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상앙 사목지신 쓸데 없는 화상피부 이식흉터치료

상앙 사목지신 쓸데 없는 화상피부 이식흉터치료


상앙(商鞅,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38년)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유학자이자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상나라를 분봉받아 후작이 되어 상앙으로 부르며 본래의 성(姓)은 희(姫),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鞅)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 위나라 공족(公族)출신이라서 위앙(衛鞅)이라 불렸다.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공족의 후예였으며, 생전에는 유학자를 자처하였다. 거열형의 창시자였는데, 후일 그 자신이 거열형으로 처형된다.
오가작통법의 창시자였으며 당대에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노비 제도의 폐지를 동양 최초로 제장하기도 하였다.
상앙이 추진했던 변법은 당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다.천대받는 서생이었던 그는 자신의 정치사상과 법가를 실현할 나라로 진을 선택했다.또한 강력한 부국강병을 원했던 진효공과 뜻을 맞추어 소국에 불과했던 진을 전국시대 6국에 필적할 나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변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가작통법: 다섯집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단위로 만들었다. 이는 납세와 징병의 단위가 되었다.
상업 억제: 상앙은 강력한 중농주의자였다. 그는 상업을 악업으로 보았고 농업에 전념하기 위해 상업을 강력히 탄압했다. 그러나 후에 진나라가 어느정도 국력이 상승하자 농업과 상업의 균형있는 성장을 꾀하였다. (상업을 포기한 것은 아님)
노예제 폐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지주들의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이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양인을 확충하여 재정을 확충하였다.
군공수작제: 군공수작제를 통해서 누구나 전쟁터나 국가를 위해서 공을 세웠다면, 그에 마땅한 작위를 내림.(국가에 대한 백성의 전쟁참여도 및 민심을 모으기 위함)
악습 및 구습 타파: 진나라에 내려오는 잘못된 악습이나 오랜 전통을 타파함으로써 백성들의 의식 향상을 도모하였음
부국강병의 술책으로 진효공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좌서장을 거쳐 총리 격인 대량조(大良造)로 승진하여 정치개혁의 총설계자가 되었다. 두 차례의 변법을 성공시켜 약소국 진나라를 일약 강대국으로 만들어냈다. 저서로는 《상군서 》(商君書) 29편이 있으며, 병법 지식도 박식하여 병서(兵書)인 《공손앙》(公孫鞅)27편을 짓기도 했다.
사목지신 [徙木之信] 이란 나무를 옮겨 信用(신용)을 얻었다는 뜻으로, 爲政者(위정자)가 백성을 속이지 아니함을 이름. 秦(진)나라 때 商鞅(상앙)이 法律(법률)을 變更(변경)하여 國家(국가)의 富强(부강)을 圖謀(도모)하려 하나 백성이 자기를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한 꾀를 써서 세 길 되는 나무를 國都(국도) 南門(남문)에 세우고 이것을 옮기면 五十金(오십 금)을 상 준다고 하였는데 백성이 怪狀(괴상)히 여기고 實行(실행)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다시 布告(포고)하기를 五十金(오십 금)을 상준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옮기므로 곧 五十金(오십 금)을 주어 거짓이 아닌 것을 보인 故事(고사)에서 나온 말. 移木之信(이목지신). 출전 史記(사기) 商君傳(상군전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이담북스)

상앙은 법을 내려도 실천하는 백성이 없을까 염려하여 쓸데 없이 나뭇짐을 옮기는 사람에게 많은 상금을 줘서 나중에 반포할 법령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것은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화상이 발생하여 피부 이식수술로 한쪽 피부를 화상을 입은 곳으로 공여하여 옮기는 이식수술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화상 이식수술은 흉터를 2배로 키우며, 피부를 준 허벅지나 엉덩이 피부와 화상당한 곳과 피부 두께나 질감이 다르며, 이식중 착상이 안되면 검게 착색되어 죽을 수 있고, 이식부위 주위가 너덜너덜해지는 걸레같은 모양이 될 수 있다. 물론 최근에 이식수술을 받은 화상흉터 환자의 경우 예전보다 나으나 화상피부 이식수술은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다. 이런 화상흉터는 차라리 이미지한의원의 화상흉터침인 BT침 치료를 받는 것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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