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로스차일드 붉은 방패와 붉은 튼살치료

로스차일드 붉은 방패와 붉은 튼살치료


로스차일드가(영어: Rothschild family)은 독일-유대계(German Jews) 혈통의 국제적 금융 재정 가문이다. 오스트리아와 영국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지역에서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가 태어난다. 마이어의 아버지 암셀 모세 바우어는 골동품상과 대금업자였다. 가문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은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때부터였다. 마이어의 아들들은 다음과 같다.
암셸 마이어 폰 로트실트 (17731855): 프랑크푸르트
살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 (17741855):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17771836): 런던
카를 마이어 폰 로트실트 (17881855): 나폴리
자크 마이어 드 로쉴드 (17921868): 파리
로트실트 가문은 워털루 전투로 상당한 부를 쌓으며 발전을 했다. 로트실트 가문에서는 전쟁이 발발할때 산업 스파이를 보내어 프랑크푸르트-파리-런던--나폴리로 이어지는 정보망을 구축했다. 그들은 정부의 정보 즉 워털루 전투가 영국군이 이겼다는 정보보다 1일이나 앞선 날에 사람들을 향해 영국군이 졌다하며 소리쳐 거짓 정보를 알려주었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덜 손해보기 위해 영국 국채를 팔기 시작해 영국 국채가 이전의 5%밖에 안되는 상황 이였을때, 로트실트 가문은 그 즉시 모든 국채를 사들였고 그 다음날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이 패배 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로트실트 가문은 20배나 되는 이득을 챙겼다.(또한 살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는 남북전쟁때 군수물자를 지원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이야기는 소문일수도 있으며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루머라는 주장이 오히려 로스차일드 가문이 퍼뜨린 루머라는 주장이 있다.
-이 이야기에 관한 보다 디테일한 정보는 '쑹훙빙' 저작인 화폐전쟁 1편에 소개되어 있으나 그 또한 오리지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에 대한 근거로 일본의 반핵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의 1986년 저작물인 [1권력(원제; 億万長者はハリウッドを)]에 이은 국제금융사슬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자본가들에 관한 [붉은 방패 - 로스차일드의 수수께끼(- ロスチャイルドの)]가 이미 출간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음모론 서적들이 흔히 그런것과는 달리 비교적 억측이 덜한(이 의견은 칼 폴라니의 저서인 '거대한전환' 번역판 주석에도 언급되어 있음) 저자의 저작물들이 이미 오래전에 소개되어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 관한 서방권 전문가로는 경제학자 니얼 퍼거슨(Niall Campbell Douglas Ferguson)이 있으며 그의 최근작인 '시빌라이제이션'을 비롯한 많은 저작물들이 국내에 번역출간되어 있으나 로스차일드 가문에 관한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세권의 책은 아직 번역출간되어 있지 않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연구했던 하버드의 교수 니얼 퍼거슨 같은 저명한 학자들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원래 로스차일드는 나폴래옹의 대륙 봉쇄령이 내려진 사이 영국의 금을 프랑스로 밀수출하는 일을 해서 이득을 취했고,(프랑스로써도 영국의 금이 빠져나가면 이득이라 생각해서 막지 않은 모양) 나폴레옹 전쟁이 터진 이후로는 패밀리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금을 영국군의 군자금으로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이후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 잘못 예상하였다. 그리고 금을 대량으로 매입하였는데, 워털루 전투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나버리자 금값 폭락을 통해 손해를 크게 볼 위기에 처했던 것. 이 때 네이선은 이를 매꾸기 위해서 승부수를 띄웠고, 엄청난 자금을 들여 국채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정부 차입이 감소하고, 국채 가격이 오른다고 예상했던 것. 그리고 결국 채권 가격이 40% 상승한 고점에서 네이선은 채권을 매각했다. 로스차일드는 현재 가치로 6억 파운드 넘게 벌었다. 결국 음모 같은 것은 없었고, 예측 가능한 경제적 흐름을 절묘하게 이용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여러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이 이들을 거의 저주에 가깝도록 비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돈을 자유롭게 벌더라도 최소한의 도덕은 갖춰야 한다."
- 애덤 스미스(1723~1790)
"내 아들들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전쟁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없어질 것이다."
- 구들 슈내퍼(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17441812)의 아내)
"한 나라의 정부가 은행가의 돈에 의존하면, 정국도 정부 지도자가 아닌 은행가가 장악하기 마련이다. 돈주머니를 쥔 쪽이 아무래도 돈을 쓰는 쪽보다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돈에는 조국이 없다. 금융재벌은 무엇이 애국이고 고상함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이익을 얻는 것이다."
- 나폴레옹(프랑스 황제, 1769.8.15~1821.5.5)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계금융시장을 주도하면서 다른 분야도 거의 장악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남부지역 전체의 재정 수입을 담보로 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유럽 모든 국가의 국왕과 정부 각료가 이들 영향력 안에 있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영국 수상, 1804.12.21~1881.4.19)
"금권(화폐)권력은 평화시에 국가를 잡아먹으려 하고 역경의 시기에는 반역을 꾀한다.
그것은 군주제보다 더 포학하고, 독재보다 더 거만하며, 관료제보다 더 이기적이다. 나는 가까운 미래에 나를 무력하게 하고 내 조국의 위험 앞에 떨게하는 위기가 닥쳐올 것을 알고 있다. 기업이 왕좌를 차지했다. 타락의 시대가 뒤따를 것이고, 재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공화국이 파괴될 때까지 금권(화폐)권력은 대중에게 피해를 끼치며 그 권세를 확장할 것이다. "
- 에이브러험 링컨(미국 대통령, 1809.2.12~1865.4.15)
"경쟁은 대립하는 자본가의 수에 정비례하며 대립하는 자본가의 규모에 반비례한다.
경쟁은 언제나 수많은 작은 자본가의 몰락으로 끝난다. 이들이 보유했던 자본의 일부는 정복자의 손에 넘어가며 나머지는 소실된다."
-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1818~1883), 자본
"이 독특한 조직은 구성원으로 보나 행동의 동기로 보나, 철저한 영리 이익이라는 사적 이해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로스차일드(Rothchild) 가문'은 어느 한 정부에 종속되는 법이 없었다. 이 가문의 여러 가족은 서로 다른 나라로 퍼져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단일한 가문으로서는 국제주의라는 추상적 원칙을 몸소 체현하는 것이었다. 이 여러 가족의 충성을 찬 몸에 지닌 단일한 기업으로서의 로스차일드가 제공하는 신용이야말로 당시 급속히 성장하던 세계 경제의 산업 활동을 정치 영역의정부와 잇는 초국가적 연결 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본다면, 당시에는 한 나라의 정치가들과 국제적 투자가들이 함께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관이 필요했고, 로스차일드가 누리던 독립성이란 바로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유럽 여러나라의 수도에 둥지를 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나라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치외법권을 누리는 로스차일드 유대인 은행가들의 왕조야말로 그러한 절박한 필요에 대해 거의 완벽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 칼 폴라니(1886.10.25.~1964.4.23), 거대한 전환1백년 평화, 2009
1816, 4형제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1세에 의해 귀족 작위를 받았다. 네이선은 1818 년에 작위를 받았다. 그들 모두 1822929일 오스트리아 남작의 권리를 수여 받았다. 몇 명은 드 혹은 폰을 귀족의 증거로 인정했다. 1885년에 로트실트 은행 런던 지점의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2(18401915)는 귀족 직함을 수여받았다.
로트실트 은행 사업은 유럽의 산업화 동안 국제적 융자로 높이 발전했고 세계 전역을 걸쳐 철도사업을 후원할때 철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계획을 지지하여 공장에 자금조달을 해주었다. 대다수의 사업은 직접적으로 로트실트 가문의 해상보험을 포함한 자본으로 이루어진다.(1824)
로트실트 가문은 이스라엘의 후원자이다. 에드몽 자크 드 로쉴드 남작은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리숀레지온의 첫 번째 이민 후원자이다. 1917, 워터 로스차일드는 밸푸어 선언의 수신인이었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영국 정부로부터 약속받았다.
제임스 아먼드 드 로스차일드는 이스라엘에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이스라엘의 지방법원건물은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후원하였다.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새 지방법원 건물 건축을 후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려고 국무총리 피러스에게 썼던 편지가 국외 대통령 회의실에 전시되어 있다.
 
프랑크 푸르트의 유대인 공동묘지에는 이렇게 적힌 묘비가 있다.
이작 엘하난 1585년 사망
 
이 사나이는 1560년대 유대인 거리의 집에 살았으며, 그 집의 특징은 방패 모양의 빨간 간판, 즉 붉은 방패(rot schild)였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유대인에서는 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이름만 주어졌다. 이 집안은 200년이 흘러 집안을 상징하던 빨간 방패를 성으로 하여 로스차일드로 불리게 되었다. 1750년대 암셀 모제스 로스차일드는 사치품 거리를 금지하는 시 법률에도 불구하고 비단 등의 상품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암셀 바우어는 모제스 멘델스존(작곡가 멘델스존의 조부)이 만든 유대교 계몽주의 운동인 하스칼라(Haskalah)의 영향으로 하나의 신 아래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773년 시온의 12현자 회합을 갖고 이 자리에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세계질서의 청사진을 그린 것이 시온의 의정서이다. 177651일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와 예수회가 운영하는 잉골슈타트 대학의 아담 바이샤우프트는 일루미나티를 창설하게 된다.
마지막 성도 The final ecclesia, 데이비드 차, KAM, 페이지 95-97페이지
 
chateau mouton rothschild, mouton rothschild샤또 무똥 로트쉴드란 세계 100대 와인도 로스차일드 것이고 우리나라 유명 연예기획사 사장도 그들과 사진을 함게 찍은 것도 있다. 필자는 일루미나티도 만든 로스차일드가 세계 최고부자란 음모론을 특정 종교 단체가 꾸며냈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1520년 생긴 알롬브라도스 [Alombrados]로도 불리는 조직으로 특이하게 우리나라 서울에 있는 한 학교의 마크가 붉은 방패로 되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붉은 색은 너무 강렬하여 잘못 이해되기도 쉬운데 우리나라는 붉은색=공산주의 빨갱이란 인식이 너무 강하지만 현재 여당인 새누리당의 붉은색 마크로 바뀌었을정도로 인식이 전환되었다. 빌게이츠가 사회주의를 선호할 정도로 사실 공산주의도 중산층 소멸과 국가붕괴를 위해 거대 자본가가 피라미드형 계급을 만들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붉은색은 신호등 색으로 쓰일 정도로 경계 경고의 사인이다.
이런 붉은색이 특이하게 피부 표면에 생기는 발진, 발적, 염증등이 있는데 특이한 것은 붉은색으로 튼살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런 적색 튼살은 튼살이 생긴지 얼마 안되어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으로 다행히 쉽게 빨리 잘 치료가 되는 편이다. 그렇다고 흰색 튼살이 치료가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다. 백색 튼살도 튼살침인 ST침으로 잘 치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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