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7일 수요일

애체 안경으로 자살한 정치가와 자살시도 흉터치료

애체 안경으로 자살한 정치가와 자살시도 흉터치료


조병구 [趙秉龜]의 본관 풍양(豊壤). 자 경보(敬寶). 시호 문숙(文肅). 신정왕후(神貞王后:翼宗)의 오빠. 1822(순조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가 되고, 182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1829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부사과(副司果) ·겸문학(兼文學) ·책저도감교관(册儲都監敎官)이 되고, 1832년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다음해 대사성에 올랐다. 1836(헌종 2) 이조참의 ·호조참판을 역임, 1840년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이 되고, 1842년 금위대장(禁衛大將) ·총융사(摠戎使) ·훈련대장(訓鍊大將)을 거쳐 이듬해 행호군(行護軍)이 되었다.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로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권력투쟁을 했다. 1844년 한성부판윤에 이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익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두산백과)
2016424일 오전 11시에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왕의 외삼촌이자 세도 정치의 중심 인물이었던 조병구와 조선 헌종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시력이 매우 나빴던 조병구는 승진 선물로 안경을 쓰게 됐다. 16세기 말 조선에 들어온 안경은 주로 나이 든 양반이나 왕족이 착용했기 때문에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자신보다 지위나 연령이 높은 사람에서는 안경을 쓰는 것이 엄격히 금지됐다. 특히 신하가 왕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대역죄로 여겨졌다.
조병구가 실수로 안경을 쓴 채 헌종과 대면했고, 헌종은 그런 조병구를 크게 꾸짖었다. 조병구가 대궐에 왔을 때 헌종은 조병구의 죄를 조목조목 따진 뒤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이후 조병구는 헌종과 마주칠 때 마다 머리를 조아렸다. 급기야 헌종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두문불출하게 됐다.
조병구는 여동생인 신정왕후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책을 읽다가 안경 쓴 모습을 헌종에게 또 다시 들키게 됐다. 결국 그는 끝내 극도의 불안감과 압박감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靉靆애체라고 불리는 안경 하나로 목숨을 잃게 된 조병구의 사연은 조선 말기 김택영의 역사서 '한사경'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어른과 술자리를 할때 술을 뒤돌아서 마시거나 담배를 피울때 맞담배를 안하고 피해 하는 것처럼 더 잘보기 위해 안경을 못 쓰고 피했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행위이다. 예를 들어 안경을 안써 사람을 잘 못알아보고 어르신에게 불경죄를 짓는 것보다 오히려 나은데 말이다.
아무튼 조병구란 분은 안경 하나때문에 자살을 한 것을 보면 일부러 헌종이 질책할 구실을 찾은듯하니 좀 안타깝기는 하다. 이미지한의원에서도 손목을 긋는 자해로 자살 시도한 주저흔이 발생하여 치료 받기 위해 내원한 경우가 있다. 이런 손목 동맥 절단의 성공률은 5%로 안되며 흉터는 남아 타인의 선입견을 부추긴다. 이런 자살, 자해 손목등 흉터는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침, , 한약 재생약침등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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