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0일 월요일

앤 불린의 엘리자베스 여왕 출산과 산후 ST침 튼살치료

앤 불린의 엘리자베스 여왕 출산과 산후 ST침 튼살치료


앤 불린(Anne Boleyn , 1501/1507?- 1536519)은 헨리 8세의 제1계비이며 엘리자베스 1세의 생모이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민족주의 성격의 종교개혁을 일으켜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시켰다.
딸 엘리자베스를 낳은 후, 불륜과 이단, 모반 등의 혐의를 받아 1536519일 사형당했다. 그로부터 11일 후에 헨리 8세는 앤 불린의 상궁출신이었던 제인 시무어와 결혼하였다. 후일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가 되는 캐서린 하워드는 그녀의 외사촌 여동생이었다.
앤 불린의 아버지는 외교관 토머스 불린, 어머니는 명문집안인 하워드 가문의 엘리자베스였다. 생년월일은 명확하지 않으나 초여름에 노포크 지방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기록들에 의하면 앤 불린은 1499년에서 1512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나 학계에서는 1501년이나 1507년을 가장 신빙성 있게 보고 있다. 후에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가 되는 캐서린 하워드는 그녀의 외삼촌 에드먼드 하워드 경의 딸이었다.
그녀의 자매 메리 불린 역시 헨리 8세의 정부였다. 윌리엄 카레이의 미망인으로 한때 헨리 8세의 정부였던 언니 메리 불린은 윌리엄 스태포드와 재혼하였다.
총명하고 재치있는 성격으로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수업을 받으며 예법을 닦았고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했다.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왕비 메리 튜더의 시녀가 되었다가 루이 12세가 승하하고 프랑수아 1세가 즉위하자 그의 정비 클로드의 시녀로 간택되었다. 오랜 프랑스 생활로 프랑스 문화에 동화된 앤 불린은 이후로도 프랑스식 옷차림, 문학, 음악, 그리고 종교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1521년경 앤 불린은 오몬드 공작과의 혼담을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와 헨리 8세의 정비 아라곤의 캐서린의 시녀가 된다. 지참금 문제로 오몬드 공작과의 혼담이 무산되자 앤 불린은 노섬브리아 공작의 후계자 헨리 퍼시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분 차이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반대로 퍼시와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이에 낙심한 헨리 퍼시는 궁정을 떠났다.
전기작가 안토니아 프레이저에 따르면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1526년경이라고 한다. 앤 불린은 전통적인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인은 아니었으나 흑발에 까만 눈의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당시 유럽 유행의 최첨단을 걸었던 프랑스 궁정에서 받은 교육 덕분에 세련된 기품이 배어 있었으며 화술도 뛰어났다. 이미 앤의 누이(언니인지 동생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메리가 언니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메리 불린을 정부로 두었던 전력이 있는 헨리 8세는 앤마저 정부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앤은 왕의 유혹을 거절하며 정식 결혼을 요구했다. 왕비 캐서린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던 헨리 8세는 젊은 앤 불린이 왕자를 낳아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1527년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시도하였다. 캐서린의 거센 저항과 로마 교황청의 끈질긴 반대에 부딪히자 헨리 8세는 결국 종교개혁을 일으켜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시키고 나서 스스로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529년부터 앤은 왕의 총애를 받으며 잉글랜드 궁정에서 출세가도를 걷는다. 하지만, 앤 불린은 신실한 캐서린 왕비를 왕궁에서 쫓아낸 여자라고 백성의 반감을 샀다.
1532년 헨리 8세는 앤에게 펨브로크 여후작(Marquess of Pembroke)의 지위를 내려 그녀의 신분을 격상시켰다. 미혼 여성이 직접 작위를 하사받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같은 해 크랜머 대주교가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을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무효로 했다.
15331월경 헨리 8세와 앤 불린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 앤은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같은 해 61일 앤 불린은 호화로운 예식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비로 즉위했다.
153397일 앤은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헨리 8세는 실망했으나 곧 아들도 생길 것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앤이 수차례에 걸쳐 유산을 반복했고, 부부 사이의 말다툼이 잦아지자 왕의 마음도 앤에게서 멀어졌다. 대신 왕은 앤 불린의 시녀 제인 시무어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앤 불린의 정적 토머스 크롬웰은 제인 시무어를 지지하면서 왕비와 불린 가의 추락을 획책했다.
1536년 앤 불린과 남동생 로시포드 공작 조지 불린, 그리고 두 사람과 가까운 귀족 청년들 몇몇은 간통과 반역, 근친상간 혐의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심지어 앤 불린은 마법으로 왕을 유혹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했으나 앤 불린은 두 차례에 걸친 재판에서 모두 유죄 선고를 받았다. 본래 앤은 화형당하기로 판결되었으나 나중에 헨리 8세에 의하여 참수로 감형되었다. 참수형이 확정되자 앤은 자신의 시녀에게 내 목이 가늘어서 다행이다.”라고 씁쓸한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앤의 사형 집행은 그때 당시 참수에 흔히 쓰이던 도끼 대신 잘 드는 칼을 사용하기로 결정되었고 왕은 앤의 참수를 위해 프랑스에서 칼을 쓰는 노련한 사람을 특별히 고용했다.
동생 로시포드 공작이 처형당한 지 이틀 후인 519, 앤 불린은 런던 탑에서 참수되었다. 사형장에서 앤 불린은 구경꾼들에게 왕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충성을 다해 섬겨달라고 부탁하는 연설을 남겼다. 앤 불린의 마지막 말은 주님께 제 영혼을 맡깁니다.”였다. 앤 불린의 사형 집행은 단칼에 마무리되었다.
 
헨리 8세는 1534년 수장령(首長令)'영국 국교회의 유일한 지상 수장'은 왕임을 선포한다. 153411월에 통과된 수장령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은 군주임을 밝혔다. 동시에 영국 하원은 로마에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교서를 발표하면 가차없이 형벌에 처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왕의 동의 없이 교회가 어떤 규정도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 많은 성직자들은 국왕도 속인이라 보고 아무래도 속인이 교회 통치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헨리 8세는 교황이 상징했던 권력이 머물 곳은 단 한 군데라고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 국교회의 총수는 영국 국왕이라 선언했던 것이다. 필자가 처음 생각한 것은 앤 불린을 아들을 낳기 위한 헨리 8세가 사랑을 정말 많이 했거나 그녀를 씨받이로 생각하고 숙청했다고 생각했었다. 역사를 알고 보니 헨리 8세는 교황청과 결별하고 정교를 분리시켜 자신의 권한을 높이고 절대왕정국가를 만들기 위해 카톨릭 교를 끊어내기 위해 일부러 이혼을 신청하고 억지로 술수를 썼다고 본다.
1534년 앤은 상상 임신 혹은 유산을 하게 되었고, 헨리 8세는 그녀가 자신에게 아들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엔 불린은 여러번 유산을 반복해 결국 총애를 잃고 처형당했는데 그녀는 중세 교회로부터 탈출하려는 헨리 8세에게 이용당한 측면이 크다.
앤이 낳은 엘리자베스 1세가 실제 뒤바뀌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이렇게 출산을 한번이라도 한 사람은 결국 배나 가슴등에 튼살이 발생되는데 이런 팽창선조라는 튼살의 경우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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