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
9월 7일)은 조선시대 초기의 왕세자이자
왕족,
정치인,
화가,
시인으로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시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던 중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의 재질이 뛰어나나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고 대화하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원경왕후 역시
태종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이 뒤로
양녕대군은 일부러 미친 척 가장하였다.
부왕과 모후의
뜻이 양녕대군에게서 떠나있다는 것을 간파한 효령대군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대군을 찾아갔다.
그는 효령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
고
말했다.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크게
낙심한 효령대군은 매일 북을 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하였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42에는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가 있는데 지덕(至德)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할 때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孔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부묘소,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부묘소라 하였다.
필자가 보기에는 양녕대군이 세자자리에서
폐위된 것은 본심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강요되었다고 본다.
첫째 1453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까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다.
세조가 단종을
죽이는데 주저하자 "내 너같은 놈을 조카로 두고
있다니!"
하며 격분했다는
야사의 기록도 있다.
앙녕대군은
1394년 ~
1462년
9월 7일까지 장수한것도 자신 왕좌를 빼앗기고
얼마나 세종 후손이 잘사는지 보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15대손이었다.
1898년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던 중,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승만은
독립정신이란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이승만이 실제로
원한 제도는 대통령제였지만,
집필 당시
사형수였다는 신분상의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즉 이승만은
고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필자 생각에는 조상 대대로 양녕대군인 자신의 조상이 왕이 되었어야 하는데 충녕인 세종에게 도둑맞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
대해 반항적이고 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방 직후 조선 영친왕 이은의
귀국의지는 확고했는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의 대화 이후 그의 귀국의지는 많이 사그라들었다.
이승만은 자기도
조선 무슨 대군의 몇 대손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이은에게 냉담하게 대했다.
영친왕은 어렸을
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비운의 황태자로 전국민적인 동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은의
지원을 받으면 어느 단체든 굉장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귀국은 정치적 역학관계와도 관련돼있었다.
이승만은 이은의
정치적 입지가 자신보다 확대될 것을 우려해 이은의 귀국을 대놓고 꺼려했다.
이후 이은과
이승만은 이은의 일본 저택매각 문제로 또다시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영친왕 측은
광복 직후와 1948년에 조선으로 가겠다는 요청을 했지만
전자 땐 미군정이,
후자 땐 이승만
전 대통령이 결사적으로 반대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즉 이승만은 양녕대군 조상대대로
세종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억울한 생각이 뼈속 깊이 들어차서 고종황제때는 고종퇴위운동을 하고 자신이 대통령일때는 조선의 왕족들을 박대하며
멸시했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이란 이름도 특이하다
讓(사양할 양;
⾔-총24획;
ràng)+
寧(편안할 녕{영};
⼧-총14획;
níng,nìng)이란 글자이니
왕위[세자]
지위를 양보하면
편안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세자 시절에는 양녕대군으로 불리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대군(大君)은 '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적자들에게 내려지는 작위이므로.
양녕대군은
폐세자되면서 봉해진 존호(尊號)이다.
세자(世子)에게 관교(官敎)를 내려 주고,
심씨(沈氏)를 봉(封)하여 경빈(敬嬪)으로 삼고,
제(禔,
양녕대군의
본명)를 강봉(降封)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삼고...(후략)",
태종대왕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5일 기사
즉 양녕대군의 여러 가지 비행과
기행들도 자신이 왕이 되지 못할 것을 짐작한 뒤에 엇나가기 시작함을 알수 있다.
물러날 사람이 물러나지 않고 장기집권을
하면 문제가 있듯이 피부에서도 흉터가 그런 경우이다.
즉 상처가
생기면 물러나는 것이 좋은데 계속 흉터로 남아 피부를 보호하겠다고 하면 모습만 흉측해질뿐이다.
차라리 본심을
감추고 흉터는 빨리 몰래 사라져 주는 것이 양녕대군처럼 명철보신하는 행위이다.
참고로 상처로 없어지지 않는 흉터가
발생하면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침,
한약재생약침,
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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