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2일 수요일

출산왕 마리아 테레지아와 배 튼살치료

출산왕 마리아 테레지아와 배 튼살치료


마리아 테레지아(독일어: Maria Theresia 마리아 테레지아, 헝가리어: Mária Terézia 마리어 테레지어, 체코어: Marie Teresie 마리어 테레시에, 1717513~ 17801129)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뵈멘, 만토바, 밀라노,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파르마등의 통치자였다. 결혼을 하면서 로렌 공작 부인이 되었으며, 후에 토스카나 대공비, 신성로마황후의 지위를 얻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1713년 국사조칙에 의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로 공표되었으며, 카를 6세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되었으며, 영토들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카를 6세 사후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에서는 그녀의 계승의 반발하였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되지만,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내주는 대신 각 국으로부터 그녀의 승인을 인정받는다. 그녀는 후에 슐레지엔을 찾으려고, 7년 전쟁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녀는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과 혼인하였는데,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자녀들중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를 비롯하여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파르마의 공비 마리아 아말리아 등이 있다.
그녀는 군사 행정 위원을 설치하여 군세 징수 등에 관한 외부의 개입을 배제시켰다. 1762년에는 군사 기구가 궁정의 군사청 아래로 통괄되어 궁정 군사청이 최고 결정 기관이 되었다. , 일반 징병제가 채용되었다. 이 징병제는 전국민의 무차별적인 병역을 의무화하고 있어(실제로는 신분 차별이 있지만), 농민 출신이라도 급료를 받을 수 있게 됨으로써, 병사들의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어 오스트리아의 군사력은 현격히 급증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계몽주의적인 관료의 기세가 드세져, 그녀의 개혁 정책도 점차 계몽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의복의 자유화(1766)나 예수회 탄압(1773) 등이 대표적이지만, 그녀 자신은 점차 보수화해 갔다. 1765년 서거한 남편 프란츠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아들 요제프 2세의 급진주의적 개혁 성향에 자주 대립하여 견제하였다.
1765년 남편 프란츠 1세가 서거하고 아들 요제프 2세가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녀는 아들 요제프의 후견인이자 제국 황제의 섭정의 지위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요제프 2세는 친정을 원했고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요제프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염려하여 프랑스에 지원하려는 그녀의 견해에 반대하기도 한다.
말년에는 그녀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걱정해 폭동의 염려와 찰스 1세의 최후, 영국의 명예혁명에 관련된 경고를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딸은 이를 거절하였다. 1780년 서거하였으며, 시신은 가장 사랑했던 남편 프란츠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의 묘소인 카푸치나 예배당에 매장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죽음 이후 합스부르크왕가의 오스트리아가 점차 해체되었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첫사랑인 프란츠 슈테판과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었던 연애 결혼에 성공하였으며(비록 남편이 이 결혼을 위해 자신의 영지 로트링겐 공국을 포기해야 했지만), 금실이 좋아 부부 생활은 매우 원만했다. 결혼하기 4일 전에 프란츠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둔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데, 미래의 남편에 대해 그녀가 얼만큼 정열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 여러가지 언어로 쓰여있어 그녀의 교양의 깊이도 엿볼 수 있다. 프란츠는 때때로 다른 여성과 염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정치가로서 탁월했던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눈치채고 있음에도 눈감아 주었다. 또 남편이 죽은 후 자신이 뒤따라 죽을 때까지 15년간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와의 사이에서 총 16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프로이센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막시밀리안 1세 이후 200년간의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화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이유로 자녀들의 대부분을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의 부르봉 가 일족과 정략 결혼을 맺게 하였지만, 이는 나중에 독일 제후로서 합스부르크 가의 몰락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세기 이후의 독일 정세를 보았을 때, 이러한 결혼 정책은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이들의 교육과 계몽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이상적인 어머니 상의 이미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들 각자에 대한 편애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가장 사랑했으며 그녀에게만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 알베르트와의 연애 결혼을 1766년에 승낙해 주었다. 이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은 후, 이 부부는 요제프 2세로부터 푸대접을 받게 된다. 또 몸이 불편하여 정략 결혼에 사용할 수 없었던 마리아 안나에게는 차갑게 대하는 등 이상적인 어머니상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녀는 죽기 직전 프랑스 왕비가 된 11녀 마리 앙투아네트를 항상 염려하였다. 그녀가 매춘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매춘, 매음굴을 단속했던 것은 알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매춘부 출신 후궁 뒤바리 부인을 심히 경멸하였고, 이를 염려하여 카우니츠 백작과 메르시 백작 등을 통해 그들의 훈령, 건의 형식으로 앙투아네트에게 조언하였다.
그녀는 활발하여 유달리 노는 것을 좋아하는 딸에게 봉기(프랑스 혁명)의 발생을 경고하는 편지와 찰스 1세의 처형을 경고하는 편지를 여러 번 보내기도 하였다.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를 통해 여러 번 훈령을 보내기도 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를 무시하였다. , 츠바이브뤼켄 공자 카를과의 연애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고 파르마 공 페르디난도의 아내가 된 6녀 마리아 아말리아는 시집간 후 방약무인한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의 오스트리아 및 신성로마제국 입국을 금지하였다.
 
그녀가 생전에 사용했던 칭호는 Königin(여왕)Kaiserin(황후)의 머릿글자를 딴 ‘K.K’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 1세와의 사이에서, 511(16)의 자녀를 두었다.
마리아 엘리자베트 (1737-1740)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안나 (1738-1789) - 수녀가 됨
마리아 카롤리나 (1739-1741)
요제프 2(1741-1790)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테셴 여공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 (1742-1798) - 테셴 여공작(테셴 공작 알베르트와 혼인)
마리아 엘리자베트 (1743-1808) - 인스부르크 수녀원장
카를 요제프 (1745-1761)
파르마 공작 부인 마리아 아말리아 (1746-1804) - 파르마 공작 부인(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 1세와 혼인)
레오폴트 2(1747-1792)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마리아 카롤리나 (1748)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레 (1750-1762)
마리아 요제파 (1751-1767) - 나폴리 왕과의 결혼 직전에 사망
나폴리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1752-1815) -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왕비(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4세와 혼인)
브라이스가우 공작 페르디난트 (1754-1806) - 모데나 공작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1755-1793) - 프랑스 왕비(프랑스 왕 루이 16세와 혼인)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앙 프란츠 (1756-1801) - 쾰른 선제후 겸 대주교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의 장모라고 불릴 정도로 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결혼시켰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업적도 많은데 출산을 그렇게 많이 했다는 사실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도 배나 가슴등에 생긴 튼살은 어찌하지 못했을테니 이미지한의원에서 튼살침인 ST침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팽창선조라고 불리는 튼살이 남은 채로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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