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의 불고문과 화상흉터치료
상앙(商鞅,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38년)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유학자이자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상나라를 분봉받아 후작이 되어 상앙으로 부르며 본래의 성(姓)은 희(姬),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鞅)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 위나라 공족(公族)출신이라서 위앙(衛鞅)이라 불렸다.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공족의 후예였으며, 생전에는 유학자를 자처하였다. 거열형의 창시자였는데, 후일 그 자신이 거열형으로 처형된다.
상앙이 추진했던 변법은 당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으며, 강력한 부국강병을 원했던 진 효공과 뜻이 맞아 이를 실행할 수 있었다.
변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가작통법: 다섯집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단위로 만들었으며, 납세와 징병의 단위가 되었다.
상업 억제: 초기에는 상업을 악업으로 보았고 농업에 전념하기 위해 상업을 강력히 탄압했으나, 진나라가 어느정도 국력이 상승하자 농업과 상업의 균형있는 성장을 꾀하였다.
노예제 폐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지주들의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이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양인을 확충하여 재정을 확충하였다.
군공수작제: 어느 누구나 전쟁터나 국가를 위해서 공을 세웠다면, 그에 마땅한 작위를 내렸다.
악습 및 구습 타파: 진나라에 내려오는 잘못된 악습이나 오랜 전통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진효공과 상앙의 강력한 추진에도 불구하고 이 변법을 좌초시키기 위한 시도는 여러 번 일어났으며, 특히 진 최고의 유력부족인 맹, 서, 백씨 부족의 반발과 당시 태사였던 감룡과 두지의 반대로 변법은 여러번 중단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상앙은 변법에 대한 반대자는 용서치 않았고 변법을 어길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력한 엄벌주의로 대처하였다. 이 변법 앞에서는 당시 태자였던 영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태자가 변법을 어기자 스승이었던 공자 건을 잡아 그의 코를 베는 형벌을 내렸다. 이 이후로 공자 건은 영원히 은둔했으며 태자는 상앙에 대한 증오를 품게된다.
20년동안 부지런히 변법을 추진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하서 수복: 지금의 장안부근을 장악함으로써 당시 최대 패권국가였던 위나라를 제압하고 전국시대의 패자로 등극한다.
함양 천도: 지금의 장안인 함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한다.
강력한 군사력: 양인이 많아지면서 군사수가 증대했고 재정이 확충되어 강력한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상앙은 이 공으로 대량조에 올라 명실상부한 사실상의 공동군주가 된다.
벌을 내리는 방법으로 상앙은 돈이 아니라 목숨을 내어놓으라 했다. 시경, 상서를 금한 대신 상앙은 법가라는 자신만의 방법을 제시했다. 법이 들어갔다고 해서 법가가 곧 법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앙이 해석한 법은 “군왕의 입에서 나온 말이 곧 법으로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데 목적이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상앙은 덕이 아니라 힘을 제시했다. 힘은 무거운 벌을 내려 기강을 다스리는 것으로 사람 목숨을 벌의 단위로 삼았다. 상앙이 제정한 형법을 보면 그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눈치챌수 있다. 능지, 湯鑊탕확, 剝皮박피, 腰斬요참, 五馬分尸오마분시, 덧붙인다면 九族구족을 멸하는 죄 역시 상앙이 발명한 것이다. 상앙이 통치하에는 심지어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잘못조차 중형에 처해졌다. 나무를 끌고가다 먼지를 일으킨 사람은 코를 베었다.
중국 역사 속에서 살펴보는 화폐 이야기 천위루, 양중수 지음, 이지은 옮김, 아이넷북스, 페이지 68
탕확 (湯鑊)이란, 사람을 집어넣어 죽이기 위하여 물을 끓일 때 쓰던 가마솥이다. 사람을 삶는데 정이나 확을 사용했으므로 이 형을 확팽(鑊烹), 정확(鼎鑊), 탕확(湯鑊) 등으로 불렀다. 기록을 살펴보면 “전국시대에 이르러...... 육형이 증가했다. 대벽(사형)에 착진, 추협(抽脇), 확형(鑊亨)등의 형이 있어 ‘신(臣)이 사람으로 하여금 둥근 옥을 가지고 가도록 한 것도, 대왕을 속인 죄도 다 쳐 죽일 죄에 해당하는 것을 압니다. 원하건대 탕확만은 않도록’등의 서술이 있다.”
춘추시대가 되어 주왕조가 쇠퇴하고 제후가 패권을 서로 다투어 법제도가 혼란해졌다. 그 무렵 국왕이 사람을 처형할 때 자주 이용했던 것이 팽(烹:솥에 삶기)의 방법이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제나라 애공은 기후에게 모함을 당해 주나라 이왕에 의해 큰 가마솥에 삶아지는 형을 당했다.
기원전 547년 송나라의 태자 좌는 성공에게 유폐되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후에 태자의 억울한 죄를 알게 된 성공은 매우 후회하며 태자 좌의 죄를 예언한 사인(환관)인 이려를 삶아 죽였다.
또한 진의 공자 중이가 정나라로 망명하였을 때, 정의 문공에게 중이를 죽이도록 진언한 피첨의 이야기도 있다. 중이가 후에 진의 문공이 되어 정나라를 공격하였을 때, 지난날의 원한을 풀기 위해 피첨을 내놓도록 요구하였다. 망설이는 정의 문공에게 피첨은 출두를 자청하여 진나라로 보내졌다. 진의 문공은 굉장히 크고 발이 셋 달린 솥을 준비하여 피첨을 그 솥에 삶을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끌려나온 피첨은 양손으로 솥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진나라 군사들아 잘 들어라. 요즈음 같은 세상에 나만큼 국왕에게 충실한 자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에 충의를 다한 나를 이렇게 가마솥에 삶을 수 있느냐!”
이를 들은 진의 문공은 피첨의 충의심과 용기에 감동하여 그를 정나라로 되돌려 보냈다.
-좋은친구(star****)님의 글 중에서-
위 내용을 보면 중세 종교 마녀재판 화형에 앞서 정말 솥에 사람을 끓여 죽이는 팽형하는 솥이 등장한다. 위 내용을 봐도 정말 불에 대한 편도체에 기억된 인간의 원형적인 공포심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불로 끓인물에 죽길 각오하고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자신의 의지와 절개를 지킨 사람 역시 그 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화상을 입을 때 느끼는 작열통은 통증증 가장 극심하게 느껴지는데 화상 흉터로 다시 눈물짓게 한다. 이런 화상흉터를 www.imagediet.co.kr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의 한방 피부과 전문의인 홍성민 원장은 화상후유증을 火傷 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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