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5일 월요일

신촌 이미지 한의원 02-336-7100 정관정요 제 3

卷二 任賢第三(凡八章)
2권 제 3 현명한 사람의 임용
모두 8장이다.

房玄齡 杜如晦 魏徵 王珪 李靖 虞世南 李勣 馬周
방현령 두여회 위징 왕규 이정 우세남 이적 마주

房玄齡,齊州臨淄人也。
방현령은 제주 임치 사람이다.
初仕隋,爲隰城尉。
초기에 수나라에서 벼슬해 습성위가 되었다.
坐事,除名徙上郡。
일에 연좌되어 이름을 제거되어 상군으로 옮겨갔다.
太宗徇地渭北,玄齡杖策謁於軍門,太宗一見,便如舊識,署渭北道行軍記室參軍。
태종이 땅을 두루 가서 위수 북쪽에서 방현령이 군문에서 채찍을 잡고 배알하였는데 태종이 한번 보고 곧 옛 직책처럼 해주며 관직을 위북도의 행군 기실참군으로 하였다.
玄齡既遇知己,遂罄竭心力。
방현령은 이미 자기를 아는 사람을 만나니 마음과 힘을 다하였다.
是時,賊寇每平,衆人競求金寶,玄齡獨先收人物,致之幕府,及有謀臣猛將,與之潛相申結,各致死力。
이 때에 도적이 매번 평정할 때 여러 사람이 다투어 금과 보배를 경쟁하나 방현령은 홀로 먼저 다른 사람의 사물을 거두어 막부에 보내니 신하의 용맹한 장수가 있다고 하면 함께 몰래 서로 펴서 주며 각각 사력을 다하였다.
累授秦王府記室,兼陝東道大行臺考功郎中。
자주 진왕부기실에 제수되고 섬동도의 행대고공랑중을 겸직하였다.
玄齡在秦府十餘年,恒典管記。
방현령은 진부에서 10여년 있어서 항상 경전을 관리하고 기록했다.
隱太子、巢刺王以玄齡及杜如晦爲太宗所親禮,甚惡之,譖之高祖,由是與如晦並遭驅斥。
은태자와 소자왕이 방현령과 두여회를 태종이 친하고 예우함을 매우 싫어하여 고조에게 참언하여 이로부터 두여회와 함께 배척당하고 몰아내쳤다.
及隱太子將有變也,太宗召玄齡、如晦,令衣道士服,潛引入閤謀議。
은태자가 장차 변고가 있으면 태종이 방현령과 두여회를 불러서 도사의 복장을 하고 몰래 대궐에 들어가서 모의하였다.
及事平,太宗入春宮,擢拜太子左庶子。
일이 평정되자 태종이 춘궁에 들어가게 하여 태자좌서자를 발탁하였다.
貞觀元年,遷中書令。
정관 원년에 중서령으로 옮겨갔다.
三年,拜尚書左仆射,監修國史,封梁國公,實封一千三百戶。
정관 3년에 상서 좌복야에 제수되어 국사를 감수하여 양국공에 봉해지니 실제로 1300호에 봉해졌다.
既總任百司,虔恭夙夜,盡心竭節,不欲一物失所。
여러 벼슬을 모두 임명하여 경건하고 공손하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마음을 다하여 절도를 다하니 한 물건도 잃음이 없고자 했다.
聞人有善,若己有之。
사람의 선행을 들으면 자기에게 있는 듯이 하였다.
明達吏事,飾以文學,審定法令,意在寬平。
관리의 일에 밝게 통달하고 문학으로 꾸미며 법령을 살펴 결정하니 뜻을 관대하고 화평함에 두었다.
不以求備取人,不以己長格物,隨能收敘,無隔疏賤。
다른 사람에게 구하고 갖추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장점으로 사물을 배격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서 거두고 펴니 멀고 천한 사람을 격에 두지 않았다.
論者稱爲良相焉。
논의하는 사람이 좋은 재상이라고 말했다.
十三年,加太子少師,玄齡自以一居端揆十有五年,頻抗表辭位,優詔不許。
정관 13년에 태자소사에 더해지며 방현령은 스스로 15년동안 재상일을 헤아리니 자주 지위를 사양하는 표를 내나 태종은 더욱 조서로 허락하지 않았다.
十六年,進拜司空,仍總朝政,依舊監修國史。
정관 16년에 사공에 배수되고 조정을 총괄하니 예전의 국사를 감수하였다.
玄齡復以年老請致仕,太宗遣使謂曰:
방현령이 다시 나이가 많아서 벼슬길에서 물러나고자 청하니 태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말했다.
“國家久相任使,一朝忽無良相,如失兩手。公若筋力不衰,無煩此讓。自知衰謝,當更奏聞。”
국가에 오래 재상으로 임명되어 맡아서 하루 아침에 갑자기 좋은 재상이 없음이 마치 양쪽 손을 잃은 듯합니다. 공이 만약 근력이 쇠하지 않으면 번거로이 자주 사양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쇠약함을 알아서 사양하면 다시 주청하십시오.
玄齡遂止。
방현령이 중지하였다.
太宗又嘗追思王業之艱難,佐命之匡弼,乃作《威鳳賦》以自喻,因賜玄齡,其見稱類如此。
태종이 또한 일찍이 왕사업의 어려움과 방현령의 어명을 도와 보필함을 생각하고 위봉부를 지어 스스로 깨우치니 현령을 하사하니 이와 같이 종류를 칭하였다.

杜如晦,京兆萬年人也。
두여회는 경조 만년 사람이다.
武德初,爲秦王府兵曹參軍,俄遷陝州總管府長史。
무덕초기에 진왕부에 병조참군으로 갑자기 섬주의 총관부장사로 옮겨갔다.
時府中多英俊,被外遷者衆,太宗患之。
진왕부에서 영특하고 준걸이 많아서 외부로 천거된 사람이 많아서 태종이 근심하였다.
記室房玄齡曰:
기실 방현령이 말했다.
“府僚去者雖多,蓋不足惜。杜如晦聰明識達,王佐才也。若大王守藩端拱,無所用之;必欲經營四方,非此人莫可。”
부의 관료가 떠남이 매우 많으니 애석하기에 부족합니다. 두여회가 총명하고 식견이 통달하니 왕을 보좌할 인재입니다. 만약 대왕이 변방을 지킴에 팔짱을 끼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반드시 사방을 경영케 하여야 하니 이 사람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太宗自此彌加禮重,寄以心腹,遂奏爲府屬,常參謀帷幄。
태종이 이로부터 더욱 예의를 중시하여 심복으로 맡기니 상주하여 부속에 두니 항상 장막안에서 참모를 맡겼다.
時軍國多事,剖斷如流,深爲時輩所服。
시기에는 군정의 나라에 일이 많아서 판결을 함에 흐름을 끊음과 같으니 깊이는 이 때의 동료가 복종하였다.
累除天策府從事中郎,兼文學館學士。
자주 천책부의 종사중랑에 제수되고 문학관학사를 겸직하였다.
隱太子之敗,如晦與玄齡功第一,遷拜太子右庶子。
은태자가 패함에 두여회와 방현령의 공로가 제일이여서 태자우서자로 임명되었다.
俄遷兵部尚書,進封蔡國公,實封一千三百戶。
갑자기 병부상서에 옮겨가서 채국공에 봉해지니 실제 봉토가 1300호였다.
貞觀二年,以本官檢校侍中。
정관 2년에 본관으로 시중을 검교케 하였다.
三年,拜尚書右仆射,兼知吏部選事。
정관 3년에 상서우복야아 지리부선사에 겸직하였다.
仍與房玄齡共掌朝政。
두여회는 방현령과 함께 조정을 관장하였다.
至於臺閣規模,典章文物,皆二人所定,甚獲當時之譽,時稱房、杜焉。
대각의 규모, 전장과 문물에 이르기 까지 모두 두 사람이 결정하니 많이 당시대의 명예를 얻으니 때로 방 두라고 칭해졌다.

魏徵,鉅鹿人也,近徙家相州之內黃。
위징은 거록사람으로 근래에 집안이 상주의 내황에 이사갔다.
武德末,爲太子洗馬。
무덕 말기에 태자세마가 되었다.
見太宗與隱太子陰相傾奪,每勸建成早爲之謀。
태종이 은태자와 몰래 서로 투쟁함을 보고 매번 은태자 건성에게 일찍 모의하도록 권했다.
太宗既誅隱太子,召徵責之曰:
태종이 이미 은태자를 죽이고 위징을 불러 책망하면서 말했다.
“汝離間我兄弟,何也?”
너는 내 형제를 왜 이간질했는가?
衆皆爲之危懼。
대중이 모두 위태롭고 놀라했다.
徵慷慨自若,從容對曰:
위징이 강개하여 태연히 대답하였다.
“皇太子若從臣言,必無今日之禍。”
황태자가 신의 말을 만약 따랐다면 반드시 지금의 화가 없을 것입니다.
太宗爲之斂容,厚加禮異,擢拜諫議大夫。
태종이 용안을 거두고 두터이 이상하게 예우하여 간의대부로 발탁하였다.
數引之臥內,訪以政術。
자주 침실안까지 불러들여 정치기술을 물었다.
徵雅有經國之才,性又抗直,無所屈撓。
위징은 우아하며 나라를 경영하는 재주가 있으며 성품이 또한 강직하여 굽힘이 없었다.
太宗每與之言,未嘗不悅。
태종이 매번 그와 더불어 말함에 일찍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徵亦喜逢知己之主,竭其力用。
위징이 또한 지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남을 기뻐하여 힘을 다 썼다.
又勞之曰:“卿所諫前後二百餘事,皆稱朕意,非卿忠誠奉國,何能若是?”
또한 그를 위로하여 말하길 경이 간쟁한 것이 200여일 전후인데 모두 짐의 뜻을 칭하며 경이 충성으로 나라를 받들지 않았으면 어찌 이와 같이 했겠는가?
三年,累遷秘書監,參預朝政,深謀遠算,多所弘益。
3년에 자주 비서감에 옮겨가며 조정에 참여하고 미리하며 깊은 도모와 먼 계산이 많이 널리 이익이 있었다.
太宗嘗謂曰:“卿罪重於中鉤,我任卿逾於管仲,近代君臣相得,寧有似我於卿者乎?”
태종이 일찍이 말하길 경의 죄는 관중이 제환공의 갈고리에 적중시킴보다 크나 내가 관중보다 경을 더 신임하였고, 근대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얻음이 어찌 나와 경 사이와 유사함이 있겠는가/
六年,太宗幸九成宮,宴近臣,長孫無忌曰:
정관 6년에 태종이 구성궁에 행차하여 가까운 신하에게 잔치를 여는데 장손무기가 말했다.
“王珪、魏徵,往事息隱,臣見之若讎,不謂今者又同此宴。”
왕규, 위징은 전에 식은태자를 섬기니 신은 그를 원수처럼 보는데 지금은 또한 같이 잔치함을 말하지 못합니다.
太宗曰:“魏徵往者實我所讎,但其盡心所事,有足嘉者。朕能擢而用之,何慚古烈?徵每犯顏切諫,不許我爲非,我所以重之也。”
태종이 말하길 위징은 전에 실제로 내 원수이나 진심으로 섬기니 족히 아름다움이 있다. 짐이 발탁하여 등용함에 고대의 맹렬함을 부끄러워하겠는가? 위징은 매번 용안을 범하며 적절히 간언하니 내가 잘못함을 허락하지 않으니 내가 그래서 그를 중시한다.
徵再拜曰:“陛下導臣使言,臣所以敢言。若陛下不受臣言,臣亦何敢犯龍鱗,觸忌諱也。”
위징이 다시 절하면서 말하길 폐하가 신을 인도하여 말하게 하나 신은 감히 말하겠습니다. 만일 폐하가 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신 또한 감히 용린을 범하여 꺼림을 접촉하겠습니까?
太宗大悅,各賜錢十五萬。
태종이 크게 기뻐하여 각각 돈 15만전을 하사하였다.
七年,代王珪爲侍中,累封鄭國公。
정관 7년에 왕규가 대신하여 시중이 되어 여러번 승진하여 정국공에 봉해졌다.
尋以疾乞辭所職,請爲散官。
질병으로 사직하려고 말하니 청하여 벼슬을 떠나고자 했다.
太宗曰:“朕拔卿於讎虜之中,任卿以樞要之職,見朕之非,未嘗不諫。
태종이 말하길 짐이 경을 원수와 포로속에서 발탁하여 경을 중요한 관직에 임명하니 짐의 잘못을 발견하면 일찍이 간언하지 않음이 없었다.
公獨不見金之在鑛,何足貴哉?
공은 홀로 금이 광산에 있음을 보지 못하니 어찌 족히 귀하겠는가?
良冶鍛而爲器,便爲人所寶。
잘 단련하여 그릇을 만들면 곧 사람의 보배가 된다.
朕方自比於金,以卿爲良工。
짐이 바로 스스로 황금에 비유하니 공은 좋은 공인이 되어라.
雖有疾,未爲衰老,豈得便爾耶?”
비록 질병이 있어서 노쇠하지 않았는데 어찌 사임하는가?
徵乃止。
위징이 사임을 그쳤다.
後復固辭,聽解侍中,授以特進,仍知門下省事。
뒤에 다시 고사하여 시중을 풀어줄 것을 청하니 특별히 승진하여 제수하니 문하성사가 되었다.
十二年,太宗以誕皇孫,詔宴公卿,帝極歡,謂侍臣曰:
정관 12년에 태종이 황손의 탄생에 공과 경에 잔치를 하명하여 황제가 매우 기뻐하여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貞觀以前,從我平定天下,周旋艱險,玄齡之功無所與讓。
정관 이전에는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여 두루 어려움과 험함을 격고 방현령의 공로를 사양할 수 없다.
貞觀之後,盡心於我,獻納忠讜,安國利人,成我今日功業,爲天下所稱者,惟魏徵而已。
정관 이후에 나에게 마음을 다하여 충간을 들여보내 나라를 편안케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여 내가 지금 공업을 완성하여 천하에 칭해짐이 오직 위징의 공로일 뿐이다.
古之名臣,何以加也。”
고대의 이름난 신하가 어찌 더해지겠는가?
於是親解佩刀以賜二人。
이에 친해 찬 칼을 풀어 두 사람에게 하사하였다.
庶人承乾在春宮,不修德業。
서인이 된 승건은 동궁에 있어서 덕과 학업을 닦지 않았다.
魏王泰寵愛日隆,內外庶寮,咸有疑議。
위왕 태에 대한 총애가 날마다 융성하여 안팎의 관료 모두 논의하였다.
太宗聞而惡之,謂侍臣曰:
태종이 그 소식을 듣고 그것을 싫어하여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當今朝臣,忠謇無如魏徵,我遣傅皇太子,用絕天下之望。”
지금 조정의 신하는 위징처럼 충언과 직간이 없으니 내가 황태자의 스승을 파견하여 천하의 명망을 끊을 것이다.
十七年,遂授太子太師,知門下事如故。
정관 17년에 태자태사에 제수되니 문하사를 예전처럼 보았다.
徵自陳有疾,太宗謂曰:
위징이 스스로 질병이 있음을 진언하니 태종이 말했다.
“太子宗社之本,須有師傅,故選中正,以爲輔弼。知公疹病,可臥護之。”
태자는 종묘와 사직의 근본이며 스승이 있어야 하므로 중용과 바른 사람을 선택하여 보필하게 합니다. 공이 질병이 있음을 아니 누워서 가르쳐도 됩니다.
徵乃就職。
위징이 직에 나아갔다.
尋遇疾。
질병에 만나게 되었다.
徵宅內先無正堂,太宗時欲營小殿,乃輟其材爲造,五日而就。
위징 지방ㄴ에 먼저 정당이 없으니 태종은 그 때 작은 궁전을 짓게 하여 재목을 만들게 하니 5일에 완성하였다.
遣中使賜以布被素褥,遂其所尚。
사자를 파견하여 베 피복과 흰 이불을 하사하여 숭상케 하였다.
後數日,薨。
수일뒤에 그가 죽었다.
太宗親臨慟哭,贈司空,諡曰文貞。
태종이 친히 가서 통곡하며 사공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이라고 하였다.
太宗親爲制碑文,復自書於石。
태종이 친히 비석문장을 지어서 다시 돌에 스스로 글을 썼다.
特賜其家食實封九百戶。
특별이 집안에 식읍을 실제 900호를 봉하였다.
太宗後嘗謂侍臣曰:
태종은 뒤에 일찍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夫以銅爲鏡,可以正衣冠;以古爲鏡,可以知興替;以人爲鏡,可以明得失。朕常保此三鏡,以防己過。今魏徵殂逝,遂亡一鏡矣!”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 의관을 바로잡을 수 있다. 예전에 거울이 되니 흥망과 대체를 알게 되었다. 삶이 거울이 되니 득실을 밝힐 수 있었다. 짐은 항상 이 3명 거울을 보존하여 자기 과실을 방지하였다. 지금 위징이 죽어 서거하니 한 거울을 잃었구나!
因泣下久之。
울음을 오래 하였다.
乃詔曰:“昔惟魏徵,每顯予過。
조서를 내려 말하길 예전에 위징이 있어서 매번 내 잘못을 드러내 주었다.
自其逝也,雖過莫彰。
서거한 뒤로부터 비록 잘못이 있어도 드러나지 않았다.
朕豈獨有非於往時,而皆是於茲日?
짐이 어찌 홀로 지난때의 잘못을 모두 지금의 날에 옳겠는가?
故亦庶僚苟順,難觸龍鱗者歟!
그래서 또한 여러 관리가 진실로 순종하여 용린을 접촉하기 어렵게 되었다.
所以虛己外求,披迷內省。
그래서 자기를 비게 하여 밖에서 구하여 미혹을 쪼개 안의 반성을 하게되었다.
言而不用,朕所甘心。
말로는 사용하지 않음을 짐이 달게 받아들이겠다.
用而不言,誰之責也?
등용하였은데 간언하지 않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自斯已後,各悉乃誠。
이 이후에 각자 모두 충성을 하여라.
若有是非,直言無隱。”
만약 시비가 있으면 직언하길 숨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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