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7일 화요일

동양 중국과 일본의 문신 역사와 문신흉터치료

동양 중국과 일본의 문신 역사와 문신흉터치료

먼저 문신에 관한 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일본으로 가 보자. 일본의 문신은 근대 이후 한국의 문신과도 무관치 않기 때문에 우리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데 일본에서 발견된 최초의 문신 흔적은 기원전 5000년쯤 된 무덤에서 발견된 진흙 소상에 남아 있다. 이른바 조몽시대의 이 소상들은 얼굴에 선이나 점선 형태의 문신 흔적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문신에 관한 좀더 분명한 증거는 고고학적 자료가 아닌 중국 역사서 등의 문헌 자료 속에 있다. 3세기에 기록된 『삼국지(三國志)』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곳에서는 남자는 어른이나 아이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넣고 또 몸뚱이에도 바늘로 먹물을 넣어서 글자나 그림을 만든다……지금 왜인이 물 속에 들어가 물고기와 전복·조개를 잘 잡고 몸뚱이에 그림을 넣는 것 역시 큰 물고기나 물새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뒤에 와서는 차츰 장식으로 이 방법을 쓰게 되었다. 나라마다 문신하는 기법은 다 달랐다. 좌편에 그림을 넣기도 하고 혹은 우편에 글씨를 넣기도 한다. 그 크고 작은 것도 다 각각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문신의 위치·대소를 가지고 사람의 높고 낮은 것을 구별한다.(『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왜인(倭人))
여기서 중국 진(晋)나라의 역사가 진수(陳壽)가 동이족의 일부로 다루고 있는 '왜인'은 단지 오늘날의 일본인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일본 열도에서 류큐 열도를 거쳐 타이완까지 이어지는 섬들에 거주하는 좀 덩치가 작은 사람들에 대한 총칭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 따르면 지역마다 기법은 다르지만 문신은 이 지역 왜인들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남녀노소 모두 얼굴과 신체의 각 부분에 글자나 그림의 형태로 문신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3세기의 기록이니 왜인에 속하는 일본인의 문신 습속은 꽤나 오래된 것인 셈이다. 고고학적 자료를 염두에 둔다면 기원전 5000년 전의 석기시대로 소급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가네이 요시키오와 쓰보이 쇼우고로우가 1888년에 홋카이도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지역의 아이누인들은 팔이나 손등, 입 주위 등에 문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대개 어릴 때부터 문신을 시작했는데, 문신을 하지 않으면 죽은 후 조상들이 자신들을 인도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조사자들은 보고하고 있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문신이 근대 이전까지 아이누 사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중국 대륙 쪽으로 들어가 보자. 『묵자(墨子)』, 「공맹(公孟)」 편을 보면 "옛날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하고 그 나라를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고, 『한서(漢書)』 「엄조전(嚴助傳)」에는 "월(越)은 방외의 땅으로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한 사람들이 산다"는 언급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월은 중국 장강 이남 지역의 통칭이다.
이 지역은 한족들이 남쪽 오랑캐, 곧 남만(南蠻)이라고 부르는 소수민족들이 사는 곳인데 『묵자』나 『한서』는 이들의 민속에 문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사실 이 지역의 먀오족·리족·따이족·두롱족 등 많은 소수민족들은 근래까지도 문신의 습속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 소수민족 마을에 가보면 얼굴이나 팔다리에 문신을 한 노인들을 드물게나마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크게 보면 같은 월(越)에 속하는 베트남에도 문신의 흔적이 있다. 베트남의 옛 신화와 전설을 담고 있는 『영남척괴열전(嶺南摭怪列傳)』의 「홍방씨전(鴻庬氏傳)」을 보면 베트남의 문신 풍속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숲과 산록의 백성들이 강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종종 교룡(蛟龍)에게 해를 입었다. 그래서 왕께 아뢰었더니 왕이 말하기를 "산만(山蠻) 종족은 수족(水族)과 다르다. 교룡이 자기 부류는 좋아하고 다른 부류는 싫어하여 너희들을 침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백성들의 몸에 먹으로 용군(龍君)의 모습과 수중 괴물의 형상을 새기게 했는데 이후로는 백성들이 교룡에게 물리지 않았다. 백월(百越)의 문신 풍속은 실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베트남 문신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화적 이야기여서 이른바 사료로서의 신빙성은 의심스럽지만 그 속에는 문신에 관한 어떤 진실이 숨어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베트남의 문신이 실제로 교룡의 피해를 막기 위한 신화적 왕의 명령에 의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베트남에 문신이 있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보아도 좋다는 뜻이다. 베트남의 홍 강 텔타 지역에 거주하는 락민(貉民)들이 문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이제 이 오래된 문신 흔적을 더듬는 세계여행을 끝내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다. 우리에게는 과연 문신 습속이 없었는가? 그런 게 정말 있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고 없었으면 하고 바랄 수도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왜인을 다룬 문헌과 같은 역사 문헌에 우리의 고대 부족의 문신에 대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아래 소개한 것이 한국 고대 문신에 관한 중요한 기록들이다.
1) 남자들은 때때로 몸뚱이에 바늘로 먹물을 넣어 글씨나 그림을 그린다. 이것을 문신이라고 한다.(『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한(韓))
2) 또 남자나 여자가 모두 왜와 같이 바늘로 몸뚱이에 먹물을 넣어 글씨나 그림을 그린다.(『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변한(弁韓))
3) 그 남쪽 국경은 왜와 가까운 까닭에 왜의 풍속을 닮아 역시 몸뚱이에 바늘로 먹물을 넣어 그림을 그리는 자가 있다.(『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중국 역사서들의 기록이 전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변한 또는 한(삼한)에 문신의 습속이 있었는데 남녀가 모두 문신을 했고 몸에 그림이나 글씨를 넣는 방식의 문신이 여느 민족의 문신과 다를 바 없다는 것, 그리고 왜의 풍속과 유사하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 단편적 자료들이 말하는 바는 우리에게 문신의 습속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기록들을 특별히 부인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는 한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삼한시대 한반도 북부지역의 문신 민속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고조선이나 동예 혹은 옥저와 같은 나라에는 문신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에 삼국시대의 문신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삼한 이후에는 문신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정도이다.
지금까지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의 자료들이나 역사서의 기록들을 통해 말을 달리며 산을 보듯이 세계문화사에 나타난 문신의 흔적들을 찾아보았다. 이 탐색여행은 적어도 우리에게 이런 결론을 선물한다. 문신은 인류 문화의 보편적인 현상이며 각 지역, 각 민족의 문화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일 수 있다는 결론이다. 물론 문신을 하는 이유나 문신의 형식에는 문화적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문신에 대한 인류의 욕망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일찍이 『문신의 역사와 그 의미』(1925)에서 윌프리드 험블리 박사가 주장한, 문신은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전파되었다는 가설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문신은 민족 사이의 접촉과 혼합을 통해 전파되고 융합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런 사례들도 있지만 그 기원을 이집트로 못박는 것은 이미 낡은 주장이고 명백한 오류다.
문신이 인류의 보편적 욕망에 속하는 문제라면 다음 질문은 인간의 어떤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문신이 시행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원인에 대한 물음은 문신의 사회적 기능의 문제와 둘이 아니다. 문신은 한 사회 속에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능이야말로 한 사회 내에서 개인을 집단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의 신입자에게 문신은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신의 역사, 조현설, 살림, 15-22

동양사회에서 일본인은 전에는 문신을 한 사람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야쿠자도 문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경우 문신을 한 종족은 오랑캐 사상이 있고, 효경의 신체발부를 손상시키지 말라는 내용처럼 한국에서도 문신을 천시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과는 달리 동양은 기본적으로 문명화될수록 문신을 터부시했는데 지금 서양 문화의 문신에 대한 관대함이 들어왔다고 해도 실제적으로는 문신을 한 사람을 꺼릴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승무원이나 서비스직 종사자가 문신이 있다면 채용을 하는 기업은 없을 것이다. 또 며느리나 사위가 몸에 문신을 했다면 다시 생각해볼정도로 관대하지 않다.
이런 문신을 나이들어 지우려고 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흉터가 남는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이런 문신흉터를 흉터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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