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1일 금요일

이승만의 귀국과 연설 흉터치료

이승만의 귀국과 연설 흉터치료


1945년 10월 4일 뉴욕, 그 간 미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귀국길에 올랐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다.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이승만은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이승만이 귀국후에 벌인 첫 번째 대미교섭은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문제였다. 이승만은 존 하지에게 임정을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령관 하지는 답변을 회피한다.
이승만은 측근들에게 "존 하지가 임정을 불한당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여러번했다. 그러나 이승만 역시 속으로는 임시정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선 임시정부가 "정부" 자격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우겠다는 뜻을 품은 이승만으로서는 임시정부가 대내외적으로 법통을 인정받는 형식으로 귀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귀국 당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군정 또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이에 이승만은 10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귀국하자 국내의 후견인이자 독립협회 때부터의 동지였던 윤치호가 만나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윤치호를 만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의 환영회를 할 때 조병옥은 이승만을 맨 앞의 좌석에 앉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10월 16일 이승만은 사실상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는데 어떻게 앞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하지 장군이 항의를 하자 조병옥은 대답하기를 "이승만 박사는 비록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게 될 것이지만 그는 독립운동의 원훈이므로 당연히 앞자리에 앉아 여러분을 환영해야 한다."고 이틀 동안이나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하지 장군은 결국 조병옥의 말에 수긍하고 자기 스스로가 이승만 박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지 장군이 답사를 마치고하단하자 이승만 박사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하지 장군과 정답게 악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어 조병옥은 직접 이승만 환영사를 낭독했다.
“이제 우리 한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용전분투한 역전용사 미군을 환영하는 이 마당에 우리는 40년간 우리 한민족을 착취하고 압박하던 이 백아전당(白亞殿堂) 앞에 우리의 자유독립의 상징인 백발이 성성한 이승만 박사가 바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하고 이승만을 소개하였더니 덜어선 회장의 수만은 청중들에게서 우레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감격의 울음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퍼져나왔다.
박수소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조병옥은 연설을 계속하였다. "이 백아전당은 희고 깨끗이 단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일보던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우리 한민족을 어떻게 해야만 많이 착취하고 일본에 예속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계획하고 집행한 저주받은 아성입니다. 그러나 이 백아전당의 흰 것과는 달리 우리민족의 자유독립의 상징인 이승만 박사의 백발은 40여년 간의 해외의 모진 풍상을 다 겪어가면서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되도록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위하여 투쟁한 인생의 산 역사를 말하는 백발의 기록이며 상징일 것입니다.”
조병옥이 말을 맺었을 때 다시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 장군은 직접 답사와 함께 이승만의 약력을 직접 소개하였다. 조병옥에 의하면 '하지 장군도 이 우레같은 박수 소리에 압도되어 자기가 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이승만의 소개를 하였다고 생각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승만 하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하는 떨리는 목소리이다. 필자는 만약 폭탄이 위에서 투하될 때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살텐데 잘못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914~1918년) 하와이 한인들은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였고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국민회측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오래 지속되었고 테러, 폭동이 일어났다. 하와이 법원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소송이 10여건 벌어졌다. 당시 로베르타 장이 수집한 재미한인 교포들의 인터뷰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반수 이상은 이승만이 한인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기억했으며 이승만의 조직원에 의한 암살 시도 증언도 있다.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신한민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민군단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하자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임명되기 전에 당시 임시정부 직제에 없었던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나, 9월 임시정부 체제를 대통령제로 개정하면서 겨우 봉합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도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이동휘·여운형·한형권 등과 대립하였다.
즉 이승만은 자기 중심으로 뭉쳐달라는 것이지 이념이 다른 한민족을 하나로 묶을 생각이 없던 것이다. 근육도 뭉친 것을 푸는 것이 중요하며, 사실 노자 도덕경을 봐도 유연한 것이 단단한 것보다 낫다.
흉터도 마찬가지이다. 콜라겐이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지나치게 뭉쳐져 있는 것인데 화상흉터의 경우도 떡살처럼 단단하게 뭉친 것이다. 따라서 뭉쳐진 잘못된 흉터는 이미지한의원 흉터침과 침, 한약 재생약침등으로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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