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3일 화요일

노름 쌍륙으로 화재와 화상흉터치료

노름 쌍륙으로 화재와 화상흉터치료


우리나라의 쌍륙
우리나라에서 쌍륙이 민간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시대인데, 주로 정초나 농한
기에 많이 놀았다고 한다. 쌍륙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 문헌으로는취설(聚說),쌍륙해(雙六解),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고려사(高麗史), 목민심서(牧民心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견한잡록(譴閑雜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재물보(才物譜), 조선부(朝鮮賦)등이 있다.
송나라 문헌북사(北史)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 무렵 쌍륙 놀이가 행해졌음을알 수 있지만, 연대를 알 수 있는 우리나라 문헌 가운데 최초로 쌍륙이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의 문헌동국이상국집이다. 이 책은 고려시대 학자 이규보(李奎報)의 시문집인데,‘전 이지와 문 장로가 찾아와서 쓴 나의 강남집 중의 시운을 차하다(次韻全履之文長老見訪用吾江南集中詩韻)’라는 시에옥으로 만든 판에서 쌍륙을 친다(玉局爭雙六)’라는 구절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쌍륙이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옥으로 쌍륙판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쌍륙은 특정계층의 호사스런 오락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전 이지와 문 장로가 찾아와서 쓴 나의 강남집 중의 시운을 차하다
閉閤留賓手挽衫 문을 닫고 손의 옷을 끌어당겨 만류하고
細斟家倍綠如藍 빚은 술을 살며시 잔질하니 쪽처럼 푸르구나
閑呼玉局爭雙六 한가히 옥 말판을 가져다가 쌍륙놀이하고
醉把朱絃弄十三 취하여 비파를 잡고 열세 줄을 희롱하네
不必論文期渭北 반드시 문을 논하여 위북을 기약할 것이 아니라
端合聯句會城南 성남에 모여 시구를 연하는 것이 합당하리
殷勤最愛曹溪老 은근하게 가장 사랑하는 조계 늙은이
約我靑山共結庵 나와 함께 푸른 산에 암자 짓기를 약속했네
조선시대 기록은 그 양과 내용 면에서 더욱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문헌의 내용들을 보아 조선시대에는 민간인들에게까지 널리 행해졌던 놀이임을 알 수 있다. 정희득(鄭希得)해상록(海上錄)에 쌍륙 놀이를 보고 지은 시가 전해진다.
전칠의 집에서 쌍륙놀이를 보고
江雨欲來風滿堂 강에 비 오려고 바람이 집에 가득하니
奇花異草一庭香 진기한 꽃 이상한 풀 온 뜰이 향기롭네
樗蒲半日悲歡喜 반나절 도박으로 슬퍼했다 기뻐했다 하는 것은
擬擲愁腸博酒觴 마음의 시름 씻으려고 술내기 하는 것이라오
또한 김시습(金時習)의 매월당집(梅月堂集)을 보면륙이야! 라는 외침에 놀라 취해 졸다 깨어나다(六大呼來午夢醒)’라는 시구가 나오는데, 이 구절을 통해 이 놀이가 얼마나흥미진지하게 진행되었는가 짐작할 수 있다. 놀이주체들의 열중과 몰입은 이 놀이에 대한 사회적 우려로 이어졌는데, 조선왕조실록중종 20(1525) 기록에는 형조 판서 조계상(曹繼商)과 도승지 이세정(李世貞)이 자주 집에 모여 쌍륙을 두었으며 두 사람이 자주 모여 오랜 시간을 보내므로 역적모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받은 일도 있었다고전한다. 이 놀이에 대한 우려는견한잡록조선부에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바둑과 쌍륙 같은 놀이를 민간 자제들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局雙陸之類民間子弟皆不許習)
다만 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도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 하겠다(但或有耽玩喪志者或有賭博傷財者
雜技可謂無益而有損也)
쌍륙(雙六)의 역사와 놀이방법
 
세종 6(1424)718
제목의산군 남휘를 불러 윤자당의 첩 윤이를 간통하고 폭행한 것에 대해 꾸짖다.
임인년에 공주가 병이 나서, 내가 진념(軫念)하여 사람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였는데
, 너는 병증세가 어떠한지 알지도 못하고 내시를 데리고 쌍륙(雙六)만 치고 있어,
조금도 가장(家長)된 도리가 없었고.
세종 14(1432)68
제목사신들이 요구한 물품을 주다.
세 사신이 승상(繩床쌍륙(雙六죽선(竹扇) 등의 물품을 요구하므로 주라고 명하
였다.
성종 20(1489)1216
제목수복 석시 등이 어전에서 도박을 한 것을 알고도 묵인한 안강정 이읍을 국문하
게 하다.
수복(守僕) 석시(石屎) 등이 어실(御室)에 들어가서 쌍륙(雙六)으로 술내기를 하고 인하여 서로 싸우다가 화로를 차서 지의(地衣)를 불사른 것을 이미 취초(取招)하였는데.
성종 21(1490)119
제목어전 안에서 술내기를 하고 돗자리를 태운 석시 이읍을 국문하게 하다.
문소전 수복노(文昭殿守僕奴) 석시(石屎)가 전(殿) 안에서 쌍륙(雙六)을 던져서 술내기를 하면서, 서로 싸우다가 화로를 차서 불을 흩뜨려 지의(地衣)를 태운 죄는 율()이 사형(死刑)에 해당합니다.
중종 17(1522)616
제목사헌부가 의성위 남치원, 곤양수 이하, 금란 부정 이우손, 황여헌 등을 서용할수 없다고 아뢰다.
사촌 누이와 함께 있으며 혹 과도하게 술을 마시기도 하고, 혹은 쌍륙놀이를 하기도
하여 행실이 착하지 못하였으니 서용할 수 없습니다.
중종 20(1525)75
제목고변자 김광필이 형조 판조 조계상과 도승지 이세정을 고변하다.
조계상이 퇴근한 후 자주 그의 집에 와서 쌍륙을 두기도 하고 장기를 두기도 하고.
명종 16(1561)1229
제목충순당에 나아가 나례를 관람하고 윤목을 던지는 놀이를 하라고 전교하다.
예로부터 나례를 관람할 때에 윤목을 던지는 놀이는 [저포(樗蒲)나 쌍륙(博塞)의 종류이다]가 있었으니 지금도 그 놀이를 하라.
효종 8(1657)816
제목송시열이 상소문에 첨부한 책에서 오락을 삼가고 검속할 것을 청하다.
그런데 신이 듣자니 전하께서 자주 희빈과 여러 공주들로 하여금 쌍륙과 바둑을 즐기
게 하고서 놀이 값을 징수해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차림으로써 시새워가며 풍송하게
차린다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쌍륙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선 중기까지 이 놀이를 즐겼던 계층과 그것이 행해졌던 장소의 다양성을 짐작할 수 있는데, 부원군(府院君), ()과 공주들, 형조판조 등 비교적 상류계층이 즐겼던 놀이였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풍속화가인 신윤복(申潤福)과 김득신(金得信)의 그림을 보면 평범한차림새의 여인과 선비가 쌍륙을 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따라서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이 놀이가 좀더 다양한 계층으로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한제국 말의 풍속화가 김준근(金俊根)의 기산풍속화(箕山風俗畵)1930년대에 나온 최운식의 춘화첩에도 쌍륙판이 등장하고 있어, 20세기 초반까지도 계속 행해졌던 놀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쌍륙이 처음 행해진 것이 언제인지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으나 백제 때 악삭이 행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 무렵이나 그 이전부터 이 놀이가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상류계층 사이에서 국한되어 전해오다가조선 후기에는 민간에게까지 알려져 폭넓게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쌍륙(雙六)의 역사와 놀이방법
쌍륙을 놀기 위해서는 쌍륙판, 주사위 두 개, 그리고 서른 개의 말이 필요하다. 쌍륙판은 말판이라고도 부르는데, 가로 70~80cm, 세로는 40cm 내외 크기의 직사각형이다. 테가 높게 둘려진 것이 일반적이나 테가 없거나 낮게 드리어진 쌍륙판도 있다.
쌍륙판 안에는 검은 선으로 밭(또는 )이라 부르는 구획을 그려 넣는다. 각 판마다 크기나 모양은 차이가 있지만 여섯 개의 밭을 상하, 좌우가 대칭이 되도록 모두 네 군데에 그려 넣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리고 좌우의 여섯 개의 밭 사이에 주사위를 던질 수 있는 칸을 크게 그려 넣는다. 말의 모양은 반구(半球)모양에 뾰족한 탑이 올라와 있는 형태이다. 중국의 말은 우리나라 말에 비해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말은 두 가지 색으로 채색하는데 상하(上下)의 색을 다르게 칠한다. 상하 두 색의 배치를 다르게 하여 상대편 말과 자기편 말을 구분한다. 색은 홍색과 녹색을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견한잡록의 기록을 보아 흑색과 백색의 색을 사용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립 민속 박물관 연구원 김영진 님의 글 중에서
 
1490, 성종 21년에는 쌍륙 때문에 터진 희대의 사건도 있었으니, 관료들이 술내기로 쌍륙을 두다가 싸움이 벌어졌는데, 싸우다가 그만 화로를 차버렸고 돗자리에 불이 붙어 태조와 태종,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홀라당 태워버린 것이다. 사건에 왕실 종친도 연류되어 있어 관료들은 겨우 목숨만은 건사할 수 있었다.
왕실의 왕비를 모신 사당에서 노름을 하다가 시비가 붙어서 불을 낸것을 보면 도박이 패가망신을 함을 알수 있다. 한번 태운 사당은 복원공사를 하겠지만 한번 불에 그을려 손상된 몸의 피부는 복원이 어렵다. 이런 불에 데인 피부에는 화상흉터가 남을수 있는데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에서 개발한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원래 상태의 피부로 회복하는 치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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