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4일 수요일

폴 포트와 굳은살 화상흉터치료

폴 포트와 굳은살 화상흉터치료



폴 포트(Pol Pot, 크메르어: ប៉ុល ពត, 1925519~ 1998415)는 캄보디아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군인, 정치인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이다. 본명은 살롯 사(Saloth Sar, 크메르어: សាឡុត ស)이다.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이자 1976년에서 1979년까지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의 총리였다. 흔히 폴 포트(Pol Pot)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름이 아니라 영어의 Political Potential이나 프랑스어 Politique Potentielle를 줄인 말이다.
 
프랑스의 식민지 기간 중 독립운동가로서 민족해방운동에 동참하였고 호치민이 지도하는 반프랑스 운동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 공산당에 가담하였고 미국과 왕정에 대항하였으며 론 놀 정권을 타도하고 집권에 성공한다. 베트남 공산당으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베트남전에도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편들었으나 가혹한 학살에 거부감을 느낀 베트남은 그 사람과 결별하고 반체제 인사를 지원한다.
미국, 베트남과 계속한 전쟁으로 캄보디아의 경제를 황폐화시켰다. 집권 기간 중 지주, 자본주의자, 반대파 200만 명을 숙청하였고 기타 그 사람의 강제 이주책과 노동책, 흉년, 기근을 위시한 질병으로 국민 다수가 아사했다. 그 사람은 재임 기간 원리주의성 공산주의에 따라 집단농업화 정책을 강제로 시행하여 많은 국민을 심문과 고문으로 죽게 한 소위 킬링필드로 유명하다.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정권을 잃고 북측 국경 밀림 지대로 달아나 게릴라전을 전개하다 체포 1998년 가택 연금 상태에서 죽었다.
1973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남베트남해방민족전선은 캄보디아를 떠났지만, 크메르 루주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노로돔 시아누크 행정부와 론 놀의 친미 군사 행정부에 대한 정적으로서 폴 포트는 크메르 루주 게릴라 부대를 이끌었다. 미국의 지원이 없어지자 국토 관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론 놀의 친미 정권은 즉시 붕괴했고 1975417일에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 내전에서 승리하고 프놈펜을 점령했다. 그때 도시민은 크메르 루주 게릴라 부대가 승복을 군복으로 입고 있었으므로 까마귀가 왔다면서 공포에 떨었다. 크메르 루주는 전권을 장악하고 국명을 민주캄푸치아라고 개명하였고 론 놀은 미국에 망명했지만, 늦게 도망친 론 놀 일파인 론 보레트를 위시한 각료는 수도 함락 직후에 적군소탕위원회에 신병이 인도되어 전원 처형되었다. 크메르 루주는 그 밖에도 정치가, 고관, 경찰관, 군인을 위시해 700명 남짓을 처형했다. 폴 포트는 시아누크와 매국노로 이름을 올린 소수의 인물만을 처형한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후 정권을 장악하기 전의 공직자나, 군에 종사한 사람은 가족까지 처형하는 때도 있었고 그 주변 인사들도 처형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1970년대 초 캄보디아 전역에 광범위하게 대규모로 미군이 무차별로 폭격하여 남녀노소 막론하고 수십만 명이 끔찍하게 죽었고 무능력했던 론 놀 친미 행정부의 부패 행위에 염증을 느꼈던 국민 대부분이 론 놀 친미 행정부를 멀리하게 되었으며 이는 폴 포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75512일에 캄보디아 영해에서 크메르 루주군이 미국 상선 마야그에이스호를 나포하는 마야그에이스호사건이 발생하였다.
노로돔 시아누크는 1975년에 복권되었지만, 즉시 자신의 급진성 공산주의 동료와 결별하였다. 군주제 회복을 요구하는 시아누크가 한 계획에 흥미를 두지 않았고 크메르 루주 강경파는 시아누크가 한 계획을 불허하고 197642일 그 사람을 자택에 감금하였다. 기존 행정부는 붕괴하고 국가원수로서, 왕자인 시아누크는 그 지위를 잃고 큐 삼판이 초대 대통령 겸 국가 간부회 의장이 되었다.
1975년 크메르 루주군은 프놈펜을 점령한 후 주민을 즉시 피난시켰다. 1976513, 폴 포트는 민주 캄푸치아의 수상에 정식으로 취임하였고 지방에서 대규모 숙청을 시작해 철저한 국가 개조를 실시하였다. 폴 포트는 모택동주의에 기초해 빈부 격차가 없는 공산주의사회를 목표했고 자본주의 요소를 모두 부정했다.
이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행정부가 무너진 19791월까지 크메르 루주 행정부의 총리로서 열심히 일했다. 폴 포트가 지도하는 크메르 루주 행정부로는 1975에서 1979년까지 강제 노역, 기아, 질병, 고문, 처형으로 말미암아 국민 약 200만 명[출처 필요]을 희생시켰다고 추산되는 일변, 대규모 관개공사와 국토 건설을 목표해 폴 포트는 타 도시민들은 농촌으로 보내거나 농업 생산성을 제고하려는 광대한 규모의 관개공사와 다른 공공 토목공사에 배치하였다. 당시는 전국에 걸쳐 슬픈 생활과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다.
19세기 말 인구 도시 유입이 시작되었고 내전 중 미군이 농촌을 대구모로 무차별 폭격한 탓에 농촌 인구는 난민으로서 도시 유입이 가속화했다. 1976년 직전에 프놈펜의 인구는 100만 이상까지 증가했다. 크메르 루주는 권력을 획득한 후, 미군의 공중 폭격이 있으므로 2일에서 3일만 수도에서 퇴거하게끔 도시 거주자에게 명령하여 지방에 있는 집단농장에 이주시켰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거하면, 환자, 고령자, 임산부를 위시한 노약자도 배려하지 않았고 농장 내에는 링겔을 당기면서 걷는 환자, 노상에서 혼자서 출산하는 임산부를 비롯해 지옥 같았다고 증언하였다. 다른 증언에 의거하면, 가족이 행방불명이 되어, 그 가족이 돌아올 때까지 집에 있게 했으면 좋겠다라고 호소한 거주자는, 그렇게 집에 있고 싶다면 죽을 때까지 있으라면서 문에 쇠사슬을 묶어서 음식은커녕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해 죽을 때까지 방치되었다고 한다.
교육받은 중산계급과 행정부의 적으로 간주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크메르 루주군의 조직스러운 소탕작은 1979년까지 캄보디아 국민 최소한 10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1977년 캄푸치아 공산당은 국가 통치기구로 공식 승인되었다.
잔혹한 학살과 게릴라전을 거부한 베트남을 위시한 인근국들은 캄보디아 내전에서 승리하여 세운 신캄보디아 공산행정부를 지원했다. 폴 포트는 베트남이 지원하는 신캄보디아 행정부에 대항해서 싸우고자 크메르 루주군을 이끌고 캄보디아 남서부 산악 지대로 철수했는데 신캄보디아 행정부는 폴 포트가 공산당의 지도자로 있는 한 크메르 루주군과 평화협상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폴 포트 정권은 "썩은 사과는 상자 째로 버려야 한다!"라고 주창하고 정치상 반대자를 탄압했다. 통화는 폐지되어 사재는 몰수되었고 교육은 공립학교에서 종료했다. 더욱 국민은 구인민과 신인민으로 구분되어 장기 크메르 루주의 구성원이었던 구인민은 공동체에서 배급받아 스스로 식재료를 재배할 수 있었지만, 프놈펜 함락 후에 도시에서 강제 이주된 신인민은 끊임없이 반혁명 혐의를 두고 숙청할 대상으로 간주됐다. 프놈펜은 기아, 질병, 농촌 강제 이주에 의거해서 유령 도시로 변모했고 의사나 교사도 발견되면 '재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불려가 처형되었다. "안경을 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 사례도 있었다. 이 결과 지식층은 궤멸되었고 캄보디아의 사회 기반은 소생이 불능하게 타격받았다.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폴 포트는 희생은 불가피하며 그들의 소멸 없이는 자신의 이상이 구현될 수 없다고 봤다. 결과는 캄보디아 전역에 걸친 대학살을 벌였다. 맨 먼저 죽인 직군은 교사 직군이었다. 교사들을 싹쓸이했고 그 다음으로는 손바닥 굳은 살 없는 이들을 죽였다. 이번에는 한편으로 볼펜 팬대 잡는 가운데 손가락에 굳은살 배긴 이들을 죽였다. 한 세대의 지식인 집단이 사라졌다. 영어로 헤이!” 불러서 돌아보면 영어를 안다고 죽였다.
음모의 지배계급 300인 위원회란 책을 보면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의 대량학살은 지구의 미래를 연구하는 비영리 국제단체로 알려진 로마클럽이 '밥만 축내는 사람들' 을 없애기 위한 계획이었다. 민주캄푸치아 집권에 발생했던 기아와 질병 사망자는 미국과 유엔이 국제단체들의 구호사업을 봉쇄해버린데서 비롯된 일로 학살 1기에서 미국이 융단폭격으로 죽인 양민수를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약 60만명으로, 다른 연구자들은 40만명에서 80만명 정도로 추산했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없다고 죽인 것은 참으로 이해불가이다. 폴 포트가 지식인이여서만 죽어야 한다고 하니 말이 되지 않고 처벌받지 않고 자연사하니 그 배후의 음모를 캐내야 한다. 손바닥에 화상을 입어서 피부가 단단해지는 것은 어떨까? 그런데 굳은살은 각질층이 증식한 것이고 또 화상흉터는 진피 콜라겐 배열이 달라지기 때문에 둘은 다르다. 하지만 느낌은 비슷하며 피부의 단단한 느낌이 없는 경우 이미지한의원의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가 훨씬 더 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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