 강성하여 태상황 고조께서 백성의 실정으로 힐리에 신하를 칭하니 짐은 일찍이 마음의 고통과 머리의 질병으로 여기지 않음이 없고, 뜻을 흉노를 멸망케 하고자 하여 앉음에 편안한 자리가 없고, 음식은 단 맛이 없었다. 지금 잠시 조금의 군사를 움직여 가는 곳마다 민첩하지 않음이 없으니 선우는 이마를 땅에 대어 항복하니 수치를 설욕하였다.
群臣皆稱萬歲。
군중의 신하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尋拜靖光祿大夫、尚書右仆射,賜實封五百戶。
정을 광록대부 상서우복야를 주어 실제 녹봉 500호를 하사하였다.
又爲西海道行軍大總管,征吐穀渾,大破其國。
또한 서해도행군대총관이 되어 토곡혼을 정벌하여 나라를 크게 격파하였다.
改封衛國公。
위국공에 봉해졌다.
及靖身亡,有詔許墳塋制度依漢衛、霍故事,築闕象突厥內燕然山、吐穀渾內積石二山,以旌
殊績。
이정의 몸이 죽자 조서로 봉분을 한나라의 위청과 곽거병의 고사에 따라서 궐을 건축케 하여 돌궐안의 연연산과 토곡혼 안의 적석이산을 본떠서 정문을 공적을 달리하였다.

虞世南,會稽餘姚人也。
우세남은 회계 여도 사람이다.
貞觀初,太宗引爲上客。
정관 초기에 태종이 상객에 불렀다.
因開文館,館中號爲多士,咸推世南爲文學之宗。
문학관을 열어 관 안에 많은 선비를 호칭하니 모두 우세남을 추대하여 문학의 종주로 삼았다.
授以記室,與房玄齡對掌文翰。
기실을 제수하여 방현령과 문서를 관장케 하였다.
嘗命寫《列女傳》以裝屏風,於時無本,世南暗書之,一無遺失。
일찍이 열녀전을 베끼게 하여 병풍을 장식하여 시대에 판본이 없어서 우세남이 몰래 글을 쓰니 하나도 유실함이 없었다.
貞觀七年,累遷秘書監,太宗每機務之隙,引之談論,共觀經史。
정관 7년에 자주 비서감에 옮겨가서 태종이 매번 임무의 틈을 엿봐서 인도하여 담론하여 함께 경사를 보았다.
世南雖容貌懦弱,如不勝衣,而志性抗烈,每論及古先帝王爲政得失,必存規諷,多所補益。
우세남은 비록 용모가 유약하여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나 뜻과 성품은 맹렬하여 매번 논의함에 고대 선대의 황제와 왕의 정치의 득실에 이르면 반드시 법도의 풍자를 있어서 보익함이 많았다.
及高祖晏駕,太宗執喪過禮,哀容毀顇,久替萬機,文武百寮,計無所出,世南每入進諫,太宗甚嘉納之,益所親禮。
고조가 죽고 태종이 상례를 잡아 예절이 과다하며 슬픔의 용모가 파리하여 오랫동안 만기를 대체하여 문무의 여러 관리가 내놓을 계책이 없어서 우세남이 매번 들어가 간언하여도 태종이 매우 아름답게 들이니 더욱 친히 예우하였다.
嘗謂侍臣曰:
일찍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朕因暇日,每與虞世南商榷古今,朕有一言之善,世南未嘗不悅,有一言之失,未嘗不悵恨。其懇誠若此,朕用嘉焉。群臣皆若世南,天下何憂不治?”
짐이 한가로운 날에 매번 우세남과 함께 예와 지금을 헤아리니 짐이 한 마디의 선함이 있으면 우세남이 일찍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으니 한 말의 실수가 있으면 일찍이 슬퍼하여 한탄하지 않음이 없다. 간절한 성실이 이와 같으니 짐이 등용함이 좋다. 여러 신하는 모두 우세남과 같으면 천하가 어찌 다스려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
太宗嘗稱世南有五絕:
태종이 일찍이 우세남이 5가지 빼어남이 있다고 했다.
一曰德行,二曰忠直,三曰博學,四曰詞藻,五曰書翰。
첫째는 덕행이며, 둘째는 충직이며, 셋째는 박학이며, 넷째는 사조이며, 다섯째는 문서이다.
及卒,太宗舉哀於別次,哭之甚慟。
죽게 되니 태종이 따로 행차로 애도를 거행하여 곡하여 매우 통곡하였다.
喪事官給,仍賜以東園秘器,贈禮部尚書,諡曰文懿。
상례의 일에 관리를 공급하며 동원비기를 하사하여 예부상서를 추증하며 시호는 문의라고 하였다.
太宗手敕魏王泰曰:
태종이 손수 위왕태에게 칙령으로 말했다.
“虞世南於我,猶一體也。拾遺補闕,無日暫忘,實當代名臣,人倫准的。吾有小善,必將順而成之;吾有小失,必犯顏而諫之。今其云亡,石渠、東觀之中,無復人矣,痛惜豈可言耶!”
우세남은 나에게 한 몸과 같다. 남은 것을 수습하고 빠진 것을 보충하여 하루도 잠깐 잊지 않으니 당대의 이름난 신하이며 인륜의 기준이다. 내가 조금의 선행이 있으면 반드시 순종하여 이루게 하며, 내가 작은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용안을 범하여 간행하였다. 지금 죽었다고 말하니 석거, 동관(도서관)의 중에 회복할 사람이 없으니 애통하고 애석하여 어찌 말하겠는가?
未幾,太宗爲詩一篇,追思往古理亂之道,既而歎曰:
아직 때가 안 되어 태종이 시 한편을 지어 지난 고대 다스려지고 혼란한 도리를 생각하여 이미 한탄하여 말했다.
“鍾子期死,伯牙不復鼓琴。朕之此篇,將何所示?”
종자기가 죽어서 백아가 다시 거문고를 튕기지 않았다. 짐이 이 편에 장차 무엇을 보이겠는가?
因令起居褚遂良詣其靈帳讀訖焚之,其悲悼也若此。
기거랑 저수량에게 우세남의 영장 앞에서 읽은 것을 끝내고 불사르니 비통하고 애도함이 이와 같았다.
又令與房玄齡、長孫無忌、杜如晦、李靖等二十四人,圖形於淩煙閣。
또한 명을 내려 방현령, 장손무기, 두여회, 이정등의 24명은 능연각에 형체를 그림을 그렸다.

李勣,曹州離狐人也。
이적은 조주 이호 사람이다.
本姓徐,初仕李密,爲左武侯大將軍。
본래 성은 서씨이며 초기에 이밀을 섬겨서 좌무후 대장군이 되었다.
密後爲王世充所破,擁衆歸國,勣猶據密舊境十郡之地。
이밀이 뒤에 왕세충에 깨져서 대중을 막아 귀국하니 이적은 이밀의 예전 영토 10군의 땅을 근거로 삼았다.
武德二年,謂長史郭孝恪曰:
무덕 2년에 장사 곽효각에게 말했다.
“魏公既歸大唐,今此人衆土地,魏公所有也。吾若上表獻之,則是利主之敗,自爲己功,以邀富貴,是吾所恥。今宜具錄州縣及軍人戶口,總啟魏公,聽公自獻,此則魏公之功也,不亦可乎?”
위공(이밀)은 대당에 이미 귀순하여서 지금 이 사람의 여러 토지는 위공이 소유한다. 내가 만약 주상에 표를 바치면 주인의 패배를 이용하여 스스로 자기의 공으로 삼음이니 부귀에 이름이 내 치욕이 된다. 지금 녹주현과 군인의 호구를 기록하여 모두 위공을 열어주어 공이 스스로 헌납함을 들으면 이는 위공의 공이니 또한 가능하지 않겠는가?
乃遣使啟密。
사신을 보내서 이밀에게 알렸다.
使人初至,高祖聞無表,惟有啟與密,甚怪之。
사신이 초기에 올때 고조는 표가 없이 오직 이밀에게 알리는 글만 있어서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使者以勣意聞奏,高祖方大喜曰:
이적의 뜻을 주상에게 들리게 하니 고조가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徐勣感德推功,實純臣也。”
서적은 덕에 감화하여 공을 주인에게 밀어주니 실제로 순한 신하이다.
拜黎州總管,賜姓李氏,附屬籍於宗正。
여주총관에 벼슬을 주고 이씨란 성을 하사하여 종정에 부촉하였다.
封其父蓋爲濟陰王,固辭王爵,乃封舒國公,授散騎常侍。
아버지 개를 제음왕에 봉하니 왕의 작위를 고사하니 서국공에 봉하여 산기상시에 제수하였다.
尋加勣右武侯大將軍。
이적을 벼슬을 우무후대장군을 더해주었다.
及李密反叛伏誅,勣發喪行服,備君臣之禮,表請收葬。
이밀이 반란으로 죽임을 당하자 이적이 발상하며 상복을 입고 군신의 예우를 갖추니 표로 장례를 해줄 것을 청하였다.
高祖遂歸其屍。
고조가 시체를 돌려주었다.
於是大具威儀,三軍縞素,葬於黎陽山。
이에 크게 위의를 갖추어 3군의 흰 비단으로 여양산에 장례를 지냈다.
禮成,釋服而散,朝野義之。
예의가 완성되자 옷을 벗고 흩어지니 조정에서는 그를 의롭다고 했다.
尋爲竇建德所攻,陷於建德,又自拔歸京師。
두건덕에게 공격당하여 건덕에게 포로가 되어 또한 스스로 뽑아서 수도로 돌아왔다.
從太宗征王世充、竇建德,平之。
태종을 따라서 왕세충, 두건덕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貞觀元年,拜並州都督,令行禁止,號爲稱職,突厥甚加畏憚。
정관 원년에 병주도독에 임명되어 금지를 시행하게 하니 직책에 맞다고 말하나 돌궐이 심하게 두렵고 꺼려하였다.
太宗謂侍臣曰:
태종이 주위의 신하에게 말했다.
“隋煬帝不解精選賢良,鎮撫邊境,惟遠築長城,廣屯將士,以備突厥,而情識之惑,一至於此。朕今委任李勣於並州,遂得突厥畏威遠遁,塞垣安靜,豈不勝數千里長城耶?”
수양제가 현량한 사람을 정밀하게 선택하지 못하고 변경을 다스리며 위무하지 못하여 오직 긴 건축과 장성으로 널리 장사를 둔전케 하여 돌궐에 대비하여 정의 의혹만 있어서 이에 이르렀다. 짐이 지금 이적을 병주에 맡겨서 돌궐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멀리 숨으며 담을 막아 안정하니 어찌 수천리장성을 이기지 못하겠는가?
其後並州改置大都督府,又以勣爲長史,累封英國公。
뒤에 병주가 대도독부로 고쳐지며 또한 이적이 장사가 되어 자주 영국공에 봉해졌다.
在並州凡十六年。
병주에 16년을 있었다.
召拜兵部尚書,兼知政事。
병부상서에 불리어서 겸해 정사를 알았다.
勣時遇暴疾,驗方 云 鬚灰可以療之,太宗自剪鬚爲其和藥。
이적이 갑작스런 질병을 앓아서 효험있는 약방문에 말하길 수염재로 치료할 수 있다고 하니 태종이 스스로 수염을 잘라서 약에 섞었다.
勣頓首見血,泣以陳謝。
이적이 머리를 조아리며 피를 내서 울면서 말을 하였다.
太宗曰:“吾爲社稷計耳,不煩深謝。”
태종이 말하길 내가 사직을 위해 계책할 뿐이니 번거롭게 깊이 사죄하지 말라.
十七年,高宗居春宮,轉太子詹事,加特進,仍知政事。
17년에 고종이 춘궁에 있을때 태자첨사로 옮겨가서 특진하게 되어 정사를 주관케 하였다.
太宗又嘗宴,顧勣曰:
태종이 또한 일찍이 잔치에서 이적을 돌아보며 말했다.
“朕將屬以孤幼,思之無越卿者。公往不遺於李密,今豈負於朕哉!”
짐은 태자를 맡기려고 하는데 생각하길 경을 넘는 사람이 없다. 공이 가나 이밀에게 남지 않고 지금 어찌 나를 배반하겠는가?
勣雪涕致辭,因噬指流血。
이적이 눈물로 말을 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렸다.
俄沉醉,禦服覆之,其見委信如此。
갑자기 취하게 되어 황제의 의복으로 덮으니 이처럼 믿고 맡겼다.
勣每行軍,用師籌算,臨敵應變,動合事機。
이적이 매번 행군함에 군사에게 점치게 하여 적을 임하면 임기응변하며 일의 기틀에 움직이고 합하였다.
自貞觀以來,討擊突厥、頡利及薛延陀、高麗等,並大破之。
정관이래로 돌궐, 힐리와 설연타, 고구려등을 토벌하여 크게 깨뜨렸다.
太宗嘗曰:“李靖、李勣二人,古之韓、白,衛、霍豈能及也。”
태종이 일찍이 말하길 이정과 이적 두 사람은 예전의 한신, 백기, 위청, 곽거병이라도 어찌 그에 이르겠는가?

馬周,博州茌平人也。
마주는 박주 임평 사람이다.
貞觀五年,至京師,舍於中郎將常何之家。
정관 5년에 수도에 이르러서 중랑장 상하의 집에서 머물렀다.
時太宗令百官上書言得失,周爲何陳便宜二十餘事,令奏之,事皆合旨。
태종시기에 모든 관리에게 득실의 말의 글을 올리게 하니 마주가 상하를 위하여 20여 일을 진술하여 주청하니 일이 모두 뜻에 맞았다.
太宗怪其能,問何,何對曰:
태종이 능력을 괴이하게 여겨 상하에게 물으니 상하가 대답하였다.
“此非臣所發意,乃臣家客馬周也。”
이는 신이 뜻을 냄이 아니라 신 집의 손님 마주의 말입니다.
太宗即日召之,未至間,凡四度遣使催促。
태종이 곧 그를 불러서 도착하지 않아서 4번이나 사신을 파견하여 재촉하였다.
及謁見,與語其悅。
알현하니 그와 더불어 말하니 기뻐하였다.
令直門下省,授監察禦史,累除中書舍人。
문하성에 명령내려서 감찰어사에 제수하고 중서사인에 임명하였다.
周有機辯,能敷奏,深識事端,故動無不中。
마주가 말을 잘하여 자신을 생각을 펴서 주청하니 일의 실마리를 깊이 알아서 움직임이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다.
太宗嘗曰:“我於馬周,暫時不見,則便思之。”
태종이 일찍이 말하길 나는 마주를 잠시라도 못 보면 곧 그가 생각난다.
十八年,曆遷中書令,兼太子左庶子。
정관 18년에 두루 중서령 승진하며 태자좌서자를 겸직하였다.
周既職兼兩宮,處事平允,甚獲當時之譽。
마주가 이미 직책이 양쪽 궁에 있고 일처리가 공평하고 진실하여 매우 당시의 명예를 획득하였다.
又以本官攝吏部尚書。
또한 본래 관직인 이부상서를 통섭하였다.
太宗嘗謂侍臣曰:“周見事敏速,性甚慎至。至於論量人物,直道而言,朕比任使之,多稱朕意。既寫忠誠,親附於朕,實藉此人,共康時政也。”
태종이 일찍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길 마주는 일을 보면 민첩하여 성품이 매우 삼간다. 인물을 논의하고 헤아림에는 직접 말하며 짐이 비교하여 임용해 시켜보면 많이 짐의 뜻과 맞다. 충성을 쓰며, 짐에 친하게 붙으니 실제로 이 사람은 함께 시기의 정치를 편안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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