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6일 일요일

중국의 용천보검과 금창상 흉터치료

중국의 용천보검과 금창상 흉터치료


2015720~22일 방송되는 '세계견문록 아틀라스'에서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한정적인 용도로만 사용되는 칼에 대해 파헤친다. 칼은 긍지이며 자존심이자, 지켜야 할 가치 그 자체. ()과 검을 몸처럼 사랑하는 검술가들부터 주방에서 사용되는 식칼 속 숨겨진 역사, 칼의 전통을 사랑하고 역사를 계승하는 장인들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시청자에게 전달한다. 2015720일 밤 1140분 첫 방송되는 1부에서는 2600년의 역사, 용천보검을 다룬다. 중국인에게 검은 군자의 상징이자 정직과 정의 그 자체. 수많은 문인이 검을 찬양하는 시를 남겼으며, 그만큼 검을 찬양하는 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 저장성에 위치한 용천시. 우리에겐 낯선 지명이지만 맑은 물과 풍부한 철, 명검의 탄생을 위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곳이다
2,600여 년 전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명검으로 손꼽히는 '용천보검'이 탄생했는데. 이곳을 방문한 이는 바로 세계무예마스터십 추진단 전담위원이자 전통무예 십팔기보존회 사무국장인 박금수 박사가 만나는 검의 명인들과 온몸으로 체험하는 명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춘추시대 후기, ()나라와 월()나라가 남쪽 지역에서 패권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두 나라 모두 물 길과 숲이 많아 차전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력군은 보병과 수군이었다. 따라서 두 나라 군대의 보편적인 무기는 검이 됐다. 따라서 오, 월 양국에게 검 생산은 매우 중요하게 됐고 검 주조 기술에 있어 중원에 있는 다른 나라들보다 크게 앞서면서 중국 고대 보검의 고향이 됐다.
저장(浙江)성 용천(龍泉, 룽취안)은 예부터 오월 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용천보검은 중국 검 주조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용천 일대에 매장된 철광석인 철영(鐵英)’, 검을 가는 양석(亮石)’, 칼집에 사용되는 화려목(花櫚木)’은 검 제조에 유리했다. 게다가 진계산(秦溪山, 친시산)의 샘물은 검을 벼릴 수 있는 물을, 무성한 숲은 충분한 숯 연료를 각각 제공했다.
춘추(BC770-BC476)시대 말기 오나라의 검 주조 대가인 구야자(歐冶子)가 용천 진계산에서 용연(龍淵)’, ‘태아(泰阿)’, ‘공포(工布)’라는 명검 3개를 만들었다. 그는 용연을 마을 이름으로 삼고 기술을 전수, 용연은 이후 1000년 동안 중국에서 유명한 검 주조의 고장이 됐다. 이후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같은 한자를 피하기 위해 ()’ 대신 ()’을 사용해 지명을 용연에서 용천으로 바꾸었다. 지금도 저장성 용천은 보검 생산으로 유명하다.
선 씨 일가는 청나라 함풍제(咸豊帝AD 1831-1861) 때부터 검을 만들었다. 선신페이의 증조 할아버지인 선차오칭(沈朝慶)선씨 대장간은 용천 지역에서 아주 유명했다. 당시 선 씨 집안의 대장장이는 농기구를 주로 생산했지만 농기구 생산을 통해 철을 주조하는 비법을 터득하자 검 주조의 기본기를 다졌다.
한 세대 동안 철 주조 경험을 축적한 이후 선신페이의 할아버지인 선팅장(瀋庭璋)은 광서 1 8(1892) ‘심광융검포(瀋廣隆劍鋪)’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널리 번성하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출처] 전통장인 선신페이(沈新培), ‘용천보검(龍泉寶劍)’의 전설을 잇다 작성자 인민화보 월간중국
 
세계견문록 아틀라스를 시청하니 용천은 깍아지를 듯한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있고 다리 이름도 劍川橋검천교라고 하였다. 이태백의 시중에 萬里橫戈探虎穴 (만리횡과탐호혈) 만 리를 창 비껴들고 호랑이 굴을 뒤지고, 三盃拔劒舞龍泉 (삼배발검무용천) 세 잔의 술에는 칼을 빼어 들고 용천검무를 춘다. ”고 할정도로 용천검은 유명하다. 두보와 이백도 용천검에 반해 말을 탈 때 항상 용천검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절강성의 근원이 되는 폭포에 와보니 돌이 붉었는데 그만큼 철 성분이 강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용천검을 만든 구야자 [歐冶子] 구야(區冶)하고도 불린다. 춘추 시대 월()나라 사람. 야공(冶工). 칼을 잘 만들었다. 월나라 임금 구천(句踐)의 명령으로 거궐(巨闕)과 담로(湛盧), 순구(純鉤), 승사(勝邪), 어장(魚腸) 등 다섯 자루의 명검(名劍)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라 임금 합려(闔閭)가 어장검을 얻어 전제(專諸)가 오왕료(吳王僚)를 죽일 때 사용했다. 나중에는 간장(干將)과 함께 초소왕(楚昭王)을 위해서 용연(龍淵)과 태아(泰阿), 공포(工布) 등 명검을 만들었다.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중국에서 수 많은 전쟁과 무사들이 있었을 테니 한의학에서도 칼에 베이거나 화살에 찔린 외과적인 상처인 金瘡傷금창상 치료에 상당히 노하우가 많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도 언해구급방이란 책이 있는데 여러 가지 위급사항에 대한 처치중에 잘리거나 베이거나 화살에 맞는 등의 내용을 다룬 한의학이 존재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응급 외과 처치 이후의 흉터치료에 대한 노하우는 동양의학과 서양의학 모두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현대에는 무사가 없으니 칼에 베이거나 찔리는 상처는 거의 없고 대다수가 병원의 메스가 만들어낸 흉터가 최고로 많다. 불가 선종에서 말한 살인검이 아닌 활인검으로 발생한 흉터인데, 흉한 것을 길한 것으로 치료하는 행위 자체가 다시 흉터가 발생해서 흉한쪽으로 넘어가니 인생의 일이란 새옹지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병원에서 만든 흉터는 외과의사가 처치할 수 없고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침과 침, 한약 재생약침으로 피부 관리 및 치료가 가능하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