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5일 월요일

신촌 이미지 한의원 02-336-7100 정관정요 제 2 정체

卷一 政體第二(凡十四章)
1권 제2 정체 모두 14장이다.

貞觀初,太宗謂蕭瑀曰:
정관 초기에 당 태종이 소우에게 말했다.
“朕少好弓矢,自謂能盡其妙。近得良弓十數,以示弓工。
짐은 젊어서 화살과 활을 좋아하며 스스로 오묘함을 다하였다고 말했다. 근래에 좋은 활 십수개를 화살 공인에게 보여주었다.
乃曰:‘皆非良材也。’
그가 말하길 모두 좋은 재료가 아닙니다.
朕問其故,工曰:‘木心不正,則脈理皆邪,弓雖剛勁而遣箭不直,非良弓也。’
짐이 그 연고를 묻자 공인이 말하길 나무의 중심이 바르지 않으면 맥의 이치가 모두 사악하며 활이 비록 강하나 화살이 곧지 않으므로 좋은 활이 아닙니다.
朕始悟焉。朕以弧矢定四方,用弓多矣,而猶不得其理。
짐은 비로소 깨달았다. 짐은 활과 화살로 사방을 평정하며 활을 사용함이 많은데 이치를 얻지 못했습니다.
況朕有天下之日淺,得爲理之意,固未及於弓,弓猶失之,而況於理乎?”
하물며 짐이 천하를 다스린 날이 얼마 안되어 이치의 뜻을 얻어서 진실로 활에 이르지 못하며 활에도 그것을 잃었는데 하물며 이치는 어떻겠는가?
自是詔京官五品以上,更宿中書內省。
스스로 조서로 수도의 관리 5품 이상은 다시 중서내성에서 숙직케 하였다.
每召見,皆賜坐與語,詢訪外事,務知百姓利害,政教得失焉。
매번 불러서 모두 자리를 하사하여 더불어 말하며 밖의 일을 자세히 물어서 임무를 백성의 이해와 백성 교화의 득실을 알게 하였다.]

貞觀元年,太宗謂黃門侍郎王珪曰:
정관 원년에 태종이 황문시랑 왕규에게 말했다.
“中書所出詔敕,頗有意見不同,或兼錯失而相正以否。
중서성에서 내는 조칙이 자못 의견이 같지 않음이 있고, 혹은 착오와 실수로 서로 아닌것을 바로잡으려고 함이다.
元置中書、門下,本擬相防過誤。
원래 중서, 문하를 둔 것은 본래 서로 과실과 잘못을 방지하려고 함이다.
人之意見,每或不同,有所是非,本爲公事。
사람의 의견이 매번 혹은 같지 않아 시비가 있으니 본래 공적인 일이다.
或有護己之短,忌聞其失,有是有非,銜以爲怨。
혹은 자기의 단점을 보호함이 있어서 실수를 듣길 꺼리며 옳음이 있고 그릇됨이 있어서 원망을 삼는다.
或有苟避私隙,相惜顏面,知非政事,遂即施行。
혹은 진실로 사사로움 틈을 피하여 서로 안면을 애석하게 여겨 바르지 않는 정사를 알고도 시행한다.
難違一官之小情,頓爲萬人之大弊。
한 관리의 작은 정을 어기기 어려우니 곧 만인의 큰 폐단이 되었다.
此實亡國之政,卿輩特須在意防也。
이는 실로 나라가 망할 정치로 경의 무리는 특별히 이 뜻을 방지해야 한다.
隋日內外庶官,政以依違,而致禍亂,人多不能深思此理。
수나라때 날마다 내외의 여러 관직을 정치 어긋나게 하여 화와 난리를 이르게 하니 사람들이 이 이치를 깊이 생각하지 못함이다.
當時皆謂禍不及身,面從背言,不以爲患。
당시에 모두 화가 자기 몸에 이르지 않게 하고 안면으로는 따르며 등으로 말하니 근심으로 여기지 않았다.
後至大亂一起,家國俱喪,雖有脫身之人,縱不遭刑戮,皆辛苦僅免,甚爲時論所貶黜。
뒤에 큰 혼란이 한번 일어나서 집안과 나라가 모두 잃고 비록 몸의 신분이 박탈되어도 형벌과 죽임을 만나지 않음을 모두 고생하여 겨우 면하니 매우 시론이 폄하되고 쫒겨났다.
卿等特須滅私徇公,堅守直道,庶事相啟沃,勿上下雷同也。”
경등은 특별히 사를 멸하고 공적임을 쫒아서 단단히 곧은 도를 지켜서 여러 일을 서로 열어 적셔주니 위와 아래가 부화뇌동하면 안 된다.

貞觀二年,太宗問黃門侍郎王珪曰:
정관 2년에 태종이 황문시랑 왕규에게 물었다.
“近代君臣治國,多劣於前古,何也?”
근대의 임금과 신하가 나라를 다스림에 앞의 고대보다 많이 용렬함은 어째서입니까?
對曰:“古之帝王爲政,皆志尚清靜,以百姓之心爲心。
대답하길 고대의 제왕이 정치함에 모두 뜻을 청정함을 숭상하여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았습니다.
近代則唯損百姓以適其欲,所任用大臣,復非經術之士。
근대는 오직 백성을 버리고 욕심을 나아가며 대신을 임용할 때 다시 경영하고 재주가 있는 선비가 아닙니다.
漢家宰相,無不精通一經,朝廷若有疑事,皆引經決定,由是人識禮教,理致太平。
한나라의 재상은 한 경전을 정통하지 않음이 없고 조정도 의심되는 일이 있으면 모두 경전을 인용하여 결정하니 이로부터 사람이 예의와 교화를 알고 이치가 태평함에 이르렀습니다.
近代重武輕儒,或參以法律,儒行既虧,淳風大壞。”
근대에는 무예를 중시하고 유학을 경시하여 혹은 법률로 참고하여 유학의 시행이 이미 훼손되니 순조로운 풍조가 크게 무너졌습니다.
太宗深然其言。
태종이 그 말이 심오하다고 여겼다.
自此百官中有學業優長、兼識政體者,多進其階品。
이로부터 모든 관리에 학업이 우월한 사람을 정치의 본체에 겸직하게 하여 많이 품계를 올려주었다.
累加遷擢焉。
자주 천거하고 발탁하게 하였다.

貞觀三年,太宗謂侍臣曰:
정관 3년에 태종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中書、門下,機要之司。擢才而居,委任實重。
중서, 문하는 틀이 되는 중요한 관직이다. 인재를 발탁하여 살며 맡김이 실제로 중요하다.
詔敕如有不穩便,皆須執論。比來惟覺阿旨順情,唯唯苟過,遂無一言諫諍者,豈是道理?
조서가 온당하고 편하지 않다면 모두 집착하여 논의해야 한다. 근래에 오직 짐의 뜻을 아부하고 정황에 따르며 예예 만 함이 지나치니 한 마디의 간쟁하는 말이 없으니 어찌 도리이겠는가?
若惟署詔敕、行文書而已,人誰不堪?
만약 관청에서 조서와 칙령이며 문서를 운행할 뿐이면 사람이 누가 감당치 못하겠는가?
何煩簡擇,以相委付?
어찌 간택함을 번거롭게 하여 서로 맡기겠는가?
自今詔敕疑有不穩便,必須執言,無得妄有畏懼,知而寢默。”
지금부터 조서와 칙령에 의심스럽게 온당하고 편하지 않으면 반드시 말을 고집하여 망령되이 두려워하지 말고 알아서 잠자면서 침묵하지 않게 하라.

貞觀四年,太宗問蕭瑀曰:
정관 4년에 태종이 소우에게 물었다.
“隋文帝何如主也?”
수문제는 어떻게 군주가 되었습니까?
對曰:“克己復禮,勤勞思政,每一坐朝,或至日昃,五品已上,引坐論事,宿衛之士,傳飱而食,雖性非仁明,亦是勵精之主。”
대답하길 자기를 이겨 예의를 회복하며 근로하여 정치를 생각함에 매번 조정에 앉으면 해가 기울때까지 힘쓰며 5품 이상을 앉아서 정사를 논의하여 숙위의 선비에게 저녁밥을 전달하여 먹게 하니 비록 성품이 인자하고 명확하지 않으나 또한 격려하며 정진하는 군주였습니다.
太宗曰:“公知其一,未知其二。此人性至察而心不明。
태종이 말하길 그대는 하나를 알고 둘을 알지 못한다. 이 사람의 성품이 지극히 관찰하나 마음이 밝지 않다.
夫心暗則照有不通,至察則多疑於物。
마음이 어두우면 비추어도 통하지 않으며 관찰함에는 만물에 의심이 많다.
又欺孤兒寡婦以得天下,恒恐群臣內懷不服,不肯信任百司,每事皆自決斷,雖則勞神苦形,未能盡合於理。
또 고아와 과부를 속여서 천하를 얻어서 여러 신하 안의 회포를 복종시키지 못함을 두려워하며, 모든 관리를 신임하지 못하며 매사에 모두 스스로 결단하여 비록 정신이 피로하고 몸이 고통스러워도 이치에 다 합하지 못했다.
朝臣既知其意,亦不敢直言。
조정 신하가 이미 뜻을 아나 또한 감히 직언하지 못했다.
宰相以下,惟承順而已。
재상 이하는 오직 받들어 순종할 뿐이었다.
朕意則不然,以天下之廣,四海之衆,千端萬緒,須合變通,皆委百司商量,宰相籌畫,於事穩便,方可奏行。
짐의 뜻은 그렇지 않으니 천하가 넓고 사해가 대중이며, 천가지 만가지 실마리가 변통에 합하니 모두 모든 관리에 맡겨 생각게 하며 재상이 계획함에 일의 온당하고 편하면 바로 아뢰어 시행케 하였다.
豈得以一日萬機,獨斷一人之慮也。
어찌 하룻날의 만가지 틀을 홀로 한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겠는가?
且日斷十事,五條不中,中者信善,其如不中者何?
또한 하루에 10일을 판단하면 5조는 적중하지 않고, 적중한 것을 진실로 좋으나 만약 적중하지 못하면 어찌하겠는가?
以日繼月,乃至累年,乖謬既多,不亡何待?
하루로 한달을 계속하면 여러 해에 이르니 이지러지고 오류가 이미 많으니 망하지 않고 어떤것을 기대하겠는가?
豈如廣任賢良,高居深視,法令嚴肅,誰敢爲非?”
어찌 널리 현명하고 어진 사람을 임명하여 높은 지위와 심사숙고를 하게 하여 법령을 엄숙하게 하면 누가 감히 틀리다고 하겠는가?
因令諸司,若詔敕頒下有未穩便者,必須執奏,不得順旨便即施行,務盡臣下之意。
여러 관리에게 명령하여 만약 조서와 칙령의 반포가 온당하고 편하지 않으면 반드시 아뢰게 하여 뜻을 따라서 편하게 시행하지 않음을 신하의 뜻을 힘씀을 다하게 하였다.

貞觀五年,太宗謂侍臣曰:“治國與養病無異也。
정관 5년에 태종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길 나라를 다스림과 병을 치료함에 차이가 없다.
病人覺愈,彌須將護,若有觸犯,必至殞命。
환자가 나았다고 느껴서 장차 보호하여야 하는데 만약 접촉하여 범하면 반드시 생명을 잃게 된다.
治國亦然,天下稍安,尤須兢慎,若便驕逸,必至喪敗。
나라를 다스림도 또한 그러하니 천하가 조금 안정되어 더욱 삼감을 경쟁해야 하는데 만약 편하게 교만하고 안일하면 반드시 잃고 패함에 이른다.
今天下安危,系之於朕。故日慎一日,雖休勿休。
지금 천하의 편안과 위태로움은 짐에게 매여 있다. 그래서 날마다 하루를 삼감에 비록 쉬어도 쉬지 못한다.
然耳目股肱,寄於卿輩,既義均一體,宜協力同心,事有不安,可極言無隱。
그러나 귀와 눈과 넓적다리와 팔을 경의 무리에 맡겨서 이미 뜻이 일체로 고르며 협력하며 같은 마음으로 일에 불안함이 있으면 온당치 않다고 말한다.
儻君臣相疑,不能脩盡肝膈,實爲國之大害也。”
혹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심함에 간격을 다 준비치 못하면 실제로 국가의 큰 피해가 된다.

貞觀六年,太宗謂侍臣曰:
정관 6년에 태종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看古之帝王,有興有衰,猶朝之有暮,皆爲蔽其耳目,不知時政得失,忠正者不言,邪謅者日進,既不見過,所以至於滅亡。
고대의 제왕을 보면 흥기함과 쇠약이 있음에 아침에는 저녁이 있음과 같으니 모두 귀와 눈을 막으면 시대 정치의 득실을 알지 못하며 충정한 사람은 말하지 않고 사악하고 날마다 승진하니
朕既在九重,不能盡見天下事,故布之卿等,以爲朕之耳目。
짐이 이미 구중궁궐에 있어서 천하의 일을 다 보지 못하니 그래서 경등에게 반포하니 짐의 귀와 눈이 되어야 한다.
莫以天下無事,四海安寧,便不存意。
천하에 일이 없고 사해가 편안하여 곧 마음을 보존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可愛非君,可畏非民。
아낄 사람은 군주가 아니며 두려워할 사람은 백성이 아닌가?
天子者,有道則人推而爲主,無道則人棄而不用,誠可畏也。”
천자는 도리가 있으면 사람이 추대하여 군주로 삼고 도리가 없으면 사람이 폐기하여 등용치 않으니 진실로 두려워할만하다.
魏徵對曰:“自古失國之主,皆爲居安忘危,處理忘亂,所以不能長久。
위징이 대답하길 고대부터 나라를 잃은 군주는 모두 편안함을 거처하여 위태로움을 잊고 처리함에 혼란을 잊어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今陛下富有四海,內外清晏,能留心治道,常臨深履薄,國家曆數,自然靈長。
지금 폐하는 부유함이 사해가 있고 안팎이 맑고 편안하여 마음을 머무름에 도를 다스리며 항상 깊은 연못에 있고 엷은 얼음을 밟듯이 조심하여 국가의 역수가 자연히 신령하며 오래가게 되었습니다.
臣又聞古語 云:‘君,舟也;人,水也。水能載舟,亦能覆舟。’陛下以爲可畏,誠如聖旨。”
신이 또한 듣길 고대 말에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싣게 해주나 또한 배를 엎게도 한다고 했습니다. 폐하가 두려워함이 진실로 성인의 뜻과 같습니다.

貞觀六年,太宗謂侍臣曰:
정관 6년에 태종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古人 云:‘危而不持,顛而不扶,焉用彼相?’君臣之義,得不盡忠匡救乎?
고대 사람이 말하길 위태로우나 지탱하지 않고 엎어지나 돕지 않으면 어찌 재상으로 등용하겠는가? 임금과 신하의 의는 충성을 다하여 바로잡아 구하지 않을 수 있는가?
朕嘗讀書,見桀殺關龍逄,漢誅晁錯,未嘗不廢書歎息。
짐이 일찍이 독서함에 걸왕이 관용봉을 죽이며, 한나라가 조착을 죽일때 일찍이 글을 버려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公等但能正詞直諫,裨益政教,終不以犯顏忤旨,妄有誅責。
공등은 다만 바른 말과 곧은 간언으로 정치와 교화를 도와 더해주며 마침내 용안을 침범하여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니 망령되이 책임을 베어버립니다.
朕比來臨朝斷決,亦有乖於律令者。
짐이 근래에 조정에 임하여 판결할 때 또한 율령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公等以爲小事,遂不執言。
공 등은 작은 일로 여겨서 말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凡大事皆起於小事,小事不論,大事又將不可救,社稷傾危,莫不由此。
큰 일이 모두 작은 일에서 일어나니 작은 일을 거론하지 않으면 큰 일은 또한 장차 구할 수 없으니 사직이 기울어 위태로움이 이로부터 유래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隋主殘暴,身死匹夫之手,率土蒼生,罕聞嗟痛。
수나라 군주가 잔혹하고 포악하여 몸은 필부의 손에 죽어서 땅의 백성들이 드물게 탄식하고 애통해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公等爲朕思隋氏滅亡之事,朕爲公等思龍逄、晁錯之誅,君臣保全,豈不美哉!”
공 등은 짐을 위해 수나라 시대가 멸망한 일을 생각하고 짐은 공 등이 관용봉, 조착의 죽음을 생각하면 임금과 신하가 보존함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貞觀七年,太宗與秘書監魏徵從容論自古理政得失,因曰:
정관 7년에 태종이 비서감 위징과 조용히 고대부터 정치를 다스리는 득실을 논의하다가 말했다.
“當今大亂之後,造次不可致化。”
지금 큰 혼란이 있은 뒤에 잠시 교화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徵曰:“不然,凡人在危困,則憂死亡。憂死亡,則思化。思化,則易教。然則亂後易教,猶饑人易食也。”
위징이 말하길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위험과 곤궁에 있으면 사망을 근심합니다. 사망을 근심하면 교화를 생각합니다. 교화를 생각하면 가르침을 쉽습니다. 그러므로 난리된 뒤 교화가 쉬움은 굶주린 사람이 쉽게 먹음과 같습니다.
太宗曰:“善人爲邦百年,然後勝殘去殺。大亂之後,將求致化,寧可造次而望乎?”
태종이 말하길 선량한 사람이 나라를 백년간 다스린 연후에 잔혹함을 이기며 살인이 없어집니다. 크게 혼란한 뒤에 교화에 이름을 구하나 어찌 잠시 바라겠습니까?
徵曰:“此據常人,不在聖哲。若聖哲施化,上下同心,人應如響,不疾而速,期月而可,信不爲難,三年成功,猶謂其晚。”
위징이 말하길 이는 보통사람을 근거함이며, 성인과 철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성인과 철인이 교화를 시행하면 위와 아래가 같은 마음으로 사람이 메아리처럼 은하며 서두르지 않고도 빠르니 1달이면 가능하니 진실로 어렵지 않고 3년이면 성공함도 늦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太宗以爲然。
태종이 그렇다고 여겼다.
封德彝等對曰:“三代以後,人漸澆訛,故秦任法律,漢雜霸道,皆欲理而不能,豈能化而不欲?若信魏徵所說,恐敗亂國家。”
봉덕이 등이 대답하길 3대이후로 사람이 점차 경박하고 그릇되므로 진나라는 법률을 임명하며, 한나라는 패권과 도를 섞었고, 모두 다스리고자 하나 그렇지 못하며 어찌 교화를 하지 않으려고 했겠습니까? 만약 위징의 말을 믿으면 국가가 패하고 혼란될까 염려됩니다.
徵曰:“五帝、三王,不易人而化。
위징이 말하길 5제와 3왕은 백성을 바꾸지 않고 교화하였습니다.
行帝道則帝,行王道則王,在於當時所理,化之而已。
황제의 도를 행하면 황제이며, 왕의 도를 행하면 왕이니 당시의 다스림에 있어서 교화하였을 뿐입니다.
考之載籍,可得而知。
전적을 고찰하면 알 수 있습니다.
昔黃帝與蚩尤七十餘戰,其亂甚矣,既勝之後,便致太平。
예전에 황제와 치우가 70여년간 전쟁하여 혼란이 심하나 이미 이긴 뒤에는 곧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九黎亂德,顓頊征之,既克之後,不失其化。
9려가 도덕을 혼란케 하여 전욱이 그들을 정벌하니 이미 이긴 뒤에는 교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桀爲亂虐,而湯放之,在湯之代,即致太平。
걸은 혼란하고 포악하여 탕임금이 그를 내쫒고, 탕의 시대에서는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紂爲無道,武王伐之,成王之代,亦致太平。
주왕이 도가 없어서 무왕이 그를 정벌하니 성왕이 대신하여 또한 태평함에 이르렀습니다.
若言人漸澆訛,不及純樸,至今應悉爲鬼魅,寧可復得而教化耶?”
만약 사람이 점차 경박하고 잘못되어 순박하지 않게 된다고 말하면 지금에 모두 귀신과 도깨비가 되니 어찌 다시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德彝等無以難之,然 咸以爲不可。
봉덕이 등이 어렵다고 하지 않으니 모두 불가하다고 여겼다.
太宗每力行不倦,數年間,海內康寧,突厥破滅。
태종이 매번 힘써 실행함에 권태롭지 않아서 수년간에 중국안이 편안하며 돌궐을 격파하여 멸망케 했다.
因謂群臣曰:“貞觀初,人皆異論,云當今必不可行帝道、王道,惟魏徵勸我。
여러 신하에게 말하길 정관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이론이 있어서 지금 시대에는 반드시 황제의도, 왕도의 시행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오직 위징이 나를 격려하였다.
既從其言,不過數載,遂得華夏安寧,遠戎賓服。
이미 그의 말을 따라서 수년이 지나지 않아서 중국이 편안해지며 먼 오랑캐가 손님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突厥自古以來,常爲中國勍敵,今酋長並帶刀宿衛,部落皆襲衣冠,使我遂至於此,皆魏徵之力也。”
돌궐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항상 중국을 강하고 적대시하여 지금 추장이 칼을 차고 숙위하며 부락이 모두 의관을 입으며 내가 이에 이르게 되니 모두 위징의 힘이다.
顧謂徵曰:“玉雖有美質,在於石間,不值良工琢磨,與瓦礫不別。若遇良工,即爲萬代之寶。朕雖無美質,爲公所切磋,勞公約朕以仁義,弘朕以道德,使朕功業至此,公亦足爲良工爾。”
위징을 돌아보면 말하길 옥이 비록 좋은 바탕이나 돌 사이에 있으니 좋은 공인이 쪼개고 갈지 않으면 기와 자갈과 구별되지 못합니다. 만약 좋은 공인을 만나면 만대의 보배가 됩니다. 짐이 비록 아름다운 자질이 아니나 공이 갈고 닦아서 공이 짐을 인의로써 수고하게 하며 짐을 도덕으로 넓히니 짐의 공업이 이에 이르르니 공은 또한 족히 좋은 공인이 됩니다.

貞觀八年,太宗謂侍臣曰:
정관 8년에 태종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隋時百姓縱有財物,豈得保此?自朕有天下已來,存心撫養,無有所科差,人人皆得營生,守其資財,即朕所賜。向使朕科喚不已,雖數資賞賜,亦不如不得。”
수나라 시대의 백성이 비록 재물에서 어찌 이를 보전하겠는가? 짐이 천하를 평정한 이래로 마음을 어루만짐과 기름에 두어서 차이가 없으며 사람마다 모두 생명을 영위케 하며 바탕과 재물을 지켜 짐이 하사하였다. 짐을 향하여 울부짖음이 그치지 않으니 비록 몇가지 재물로 상을 하사하여도 또한 얻지 않음이 없었다.
魏徵對曰:“堯、舜在上,百姓亦云‘耕田而食,鑿井而飲’,含哺鼓腹,而云‘帝何力’於其間矣。
위징이 대답하길 요임금과 순임금이 재위시에 백성이 또한 말하길 밭을 갈고 먹으며 우물을 파서 마시며 배불리 먹어 배를 두드리니 황제의 힘이 무엇인가란 말이 있었습니다.
今陛下如此含養,百姓可謂日用而不知。”
지금 폐하가 이처럼 함양하면 백성이 날마다 씀에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又奏稱:“晉文公出田,逐獸於碭,入大澤,迷不知所出。
또한 아뢰어 칭하길 진문공이 밭을 나가서 탕에 짐승을 몰아내며 큰 연못에 들어가서 미혹하여 나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其中有漁者,文公謂曰:‘我,若君也,道將安出?我且厚賜若’
그 속에 어부가 있어 문공이 말하길 내가 군주라면 길이 장차 어디로 나오며, 나는 또한 후사하겠다.
漁者曰:‘臣願有獻。’
어부가 말하길 신은 바치려고 함이 있습니다.
文公曰:‘出澤而受之。’於是送出澤。
문공이 말하길 연못을 나가면 받겠다고 하니 이에 연못을 나오게 되었다.
文公曰:‘今子之所欲教寡人者,何也?願受之。’
진문공이 말하길 지금 그대가 과인에게 가르치려고 함이 무엇인가? 받길 원합니다.
漁者曰:‘鴻鵠保河海,厭而徙之小澤,則有矰丸之憂。黿鼉保深淵,厭而出之淺渚,必有釣射之憂。今君逐獸碭,入至此,何行之太遠也?’
어부가 말하길 큰 기러기와 고니는 강과 바다를 보존하여 싫으면 작은 못으로 이사가니 주살과 탄환의 근심이 있습니다. 자라와 악어가 깊은 연못에서 보존하여 싫어서 얕은 저수지로 나오면 반드시 낙시와 쏘게되는 근심이 있습니다. 지금 군주가 수탕을 쫒고 이에 이르니 어찌 행차가 이리도 멉니까?
文公曰:‘善哉!’謂從者記漁者名。
진문공이 말하길 좋다 시종에게 어부의 이름을 적게 하였다.
漁者曰:‘君何以名?爲君尊天事地,敬社稷,保四國,慈愛萬民,薄賦斂,輕租稅,臣亦與焉。君不尊天,不事地,不敬社稷,不固四海,外失禮於諸侯,內逆民心,一國流亡,漁者雖有厚賜,不得保也。’
어부가 말하길 임금께서는 왜 이름을 적습니까? 임금은 하늘을 존중하고 땅을 섬기며, 사직을 공경하며 사국을 보존하며, 만민을 자애롭게 하며, 세금을 거둠을 엷게 하며 조세를 경감해주니 신 또한 더불수 있습니다. 군주가 하늘을 존중하지 않고 땅을 섬기지 않고 사직을 공경하지 않고 사해를 견고케 여기지 않으면 외부로 제후에게 예를 잃고 안으로 백성 마음을 거스르니 한 나라의 지속과 멸망에 어부가 비록 후사하여도 보존할 수 없다.
遂辭不受。”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太宗曰:“卿言是也。”
태종이 말하길 경은 이 말을 했다.

貞觀九年,太宗謂侍臣曰:
정관 9년에 태종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往昔初平京師,宮中美女珍玩,無院不滿。
예전에 초기에 경사가 궁중의 미녀가 보배를 주어 원에 그득차지 않았다.
煬帝意猶不足,徵求無已,兼東西征討,窮兵黷武,百姓不堪,遂致亡滅。
양제가 부족하다고 여기며 징발하여 구하길 그치지 않고, 동서로 정벌과 토벌을 하여 병사를 다하여 무예를 욕되게 하니 백성이 감당치 못하고 멸망하게 되었다.
此皆朕所目見。
이는 모두 짐이 보는 바이다.
故夙夜孜孜,惟欲清淨,使天下無事。
그래서 이른 저녁에 화목하여 청정하여 천하에 일이 없게 하려고 했다.
遂得徭役不興,年穀豐稔,百姓安樂。
부역이 흥기하지 않고 해마다 곡식이 풍년이며 백성이 안락하였다.
夫治國猶如栽樹,本根不搖,則枝葉茂榮。
나라를 다스림이 나무를 심음과 같으니 근본이 요동하지 않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영화로웠다.
君能清淨,百姓何得不安樂乎?”
군주가 청정하여 백성이 어찌 안락함을 얻지 못하는가?

貞觀十六年,太宗謂侍臣曰:
정관 16년에 태종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或君亂於上,臣理於下;或臣亂於下,君治於上。二者苟逢,何者爲甚?”
혹 군주가 위에서 혼란하며 신하가 아래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혹은 신하가 아래에서 혼란하며, 임금이 위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2가지가 만나면 어찌 심하게 되는가?
特進魏徵對曰:
특별이 위징을 나가게 하여 말했다.
“君心治,則照見下非。誅一勸百,誰敢不畏威盡力?若昏暴於上,忠諫不從,雖百里奚、伍子胥之在虞、吳,不救其禍,敗亡亦繼。”
군주가 마음다해서 치료함에 신하를 비추어 보면 잘못이 있습니다. 한번 벌주어 백을 권선하면 감히 위엄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위 군주가 어둡고 사나워서 충간이 따르지 않으면 비록 백리해, 오자서가 우나라, 오나라에 있어서 화를 구제하지 못하니 패망함이 또한 따르게 됩니다.
太宗曰:“必如此,齊文宣昏暴,楊遵彥以正道扶之得治,何也?”
태종이 말하길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하니 제나라 문선제가 어둡고 포악하여도 양준언이 도를 바로잡아 도와서 다스림이 어떠하였습니까?
徵曰:“遵彥彌縫暴主,救理蒼生,才得免亂,亦甚危苦。與人主嚴明,臣下畏法,直言正諫,皆見信用,不可同年而語也。”
위징이 말하길 양준언이 포악한 군주를 미봉하여 백성을 구제하여 다스려서 겨우 난리를 면하고 또한 매우 위태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사람의 군주가 엄격하고 분명하며 신하가 법을 두려워하여 직언으로 정당하게 간하면 모두 믿어 사용하니 같은 해의 말이 아닙니다.

貞觀十九年,太宗謂侍臣曰:
정관 19년에 태종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朕觀古來帝王,驕矜而取敗者,不可勝數。
짐이 고대 이래로 제왕까지 교만하고 뻐겨서 패한 사람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不能遠述古昔,至如晉武平吳、隋文伐陳已後,心逾驕奢,自矜諸己,臣下不復敢言,政道因茲弛紊。
고대 애석함을 멀리 기술할 수 없으니 진나라 무제가 오나라를 평정하고 수나라 무제가 진나라를 정벌한 이후에 마음이 교만과 사치를 넘어서 스스로 뻐겨서 신하가 다시 감히 말하지 못하니 정치의 도가 이에 느슨하고 문란하였습니다.
朕自平定突厥、破高麗已後,兼並鐵勒,席卷沙漠以爲州縣,夷狄遠服,聲教益廣。
짐이 돌궐을 평정하고 고구려를 깨뜨린 이후에 철륵을 병합하여 사막까지 주와 현으로 자리하며 동이와 북적을 멀리 정복하니 소리와 교화가 더욱 넓어졌습니다.
朕恐懷驕矜,恒自抑折,日旰而食,坐以待晨。
짐은 교만과 긍지를 뻐기며 항상 스스로 누르고 햇볕이 성하면 먹고 앉아서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每思臣下有讜言直諫,可以施於政教者,當拭目以師友待之。
매번 신하가 직간이 있으면 정치의 교화를 시행하니 눈을 비비고 스승과 벗으로 기대하였습니다.
如此,庶幾於時康道泰爾。”
이와 같이 거의 시기가 편안하고 도가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太宗自即位之始,霜旱爲災,米穀踴貴,突厥侵擾,州縣騷然。
태종이 즉위할 때 서리와 가뭄이 재앙이 되어 미곡이 귀해지니 돌궐이 침범해 소란하며 주와 현이 소란하였다.
帝志在憂人,銳精爲政,崇尚節儉,大布恩德。
황제가 뜻을 사람의 근심에 두어 정을 날카롭게 함을 정치로 삼아서 예절과 청렴을 숭상하여 크게 은덕을 베풀었다.
是時,自京師及河東、河南、隴右,饑饉尤甚,一匹絹才得一斗米。
이 때에 수도에서부터 하북, 하남, 농우까지 기근이 더욱 심하여 한 필의 비단이 겨우 한 말의 쌀과 가격이 같았다.
百姓雖東西逐食,未嘗嗟怨,莫不自安。
백성이 비록 동서로 먹을 것을 쫒아서 일찍이 탄식하고 원망하나 스스로 편안하지 않음이 없다.
至貞觀三年,關中豐熟,咸自歸鄉,竟無一人逃散,其得人心如此。
정관 3년에 이르면 관중이 풍요롭고 익어서 모두 마을에 돌아오니 한 사람도 도망가고 흩어짐이 없으니 사람 마음을 얻음이 이와 같았다.
加以從諫如流,雅好儒術,孜孜求士,務在擇官,改革舊弊,興復制度,每因一事,觸類爲善。
간언을 따라함이 흘러감과 같으니 유학의 기술을 우아하게 좋아하고 부지런하게 선비를 구하며 임무는 관리의 선택에 있고 예전의 폐단을 개혁하며 제도를 흥기하여 회복하며 매번 한 일에 원인하여서는 무리에 접촉하면 좋게 된다.
初,息隱、海陵之黨,同謀害太宗者數百千人,事寧,後引居左右近侍,心術豁然,不有疑阻。
초기에 식은 해릉의 당이 함께 모의하여 태종을 시해하려는 사람이 수백 수천명으로 일이 편해져서 뒤에 좌우의 가까운 신하가 마음을 넓히니 의심되고 막힘이 없었다.
時論以爲能斷決大事,得帝王之體。
때에 논의하길 큰일을 결단함에 제왕의 몸을 얻었다고 한다.
深惡官吏貪濁,有枉法受財者,必無赦免。
깊이 탐관오리의 혼탁을 싫어하고 법을 굽혀 재물을 받으면 반드시 사면하지 않았다.
在京流外有犯贓者,皆遣執奏,隨其所犯,寘以重法。
수도에 밖에 범하고 해침이 있으니 모두 잡는 사람을 파견하여 침범하여도 중법으로 받아들인다.
由是官吏多自清謹。
이로부터 관리가 많이 청정하고 삼가게 되었다.
制馭王公、妃主之家,大姓豪猾之伍,皆畏威屏跡,無敢侵欺細人。
왕공과 왕비 공주의 집을 통제함에 대성의 호족과 교활한 무리가 모두 위엄으로 자취를 감추니 감히 침범하여 사람을 속이지 못했다.
商旅野次,無復盜賊,囹圄常空,馬牛布野,外戶不閉。
상인과 나그네가 들에 머무르니 다시 도적질을 안 하며 항상 공간에 갇혀서 말과 소가 들판에 퍼지니 지게문밖을 닫지 않았다.
又頻致豐稔,米斗三四錢,行旅自京師至於嶺表,自山東至於滄海,皆不齎糧,取給於路。
또한 자주 풍년이 들어서 쌀 한말이 3,4전으로 여행객이 수도에서 영표에 이르고 산동에서 창해에 이르니 모두 식량을 가져오지 않고 도로에서 공급하였다.
入山東村落,行客經過者,必厚加供待,或發時有贈遺。
산동의 촌락에 들어가서 손님이 경과함에 반드시 두터이 제공하고 기대하니 혹은 발생할때에 선물을을 주었다.
此皆古昔未有也。
이는 모두 고대와 예전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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