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의 문란(三政-紊亂)이란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 제도)이 문란해졌음을
말한다.
전정의 문란은
임진왜란의 참화로 말미암아 더욱 심해졌다.
전란으로 많은
땅이 황폐해진 데다가 궁방전·둔전 등 면세지와
양반·토호가 조작한
은결(隱結
:
대장에 오르지
않은 땅)의 증가는 국고 수입을
격감시켜,
결과적으로는
무력한 농민의 부담만 과중하게 만들었다.
농민은 땅
1결(結)에 전세 4말을 내고,
그에 더하여
삼수미 2말 2되,
대동미
12말,
결작(結作)
2말을 내야
되었는데,
그 위에 또
여러 가지 명목의 부가세와 수수료를 바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관리들은 황폐해서 못 쓰는 땅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심지어는 백지징세라 하여 공지(空地)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도
있었다.
도결(都結)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지방의 서리가
공금이나 군포를 사사로이 사용하고서 이를 미봉하기 위하여 결세(結稅)를 정액 이상으로 마구
징수하거나,
정해진 액수보다
많이 징수하던 것을 말한다.
백지징세(白地徵稅)는 조선 중기 이후 관리의 농민 착취
현상이 빚어낸 위법 징세의 일종이다.
실제로는 전혀
토지가 없는데 가전적(假田籍
:
가짜
장부)을 만들어 징세하거나
세(稅)를 부과할 수 없는 황폐한
진전(陳田)에 대해서 납세하는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다음으로 군정은 장정이 직접 병역을
치르는 대신 군포를 내던 것을 말하는데,
영조가 이를
반감하여 장정 1명에 포(布)
1필로 정하고
어염세·선박세·은결의 결전(結錢)
등으로 부족액을
보충하기로 하는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원래
양반·아전·관노는 병역이 면제된 데다가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도 세력가에게 매달려 군역을 기피하는 반면에 무력한 농민을 대상으로 황구첨정·백골징포 등의 협잡이 성행하여 전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받았다.
황구첨정(黃口簽丁)은 조선 후기
군정(軍政)의 폐단 가운데
하나이다.
철종 때에
이르러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자 이는 곧 사회경제적인 심각한 위기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전지(田地)에 대한 과다한 세금 부과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던 농민으로서는 또다시 군포의 부담까지 져야 했으므로 그들은 유망(流亡)
또는 도망으로
자구책을 찾게 되었으며,
세포(稅布)의 징수에 대한 책임을 진 지방관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부족액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아에 대해서까지 세포 징수의 대상자로 간주하였다.
이를
황구첨정이라 하며,
이와 같이
진행된 군정의 이면에는 극도의 부패상이 도사리고 있었다.
백골징포(白骨徵布)는 조선 후기 수취체제 문란이 가열됨에
따라 야기된 군정상의 폐단이다.
철종 때에
이르러 국가의 재정적 기반이었던 삼정이 정치 기강의 문란과 서로 인(因)과 과(果)가 되어 극도로 문란해져서 농민들은
이중 삼중의 과중한 부담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유망민(流亡民)
또는 도망민으로
변하였고,
한 지방의
군적(軍籍)은 하나의 허부(虛簿)와 다름이 없어서 관청의 호적 기록상
정남(丁男)의 수는 실제보다 훨씬
많아졌다.
호구(戶口)의 증가와 정남 수의 확보로 국가
재정을 담당해야 했던 지방의 수령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한 방법의
하나로 심지어는 사망자에 대해서까지 세포(稅布)
징수를 하는
악랄한 수법을 부렸는데 이것을 백골징포라 한다.
족징(族徵)은 조선 후기 군정의 폐단으로 인한
독소조항의 하나이다.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으로 인하여 호적이 사실상의
허부(虛簿)나 마찬가지가 되고 과세 대상의 출입이
무상하였음에도 지방 수령들은 이러한 토지대장과 호적에 준하여 과세의 강제징수에 온갖 수단을 다 부렸다.
또한 국법에
사족(士族)·이서(吏胥)·공노(公奴)에게는 군역(軍役)을 면하기 때문에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지게 되고 이것을 면하기 위해 권세가는 관아에 청탁하는 자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도망자·사망자·행방불명자의 체납분을 친족에 강제
징수하기도 했다.
이로써 농촌은
더욱 황폐해졌다.
인징(隣徵)은 조선 후기에 군포를 징수할 때
부정한 수단의 하나이다.
군포 부담자가
관리와 결탁하여 면제를 받으면 결국 약한 농민에게로 부담이 전가되었으며,
이러한 부담을
짊어진 농민은 이중의 질곡 속에서 결국 토지나 주거를 버리고 달아나게 되었다.
이러한 도망자와
사망자 및 유망자의 체납분을 이웃 사람에게 대납토록 하여,
지방의 수령이나
관리들은 그들의 의무를 벗고 또 수탈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환곡은 본래
가난한 농민에게 정부의 미곡을 꾸어 주었다가 추수기에 이식(利息)을 붙여 회수하는
것으로,
빈민의 구제가
목적이었던 것이 후기에는 고리대인 “장리”로 변하여 그 폐단이 삼정 가운데서
가장 심하였다.
번작(한자:
反作)은 조선 후기의 환곡 출납 관계에 대한
허위 보고서이다.
환곡은 원래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실시된 대여곡 제도였으나 철종 때 세정(稅政)이 극도로 문란하게 되어 환곡은
고리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겨울철 회수기와
봄의 반배기(頒配期)에 각 지방의 수령은
이서(吏胥)들과 결탁하여,
대여곡을 회수
또는 반배한 것처럼 허위 문서를 작성하고 그 양곡에 대하여 쌀 1섬마다 동전 1냥씩 징수하여 착복한
것이다.
환곡은 처음에 곤궁한 농민을 구제하려고
시행된 무이식 제도였으나,
그 뒤
상평창에서 담당하면서,
원곡에
모곡이라는 이자를 받게 되었다.
환곡을 되받을
때 붙이는 모곡은,
처음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에 2할(20%,
연리
40%)였고,
조선 후기에는
6개월에 1할(연리 20%)였다.
이러한 모곡은
원곡의 소모분을 감안하여 책정되었고,
오늘날에 비해
다소 고리였으나 가혹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관리가
부패함에 따라 가난한 농민은 춘궁기에 환곡을 얻기가 어려워졌고,
그에 따라
환곡의 이자가 높아져 갔다.
결국 봄에 꾸어
가을에 갚되 빌린 곡식의 절반 이상을 이자로 물게 되었다.
이와 같이
6개월 이율이 5할(50%)를 넘기는 때에 장리라
불렀으며,
주로 쌀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장리쌀이라는 말도 쓰였다.
허류(虛留)는 조선 말 환곡의 폐단 가운데
하나이다.
전임(前任)
관리나 지방의
아전이 결탁하여 창고에 있는 양곡을 횡령·착복하고 장부상으로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기재하여 후임 관리에게 인계하는 것을 말한다.
국법에는 이러한
경우 엄격한 처벌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허위 문서의 작성자와 인수자가 서로 공모하여 은폐시켜서 환곡의 폐단은 국가 재정의 궁핍화를
가속화시켰다.
지방관들은 그들대로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또 봉급을 받지
못한 아전들은 그들대로 자연히 농민들을 착취하고,
나아가서는
공금(公金)이나 관곡(官穀)
등을 횡령하는
등,
온갖 협잡을
하였다.
중앙에서는
암행어사를 수시로 보내서 지방관들의 부정행위를 조사·보고하도록 하였으나 고질화된 악습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암행어사는
실질적으로 실패하였다.
그리고 삼정의
문란은 철종 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홍경래의 난,
진주 농민
봉기)
여기서 백지징세의 백지는 빈땅을
백골징포의 백골은 해골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다른
뜻에 흰 白백자가 들어간 사실이 재미가
있다.
사실 백성은
세금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그런데 백색이
들어간 내용을 구실로 세금을 매기니 백색은 무섭기는 하다.
우리 몸에서도
튼살이 발생하면 미용적인 것이라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치마나 짧은 반바지를 못입는등 타격이 매우 크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ST침 튼살침으로 백색 뿐만 아니라 붉은색
튼살도 치료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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