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1일 화요일

메리 여왕의 상상 임신과 배 튼살치료

메리 여왕의 상상 임신과 배 튼살치료



메리 여왕의 상상 임신과 배 튼살치료
 
메리 1(Mary I of England)는 헨리 8세의 장녀로 그와 첫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다. 에드워드 6, 엘리자베스 1세의 이복 누이로, 이른바 블러디 메리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여왕이다.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가 병으로 죽어갈 때, 첫번째 왕위 계승권은 메리가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골수 가톨릭 신자인 메리가 왕이 된다는 건 국교가 다시 가톨릭으로 회복될 것이 분명했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고,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에드워드 6세의 측근인 노섬벌랜드 공작은 3번째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는 제인 그레이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메리를 제거하려 한다. 메리는 한 발 앞서 런던을 탈출해 지금까지의 불행한 인생을 이용해 여론의 동정을 앞세워 여왕으로 즉위하고 노섬벌랜드 공작과 성공회 신자인 신하들의 숙청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살생부의 첫머리를 장식한 것은 다름아닌 어머니 캐서린 왕비의 이혼에 앞장섰던 인물,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 였다.
예상대로 즉위한 그녀는 헨리 8세가 했던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을 부정하고 다시 한 번 가톨릭의 부흥을 이루고자 하여 이 과정에서 커다란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칵테일에도 있는 블러디 메리라는 별칭 역시 그 과정에서 일어난 탄압과 숙청 때문에 붙었다.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자녀들 중 요절하지 않은 유일한 자녀였다. 그래서 그녀도 어릴 때엔 헨리 8세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소송 과정에서 꿋꿋히 어머니 편을 들었던 까닭에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졌고, 계모인 앤 불린의 견제로 인해 청소년기에 사생아 취급을 당했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앤의 지시로 이복여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일하는 등 굴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 왕실의 왕자나 대공들과 혼담이 오갔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헨리 8세와의 사이가 벌어진 뒤에는 혼담마저도 뚝 끊겼다. 어쩌다 들어온 혼담도 헨리 8세가 정치적인 이유로 내치는 바람에 결국 혼기를 놓치게 됐다. 나중에 캐서린 왕비를 존경했던 헨리 8세의 3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와, 헨리 8세와 그 아이들 사이를 잘 중재한 6번째 왕비 캐서린 파 덕분에 부녀 관계는 조금 회복되었지만, 당시 기준으로 결혼하기엔 나이가 많은 30대 초반인지라 혼담이 잘 들어오질 않았다. 그래서 여왕이 될 때까지 미혼이었다.
사실 어릴 때 어머니가 이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모진 핍박을 받는 것을 보고 자란 터라 당사자에게도 결혼을 할 마음이 없었다. 헨리 8세 때 결혼 문제로 이래저래 곤욕을 겪은 신하들은 메리 여왕도 결혼 문제로 말썽을 일으킬까 걱정했지만 메리 여왕은 나 결혼할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신하들 앞에서 선언한지라 일단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안심했다고 한다. 여왕이 된 후에 들어온 혼담에서 사촌인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자신보다 11세나 연하인 스페인의 왕자 펠리페 2세의 초상화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래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펠리페 2세와 결혼하겠다며 결혼을 전격 발표했다. 이때 메리는 38, 펠리페 2세는 27세였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에서 가톨릭이 다시 세를 불리는 것을 경계하던 신하와 국민들은 여왕이 자타가 공인하는 가톨릭의 '수호자'이자 굴지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왕세자와 결혼하는 것을 격렬히 반대했으나, 어머니를 빼다 박은 고집은 누구도 말릴 수가 없어서 결국 결혼이 성사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토마스 와이어트라는 신하는 이에 반대하여 끝내 반란마저 일으킬 정도였으니 얼마나 난리가 났었는지는 두말할 것도 없을 터.
여기에는 아직 1등국이라고 할 수 없었던 영국이 여왕의 남편인 스페인의 왕에게 종속되는 것에 대해 신하들이 두려워했던 데 이유가 있다. 이는 엘리자베스때도 마찬가지로, 두 여왕의 결혼 이야기가 거론되고 후보로 외국 왕들이 거명될 때마다 신하들은 영국이 남편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결혼 계약에 삽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혼 후 메리는 온 열정을 다해 펠리페 2세를 사랑해 때때로 국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최대한 펠리페 2세의 생각을 따랐다.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영국이 참전한 것도 펠리페 2세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 결혼이 영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한 정략적인 결혼인데다 메리가 자신보다 한참 연상이고 못생겼기 때문인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영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메리를 찾아간 일이 드물었다.
펠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의 여왕인지라 조국을 떠날 수 없었던 메리는 스페인에 있는 남편에게 영국으로 좀 오라고 애걸복걸 편지를 썼지만 펠리페는 들은 척도 안하거나 온갖 핑계를 대며 멀리하기에 이른다. 가뭄에 콩 나듯이 오는 남편 마음을 얻으려고 온갖 마음고생을 하다가 결국 그녀는 상상임신까지 하고 말았다. '임신했으니 영국에 와 달라.'고 편지도 보냈지만 펠리페 2세는 코웃음만 쳤다는 야사도 있다.
워낙 심한 근시라 늘 눈을 찌푸렸기 때문에 얼굴에 주름이 많았고 자궁이 안 좋아서 늘 고생했다고 한다. 자궁 근종이 심해서 월경을 거르는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걸 임신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이 있다. 거의 불임인데도 자신의 어머니를 내친 앤 불린의 딸이자 자신의 이복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왕위를 주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자녀를 낳아 자신의 자녀로 하여금 왕위를 이어 받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임신하기엔 나이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과 심한 자궁 질환,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점 등 때문에 결국 그렇게 바라던 아이는 낳지 못했다.
http://bit.ly/1TP0h3O 출처 나무위키
 
상상 임신(想像妊娠, pseudocyesis)은 여자 스스로 임신이라고 믿음으로써 나타나는 의태(擬態) 임신을 말한다. 상상임신은 실제로 임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월경의 중단과 함께 자궁 확장, 월경 기간의 휴지, 입덧, 젖의 분비와 같은 임신의 징후가 나타나며 그 원인으로는 심리적 상태, 복부 종양 형성, 호르몬 이상이 있다.
상상임신을 하면 실제 출산이 없기 때문에 배나 가슴부위에 튼살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임신을 해서 출산기까지 산후 막달에 매우 급격히 체중이 증가한다면 튼살이 발생하니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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